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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5화 (5/100)

5화

그녀를 보는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브는 그런 그 모습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녀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발레리안은 저를 설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냉정하게 끊어 내야만 했다.

얼음처럼 굳은 채 그녀의 말을 해석하던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이브. 많이 피곤하면 오늘은 그만 헤어지는 것도 괜찮아.”

정말 눈 뜨고 보기 힘겨운 긍정적인 사고회로였다. 이브는 그가 이별을 믿기 힘들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긴 하니까.’

발레리안은 잔정도 많았다. 그는 원정에 나간 동료가 악마에게 죽임을 당하면 한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약혼까지 한 사이는 오죽할까. 그녀의 이별 통보로 발레리안이 받을 상처를 예상했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이 아니야.”

그리곤 조금의 주관적인 해석도 필요 없는, 확실한 이별을 말했다.

“오늘을 끝으로,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얘기야. 발레리안.”

그녀의 말에 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도 깨달았다. 이건 명백한 이별 통보였다.

“이브, 난 아직도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브는 여전히 이 상황에서 햇살처럼 찬란히 빛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막상 저지르니 더 마음이 굳어졌다.

여기서 매듭을 짓는 것이 맞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이브.”

“조만간 파혼 서류가 가문으로 발송될 거야. 발레리안.”

어차피 그들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사이였다. 이브는 그걸 지금이라도 끝맺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히 여겼다.

“이브,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우리가 파혼이라니-”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빠르게 방금 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와 같이 사이가 좋은 연인이었다.

“이브, 내가 혹시 잘못한 게 있어?”

“아니, 없어.”

“그런데 왜?”

저도 모르게 깨지려는 가면을, 발레리안은 어색한 미소로 무마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간 이브의 행동을 떠올렸다.

비단 그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녀는 단호하게 그의 잘못을 지적해 줄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이별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브는 천천히 발레리안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당혹감이 번지던 얼굴엔 혼란스러움, 이어 기이한 확신이 맴돌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이브.”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일순 차가운 빛이 스쳤다. 이브는 눈치채지 못할 찰나였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가 꼭 헤어져야 하는 일이 벌어졌어.”

바로 네가 원작 속 용사님이고, 내가 너에게 처단당할 운명인 마왕쯤 되는 포지션이라는 사실이지.

물론 그녀는 그걸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처연한 척 눈썹을 파르르 떤 그녀는 입술이 천천히 열었다.

“우리 집 망했어.”

“……뭐?”

당혹스러워하는 눈빛이 보였지만, 이브는 그 연기를 끝까지 지속하며 말했다.

“그러니 가문을 생각한다면…… 우리 사이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맞아. 그럼 잘 지내, 발레리안.”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이브는 사뿐히 뒤돌았다.

달그락. 무언가 뒤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돈 앞에는 장사 없지.’

약혼은 몰라도, 결혼은 비즈니스가 들어가는 법이다.

특히나 냉혈한으로 유명한 루드비히 공작이라면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바로 파혼을 강행하겠지.’

그러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발레리안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게 될 터였다.

내내 돌을 얹힌 듯했던 마음이 가볍고 후련해졌다.

‘이 정도면 깔끔한 마무리야.’

이브는 착각하며 백작저로 돌아갔다.

* * *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아니, 평화롭다고 하기엔 이브는 굉장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파혼 서류가 관청에서 수리만 된다면 곧장 이 짐을 들고 시골에 마련해 놓은 저택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우선 짐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생각보다 시골살이를 위해 챙긴 짐이 단출했다.

사교계에 나갈 일도 없었기에 가진 장신구와 드레스를 다 뺀 것이 얄팍한 짐에 한몫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 보고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정말 가려고?”

그녀의 오라비이자, 에스텔라 가문의 장남 노아 에스텔라였다.

두 살 터울인 그들은 누군가를 만날 때 서로 남매라는 걸 부정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렇기엔 그들의 용모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아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그의 자수정 빛 눈동자 색뿐.

한동안 일을 핑계로 집에서 떠나 있던 그가 웬일인지 금방 집에 돌아왔다.

‘한 번 집을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녀석이.’

어릴 때부터 이브는 노아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유독 그녀를 편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아는 그 원망을 그녀에게 분출하며 온갖 심통이란 심통은 다 부렸더랬다.

‘뭐, 이제 과거지.’

이브는 생각보다 아량이 넓었다. 저런 우매한 오라비의 과거 정도는 용서할 자비는 있다는 말씀이다.

이브는 우아하게 눈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응, 속이 다 시원하지? 눈엣가시였던 동생이 제 발로 꺼져 주니 얼마나 속이 편하겠어.”

