8화
한편, 자비에는 눈앞에 벌어진 일에 미간을 매만졌다. 성가신 상황에 맞닥뜨릴 때 그가 하는 행동이었다.
“……영애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지.”
“응.”
자신을 찾아온 친우의 모습에 겉으론 태연한 척 반응했지만, 자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완전히 이쪽으로 떠넘기겠다는 뜻이군.’
이브 에스텔라.
양순하면서 신비로운 얼굴로 익숙하게 책임을 미루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 솜씨였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발레리안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이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자비에는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친우를 속이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철저하게 속이는 수밖에.’
자비에의 녹색 눈동자에 굳은 결심이 스쳤다. 지금 그에겐 저 둘의 파혼이 중요했다.
왜냐면, 약 5년 전에 알게 된 신탁 때문이었다.
<붉은 보름달이 뜨는 날.
태양을 가리는 검은 악귀들이 세상을 비명 소리로 가득 채울 것이다.>
신탁이 뜬 건, 정확히 20년 전,
자비에가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건 태자 책봉을 하게 된 5년 전이었다.
이 신탁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100년 전의 사건을 다시 한번 코앞에 두고 있다는 것.’
100년 전, 제도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악마의 침략 사건은 악몽 같은 역사였다. 그때, 태양의 힘을 가진 엘라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게 되었을 터였다.
‘신탁 이후로 아직 20년 동안, 붉은 보름달은 뜨지 않았다.’
붉은 보름달은 약 100년의 주기로 뜨며, 마법사들의 힘이 강해지는 시기기도 했다.
그러면 그 100년 전과 같이 마법사가 악마들을 소환한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마법사의 존재는 없었다.
어쩌면 마법사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마법사를 찾아내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었다.
이 상황 앞에서 악마들을 앞장서 처단해야 할 발레리안이 지금 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조금 이상해졌다.
자비에의 예리한 촉은 그 변화가 불러올 무형의 무언가가 위험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듣기도, 믿기도 힘든 일일 수도 있다.”
자비에의 말에 발레리안의 입술이 굳었다.
“당장 말해.”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런 식이었다. 이브 에스텔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기이한 집착을 드러내는 건.
“일전에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황궁의 주치의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었지.”
“……궁내의를?”
“그녀에게서 사정을 들은 나는 그녀에게 궁의부 최고 권위자인 카니엘에게 진찰을 받도록 도와줬지.”
발레리안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의 손에 있던 물컵에 잔잔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찰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아.”
자비에가 말했다. 쨍그랑!
발레리안의 손에 있던 컵이 파편이 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그에 손에 흐르는 핏물에 자비에는 급히 시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지금 루드비히 소공작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니-”
“난 됐으니, 카니엘 리데반을 불러.”
자비에의 말을 끊은 발레리안은 짓씹듯 내뱉었다. 흉흉한 그의 눈빛에 자비에는 순간 오금이 저리다는 느낌을 처음 느꼈다.
발레리안이 이러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자비에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꼭 직접 들어야 하겠다면.”
고개를 끄덕인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궁의부 카니엘 리데반을 데리고 와.”
* * *
“왜 갑자기 밥을 굶겠다는 거니?”
돌연 끼니를 거르겠다는 딸의 모습에 백작 부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살을 빼야 해서요.”
“뭐?! 네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누가 너보고 살쪘다고 뭐라 했더냐!”
특히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노발대발했다. 제 딸한테 그런 몰상식한 말을 한 잡것이 있다면 곧바로 붙잡아서 혼을 빼놓을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이 뻔히 읽혀 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나가 주세요.”
굶으니까 기력이 달렸다. 이브는 침대에 뒹굴뒹굴 누우며 다음 계획을 찬찬히 살폈다.
‘이제 사망 선고를 내려 줄 의원만 포섭하면 끝이야.’
그 의원은 아마 황태자의 추천을 받고 올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돈으로 매수하는 것보단, 내부 사람이 더 신용이 가는 법이었으니.
