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공작님께.
저희 가문의 사정을 살펴 주신 건 감사하오나, 이 역시도 저희 가문의 일이라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이 이상 폐를 끼치는 건 원치 않으니 본디 가문을 위한 결단을 내려 주었으면 합니다.
- 루벤 에스텔라 드림.
에스텔라 가문의 인장이 그려진 실링 왁스까지 편지에 부착한 이브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정도면 눈치채지 못하시겠지.”
끝엔 파혼 의사와 함께 아버지의 서명까지 적어 두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옆에서 서류 작업을 도운 일로 그의 필체를 따라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 정도면 공작님께서도 잘 알아들으시겠지……. 부디 그러시길 바랄 뿐이라고, 이브는 간절히 기도했다.
* * *
중년이라곤 믿기지 않은, 금발의 미남자가 집무실에 앉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태양의 힘을 가진 엘라는 잘 늙지 않는 육체를 타고났다.
또한, 그 힘을 가질 수 있는 가문은 루드비히 가문이 유일했다.
그 가문의 수장인 그는 책상 위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끝엔 백작저에서 온 편지가 편지 칼로 깔끔히 열린 채 놓여 있었다.
“백작이 이런 도움을 원할 위인은 아니지. 거절은 당연하다.”
늘 얼음처럼 딱딱하고 차갑기만 한 루드비히 공작은 드물게 안타깝다는 듯 눈을 감았다.
이브가 들었더라면, 루드비히 공작이 큰 착각을 하고 있노라고 정정해 주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로서도 아쉬울 따름이다.”
루드비히 공작의 말은 진심이었다.
공작이 재산 절반을 증여해 준다고 한 이유는 발레리안에게 있었다.
늘 선량한 성직자 노릇을 하며 정작 후계자의 자리에 관심이 없던 제 아들이 에스텔라의 여식과 결혼하게 되면 공작위를 맡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저쪽에서 거절을 해 오니.’
공작은 제 신의와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의 의견을 꺾고 싶지 않았다.
“네가 힘들더라도 이대로 놓아주는 것이 백작 가문에 대한 존중이다. 여기서 더 버틴다면 백작의 지조를 우습게 만드는 꼴이지.”
“아뇨, 그럴 일은 없습니다.”
여전히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이건 백작님의 필체가 아닙니다.”
발레리안과 같은 루드비히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서늘히 번뜩였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 것이냐.”
“백작님의 편지와 대조하여 필적 감정을 의뢰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발레리안이 단정적으로 말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리라. 꽤 제 아들을 신임하는 공작은 옆에 있던 보좌관 레인 페드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레인 페드로는 눈치 빠르게 그 시선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필적 감정사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렇게 잠시 뒤, 루드비히 공작가에 필적 감정사가 도착했다.
제국 내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알려진 감정사였다. 레인 페드로가 말했다.
“이 편지 두 개가 서로 같은 사람인지 감정하면 됩니다.”
공작가의 집무실로 들어선 필적 감정사는 절로 드는 위압감에 긴장했다.
“그리고 이 편지의 내용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입니다.”
그리고 감정사는 제 앞에 놓인 계약서를 보고 서명했다.
“편지의 내용을 유출하면 그 즉시 가문 차원에서 수습이 들어갈 겁니다. 그 수습에 포함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레인 페드로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나직이 경고했다. 그 수습이 대충 무슨 일인지 가늠이 되었던 감정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필적 감정이 시작되었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감정사의 입이 열렸다.
“정말 정교한 솜씨군요. 절대로 일반인은 판단할 수 없었을 겁니다.”
루드비히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누군가 위조한 편지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필적 감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단,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감히, 이런 걸 위조하다니.”
공작의 푸른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자칫하면 이 편지를 믿고, 백작 가문에 증여를 포기할 뻔하지 않았나.
“그럼 이 위조를 한 범인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나?”
그 범인을 잡는다면 일벌백계를 하여 같은 선례가 남지 않도록 할 것이다. 공작은 서늘히 생각했다.
서리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듯 차가워진 실내에 감정사는 몸을 떨며 말했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선…… 편지 위조자가 쓴 다른 편지가 필요합니다.”
공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편지 위조자가 쓴 다른 편지, 그건 현실적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송구한 말씀이오나…… 힘들 것 같습니다.”
필적 감정사는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몸을 덜덜 떨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이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종종 백작 가문에 방문했을 때, 본 적이 있던 필체였기에.
정확히 백작을 대신해서 집무를 보던 이브가 쓰던 필체였다.