이브의 말에 노아의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그래, 아주 속이 다 시원하네!”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노아는 휙 고개를 돌렸다. 이브는 어깨를 으쓱이며 짐을 다시 확인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브, 나란다.”

“들어오세요.”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브가 대꾸했다. 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이 나란히 방에 들어왔다.

이브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루드비히 가문에서 편지가 도착했구나.”

“오, 벌써요?”

이브는 반색하며 아버지가 내민 편지를 덥석 받아들었다.

‘파혼 처리가 빨라지겠어.’

생각보다 시골로 내려가는 시간이 빨라지겠는걸? 그러나 편지를 펼친 후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읽을수록 이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거…… 내용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이브는 믿기지 않은 얼굴로 다시 한번 편지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다시 봐도 편지의 내용엔 변함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에스텔라 백작님.

저는 루드비히 공작 가문의 재정 관리인 파올로 아스트레아입니다.

……(이하생략)

공작 가문의 뜻으로 금일 이후, 루드비히 가문의 재산 절반을 에스텔라 백작 가문에 증여하게 될 것입니다.

법적인 절차는 제국 최고의 법무사가 책임질 예정이오니 이에 관해선 염려하실 부분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가문 간의 단단한 결속을 위한 보조금일 뿐, 부담 없이 받으시길 희망한다는 각하의 뜻을 전해드립니다.

- 파올로 아스트레아 드림.

전체적으로 정중함과 적당한 예의가 섞인 필체로 적힌 편지였다. 그러나 그 편지를 쥔 이브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제국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루드비히 가문 재산의 절반이라.

가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 수치였다.

“여기, 편지와 같이 동봉된 서류다.”

에스텔라 백작은 갖고 있던 서류를 이브에게 건넸다. 이브는 그 서류를 받고 싶지 않았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왜 이러는 거야!’

그냥 잠자코 파혼해 주면 좋으련만!

마땅히 감동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마지못해 서류를 받아든 이브는 그곳에 적힌 액수에 기함했다.

‘5천만 실링!’

당장 수도에 남아 있는 땅을 다 매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작은 왕국을 세워도 되는 자본금.

그야말로 손이 절로 떨리는 미친 액수였다.

‘이걸 그냥 준다고? 실화야?’

루드비히 공작님, 이렇게 쉬운 사람 아니었잖아요.

아들의 혼사를 말리기는커녕, 재산 증여를 약속한 서류에 이브는 울고 싶어졌다.

‘이 돈을 어떻게 부담 없이 받으라고…….’

이걸 받으면 제국의 모든 이가 그녀를 주목하게 될 터였다. 절대, 절대로 안 될 일이지.

“혹시 잘못 보낸 건 아니겠죠?”

“레인 페드로 경이 직접 와서 전달해 주었단다…….”

레인 페드로. 루드비히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는 제 얼굴이 따가워 편지에서 시선을 떼었다.

“뭐, 뭐예요.”

“이브, 이 돈이면 충분히 반역을 도모할 자금이 마련된단다.”

에스텔라 백작이 이브의 손에 있던 서류를 슬며시 가져가며 말했다.

“미치셨어요?!”

이브는 저도 모르게 기함했다. 옆에 있던 노아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래, 나도 처음엔 네 말에 따르려고 했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네가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심지어 남편을 말려야 할 어머니까지 설득에 가세했다.

‘이 집구석은 답이 없어.’

아득한 심정에 몸을 휘청거리던 이브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노아, 네가 좀 말려 봐.”

“난…… 난 모르겠다.”

노아도 혼란스러운지 이마를 감싸 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생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브는 희망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어쩌면, 그라면 이 미친 발상에 제동을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네가 도망자로 사는 것보단 이 방법이 나을 수도 있-.”

“미쳤어?”

그런 노아의 발언에 이브는 치를 떨었다. 그나마 노아라면 생각이 다를 줄 알았던 자신의 오판이었다.

“그러다간 우리 목숨은 다 나락이야!”

격한 이브의 반응에 조금 주춤하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건 사과하마. 이브. 그러나 시골로 도망가는 건 다시 생각해 보자꾸나.”

백작은 간절한 눈빛으로 이브에게 말했다.

“어찌 그게 행복한 생활이라 할 수 있겠느냐. 평화로운 시골에서 유유자적 먹고 노는 삶? 옆집에서 저녁을 얻어먹으며 하하, 호호? 네가 바라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지 않느냐?”

“지금은 그게 가장 제가 원하는 삶이 되었어요. 완전 바라마지 않는 삶이죠.”

제게 아련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짜게 식은 눈빛으로 보던 이브는 그의 손에 있던 증여 문서를 빼앗았다.

“앗!!”

“그냥 제가 해결할 테니 제발 가만히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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