부모님이 나가고 방에 남은 노아는 그런 동생이 이상한지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어디 아파?”
“곧 아플 예정이야.”
“아플 예정이라고?”
귀찮다며 꺼지라는 그녀의 눈빛에도 노아는 굴하지 않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고집스러움을 알고 있던 이브는 마지못해 제 계획의 일부를 들려주었다.
“미쳤냐?”
당장 기함하는 노아의 모습에 이브는 피곤해졌다.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발레리안한테 가서 설득 좀 해 봐.”
황궁에서 군대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던 노아는 발레리안과 자비에와도 꽤 친한 사이였다.
어릴 적에도 아버지를 따라 종종 황궁에 갔었으니, 발레리안과 자비에와 얼굴이 익숙한 상태였다.
“이상한 데 고집을 쓰면 절대 못 말려. 그 녀석.”
노아는 깊은 한숨을 내뱉곤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가. 나 피곤해.”
하나 있는 오라비가 영 쓸모가 없었다. 이브는 휙 돌아누웠다. 그런 그녀를 흘겨보던 노아는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열리는 문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나 좀 혼자 내버려 두라고……!”
노아인 줄 알았는데 들리는 목소리가 전혀 달랐다.
“이, 이브. 발레리안이…….”
어머니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브는 그녀 뒤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흠칫했다.
“이브.”
발레리안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황궁에서 만났거늘. 지금은 그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그가 방에 들어오며 이브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보다 조금 마른 것 같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황실에서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무슨 일이야, 발레리안.”
당황을 숨기기 위해 이브는 일부러 건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날 보러 올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다음 날이나 모레쯤 보러올 줄 알았지. 심지어 지금 발레리안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리안, 손은 어떻게 된 거야…….”
이브는 그의 손에 얼기설기 매여 있는 붕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자비에랑 싸움박질이라도 한 건가?
이브는 설마, 하는 얼굴로 발레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이브, 자비에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야?”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그가 황태자에게 깜빡 속은 걸 알아차리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황태자가 거짓말에 능숙하네.’
이렇게 발레리안을 한순간에 감쪽같이 속였다면, 아마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나, 증인을 내세웠을 것이 분명했다.
높은 확률로 그건 황궁의가 되었을 테고.
“왜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던 거야?”
발레리안이 무언가를 참는 듯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미안해…… 일찍 말해 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널 오래 붙잡았어.”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가 돌연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늘 화창한 하늘 같았던 그의 눈동자에는 어두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 안에서 금방이라도 빗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브, 지금이라도 제대로 치료를 받아.”
이브는 난감했다. 이렇게 그가 절절하게 그녀에게 매달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그랬었나?’
이유리가 악마의 소행으로 독을 먹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발레리안이 어떻게 행동했더라.
‘악마들을 처단하고 오겠다고 했었지.’
제국은 지금 그 악마와 마법사가 한통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건 누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원래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까.’
황제에게 당장 마법사들의 무죄를 호소해 봤자, 기다리는 건 차가운 죽음이었다.
그녀는 발레리안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놓으며 말했다.
“조용히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여생을 살아가고 싶어.”
“이브…….”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나도 따라갈 거야, 이브.”
이브는 속으로 정색했다. 그가 옆에 붙어 있으면 종일 시한부 연기를 해야 하는데?
절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 뜻을 그녀는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내가 죽는 모습, 발레리안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
그는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굳은 얼굴로 일어섰다. 그러곤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후우…….”
이제 끝난 건가. 이브는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듯했다.
“너처럼 연기 잘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문 뒤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노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이브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이제 진짜 다시는 안 오겠지?”
“그러겠지…….”
노아가 대꾸했다. 방금의 이브는 정말 짧은 여생을 앞둔 사람처럼 처연하고, 슬퍼 보였다.
일순, 진짜 이브가 시한부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
‘곧 죽을 사람이 그렇게 부탁하는데 어쩌겠나.’
발레리안도 별수 없는 것이다.
그에겐 그녀의 곁을 떠나는 방법밖엔 선택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