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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7화 (7/100)

7화

“5천만 실링. 어느 황실의 3대 독자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혹할 만한, 유혹적인 금액이긴 합니다.”

황실의 3대 독자라면 누구를 말하는 건지 투명했다. 바로 자비에, 그 자신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해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에서 부글부글 끓는 분노는 그녀한테도 느껴졌다.

‘대놓고 돈에 눈이 멀었다고 빈축을 사는 것보단 낫다고 해야 할지.’

물론 그녀는 이 상황을 해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에게 이 상황을 해명한다고 이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저는 발레리안과 꼭 헤어지고 싶어요. 전하.”

“그렇습니까?”

자비에는 설핏 스치듯 웃으며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이보다 확실한 계획을 제시하고 싶어요.”

“이번에도 발레리안과 헤어지기 위한 계획입니까?”

“네, 그래요.”

이브는 전날 밤새 고민했던 계획을 입에 담았다.

“제가 시한부가 되는 거예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던진 황태자의 눈빛에 황당함이 물들었다.

“진심으로 하는 얘기입니까?”

이브는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물론 증여받은 그 돈도 다 돌려줄 거고요.”

“정말 황당무계하군요…….”

말하던 그가 멈칫했다.

그녀가 발레리안을 쉽게 끊어 낼 수 없을 거란 건, 자비에도 예측했던 바였다.

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발레리안은 만인에게 다정하고 친절했지만, 보이지 않는 차가운 벽이 있었다.

그러나 이브 에스텔라를 만나고 나서 그 벽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아주 가끔, 기이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자비에는 그 모습을 볼 때,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감을 깨달았다.

그때 위기감이 들었다. 어쩌면 발레리안이 태양의 힘을 온전히 제국을 위해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태자로서 책봉되자마자 20년 전 신탁을 들은 자비에는 발레리안의 친우보단 차후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자로서 판단을 내렸다.

‘그 일만은 절대로 막아야만 한다.’

그는 이브 에스텔라 영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었고, 그녀가 승낙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조금 황당한 계획을 들고 오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방법으로 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자비에는 그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발레리안이 시한부인 그녀를 감싸고 돌면 돌았지, 그녀가 아프다고 내팽개칠 위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루드비히 가문이 절 좋게 봐줬다고 해도, 시한부 며느리를 보고 싶진 않겠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하나요? 영혼결혼식이라도 하려나?”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자비에는 그녀의 말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진심으로 하는 얘기입니까?”

“네, 이건 농담으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대답했다.

이왕 시한부로 속일 거, 죽음까지 위장할 생각이었다.

‘오히려 이쪽이 나아.’

발레리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더라도, 이젠 그녀가 살고 싶었다.

차라리 죽은 사람이 된다면 어느 세상의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녀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여생을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것뿐이었다.

“하지만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의외로 자비에가 강경하게 말했다. 이브는 그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삼켰다.

“그럼 이대로 발레리안이랑 결혼이라도 하라고요?”

“그건…….”

절대 안 될 일이겠지. 이브는 그간 황태자가 자신을 돕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도출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녀의 배경, 혹은 그녀의 다른 요소들이 발레리안의 일에 지장을 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자비에는 제국에 관한 일이라면 냉정해지는 남자였으니까.

“덕분에 좋은 구실이 생겼어요. 가문이 망했다는 이유를, 제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망했다는 이유로 포장하면 되니까요.”

자비에는 진심으로 발레리안과 헤어지길 원하는 이브의 모습에 한편으론 의아해졌다.

예전에 그러한 요구를 했을 땐, 개소리를 들었다는 듯 단호히 무시하더니 갑자기 생각을 바꾼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부분은 황실 주치의의 협력도 필요해서요.”

“영애의 병증을 공증할 사람, 말입니까?”

“네, 정확히 파악하셨네요.”

이브는 황태자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마뜩잖아 보이는 기색이 만연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전하께서도 협력하시는 거로 알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브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궁을 걷는 동안, 그녀는 자비에에 관해 떠올렸다.

원작 소설을 읽을 당시엔 서브 남주였던 자비에가 독자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겉은 쌀쌀맞아 보여도 이따금 보이는 다정한 성미가 독자들의 덕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하여 여주와의 러브 라인으로 독자 여론은 남주와 서브 남주의 지분이 반반으로 갈렸었다.