‘이브 에스텔라.’
대체 그녀가 왜 이러는 것인지, 발레리안은 묻고 싶어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일렁였다.
“당장 채비를 꾸리도록. 에스텔라 백작저로 갈 것이다.”
편지를 쥔 루드비히 공작이 일어났다.
* * *
편지를 보내었던 금일 저녁.
이브는 벌어진 일에 뒷목을 잡고 고꾸라질 뻔했다.
“공작 각하께서 여길 오셨다고요?”
심지어 그녀가 보냈던 편지를 들고, 가문으로 찾아왔단다. 그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혹시 들킨 건가?’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급히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엔 루드비히 공작이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집이 담보로 넘어간 상황은 아닌가 보군.”
집을 둘러보던 공작이 말했다. 이브와 백작 부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가문이 망하질 않았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루드비히 공작께선 여기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에스텔라 백작이 입을 열자, 공작이 편지 두 장을 품에서 꺼냈다.
“재산 증여에 대한 편지는 받은 게 맞소, 백작?”
에스텔라 백작은 직감적으로 사태가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공작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백작이 내 아들과 에스텔라 영애의 혼약에 대해 고민이 깊어 보여 도움을 주려고 했소.”
그러나 뒤에 이어진 말에 이브와 백작 부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필적 감정사까지 불러서 의뢰했다고?’
여태까지 그녀가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대리 업무를 들킨 적은 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이브는 제 손을 떨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결론은 위조였지. 백작 가문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인지, 외부인지는 판단이 안 되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소.”
휴, 다행히 범인은 찾지 못한 모양이다. 이브는 절로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억눌렀다.
‘그럼, 대체 누가 눈치챈 거지?’
필적 감정사를 불렀다는 건, 애초에 누군가 의심을 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녀와 아버지의 필체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없었다.
‘……발레리안조차도 모를 텐데.’
몇 번 그녀가 아버지 대신 일하는 걸 그가 본 적은 있었지만, 다섯 손가락이 꼽는 횟수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눈치도 좋지 않은 편인데, 그사이에 그가 눈치챌 리 없었다.
원작 설정도 그랬었고.
“특별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드비히 공작.”
에스텔라 백작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작은 그가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으려니, 생각했다.
“어떤 일을 꾸미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지만, 꽤 용의주도한 녀석 같더군. 주변을 너무 믿지 말고, 예의주시하시오.”
그렇게 공작은 응접실을 떠나 루드비히 가문의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최후의 통첩 같은 묘한 말을 남긴 채.
-증여에 관한 편지는 천천히 읽어 보고 고민하시오. 이런 일엔 체면보단 가문의 명맥을 잇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말해 주고 싶군.
짐짓 말 내용만 본다면 선택권이 에스텔라에게 있을 것 같지만, 루드비히 공작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완곡하게 그 돈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받게 만들겠지.’
루드비히 공작은 한 번 마음을 먹은 일은 어떻게든 실현하는 사람이었다.
무르디무른 복숭아 같은 발레리안과는 완전히 정반대 유형.
‘어떻게 그 둘이 부자지간이지.’
언제 봐도 믿기지 않았다. 이브는 뒤늦게 발레리안이 이곳에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많이 바쁜 걸까?’
이런 일이 있다면 그녀를 만나러 왔을 텐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들어온 이브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내내 목이 탔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백작이 말했다.
“이브, 이렇게 된 거 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절대로 안 돼요.”
그 돈을 받아서 정말 반역이라도 도모할 것 같아 두려워졌다.
“그렇지만 이렇게 공작께서 손수 발걸음을 하셨는데 거절하기도 조금 그렇지 않느냐. 아마 이걸 거절해서 공작께서 우리 사업을 도와주려고 마음이라도 먹으신다면……”
이브의 얼굴이 굳었다. 돈을 안 받겠다고 해서 사업을 도와주겠다고 발 뻗고 나서면, 그것도 큰일이다.
“그렇게 우리 뒤를 조사하시다가 꼬리라도 밟히면 어찌하려고?”
백작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브는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건 그렇네요.”
* * *
“감탄했습니다. 에스텔라 영애의 수완 능력에 관해.”
황태자 자비에가 이브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게 결단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이브는 바로 황궁에 방문했다.
그리고 재산 증여의 소식이 황태자에게도 닿았는지 그녀를 보는 자비에의 눈빛엔 경멸이 있었다.
한층 차가워진 분위기에 이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다 보니, 졸지에 황태자까지 속여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