하지만 작중의 중반부.

여주인공 이유리는 자비에가 아닌, 발레리안을 택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자비에는 깔끔히 물러났다.

인간의 미덕과 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가 친우의 연인을 사랑하는 건 죄악이라 생각했던 탓이다.

‘참 바람직한 친구네.’

그런 남자가, 그녀의 약혼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한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아마 그쪽에서 그녀가 발레리안과 헤어지려는 이유를 묻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터였다.

피차 그 이유를 알아봤자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말하지…….”

발레리안을 만나면, 그녀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해결했다고 생각한 숙제가 조금 더 어렵게 등장한 것이다.

‘나, 시한부야.’

면전에서 이 한마디를 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소문으로 알게 할까?’

이브 에스텔라 영애가 큰 병에 걸려서 며칠을 넘기지 못한다는, 그런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다.

‘그렇기엔 너무 밥을 잘 먹었는데.’

쉬이 믿어 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황태자의 도움이 필요한 거였지만.

황궁의 분수대에서 쉬고 있던 이브는 눈앞에 지나가는 한 사람에 두 눈을 의심했다.

‘발레리안!’

왜 그가 여기 있단 말인가?

그녀는 허둥지둥 몸을 숨기려다가 그 행위가 곧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녀를 담고 있었다.

“발레리안…….”

이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조금 시한부라는 설정에 더 설득력 있도록 연기력과 살 좀 빼고 만날 생각이었는데.

“이브,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별을 통보한 이후로, 그를 만난 건 여기에서가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이브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왔어.”

“……할 일?”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딱딱하게 들렸다. 흠칫한 이브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다정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이브는 제가 잠시 잘못 들은 거라 치부했다.

그녀를 보던 발레리안이 입술을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이브, 미안해. 내가 조금 더 그 어려움을 일찍 알고 살펴야 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고생시키고 말았어.”

“아니야, 그게 왜 리안이 사과할 일이야.”

“앞으로 이런 일이 있다면 꼭 말해 줘야 해. 숨기지 말고, 이브.”

“응…….”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엔 죄책감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가슴 아픈 말은 다시는 하지 말아 줘.”

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진심에 가슴에 돌이 얹힌 듯 무거워졌다.

‘그래도 그 대필을 알아본 게 발레리안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다행히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뭉근히 그녀를 보던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거지?”

“응.”

5천만 실링을 받았는데 형편이 괜찮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실 너무 많은 금액이라서, 아직 건들지도 못했어.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그녀는 넌지시 그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걸 어필했다. 당장이라도 공작 가문에 다시 돌려줄 수 있다는 의미로.

“백작님도 곧 생각을 바꾸실 거야. 가문을 위한다면.”

발레리안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녀는 제 뜻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이브는 당황했다.

“그러니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가문에서 총력을 다해 범인을 찾을 거야. 이브도 안심해.”

뭐?

‘범인을 찾게 된다면 나라는 게 밝혀질 텐데……!’

그럼 다른 의미로 그와 결별하는 게 가능해진다. 아마 그녀의 여생은 감옥에서 보내게 되겠지.

이브는 빠르게 수습했다.

“사실 난 우리 가문의 형편이 어떤지 이 이상 밖으로 나가는 건 원치 않아…… 리안,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응, 그럼. 이브.”

발레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머무르다가 떨어졌다. 찰나였지만 그녀를 보는 푸른 눈동자는 미묘한 빛을 띠었다. 마치 그녀의 반응을 유심하게 관찰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이브는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

그러나 이어진 그의 물음에 그녀는 미묘했던 그의 눈빛을 잊어버렸다. 그녀는 고민에 휩싸여 멈칫했다.

‘그냥 여기서 말할까?’

내가 시한부라고.

“사실 나한테 문제가 있어.”

일부러 이브는 말하기 힘든 척,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줘.”

점차 발레리안의 얼굴이 희게 굳어져 갔다. 이브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힘들어. 전하를 만나서 들어보는 게 나을 거야.”

그녀는 차마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가련히 입매를 떨었다.

그리곤 인사 없이 뒤돌아 그를 등졌다.

‘나머지를 부탁해요, 전하!’

그녀에겐 좋은 협력자가 있으니, 응당 활용해 주어야 하는 법이다.

바로 책임 떠넘기기로.

그녀는 황태자를 속으로 힘차게 응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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