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금일 오후, 편지가 도착했다.
요구한 일은 처리한 상태니, 영애께선 내 요구를 조속히 이행해 주길 바랍니다.
- 자비에 루 힐리오스.
생각보다 황태자의 일 처리는 빨랐다.
‘얼마나 파혼이 간절했으면.’
아무래도 그녀가 요구한 조건이 그의 소망에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죽마고우한테 공문서 위조를 요구하는 약혼녀를 붙이고 싶진 않겠지.’
발레리안과 자비에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다.
루드비히 공작 가문과 황실은 개국 때부터 든든한 군신 관계라 왕래가 짙었다.
그 두 사람은 동갑에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공통점까지 있었으니.
‘발레리안의 성격이 모난 곳 없이 순수한 것도 한몫하겠지만.’
그 친화력이면 산길에 조난객을 만나도 다음 날이면 천하에 더 없는 친구가 될 터였다.
그래서 자비에는 그런 친구 때문에 이리 솔선수범 오지랖을 떠는 것이리라.
성가시게 여기기만 했던 자비에의 참견이, 이번엔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가문이 망했다는 오명을 쓸지언정, 내 정체가 밝혀져서 우리 가족이 다 죽는 것보단 나아.’
이브는 기꺼운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한창 봄축제로 밖엔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노크하여 들어왔는데, 백작저의 하녀인 로즈였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물론 로즈도 이 가문의 일원이었다.
알고 보니 고용인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모두 제국군에 쫓겨서 정체를 숨기던 마법사들의 후예였던 것이다.
‘이쪽도 영 안타깝긴 하지.’
이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브는 조금 쌉싸름해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누가?”
“루드비히 소공작님이…….”
“리안이 왔다고?”
이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한번 제 입으로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와의 만남은 필수였다.
‘그런데 이렇게 시기가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녀에게도 5년의 세월을 정리할 시간은 조금 더 필요했다.
‘아니…… 나랑 내 가족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심지어 그녀 앞에 있는 로즈의 목숨도 제 정체가 밝혀지면 간당간당했다.
‘아마 황실은 일벌백계로 다스리겠지.’
이곳에 있던 모든 이가 이브 그녀 하나 때문에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처지를 파악하니 그녀의 가슴이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외출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해 줘.”
“네.”
로즈는 평소와 다른 아가씨의 모습에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평소라면 루드비히 소공작의 방문 소식에 아가씨는 밝은 얼굴로 곧장 마중 나갔을 터였다.
그녀는 아가씨의 말을 그대로 루드비히 소공작에게 전했다.
“잠시 외출 준비로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밝게 웃는 소공작의 모습에 로즈는 멈칫했다.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아가씨가 왜 빠졌는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잘생기셨네.’
아가씨는 지독한 심미안이었기 때문이다.
날것으로 지칭하자면 소칭 얼빠.
잠시 뒤, 하늘거리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이브가 나왔다.
“이브, 좋은 아침이야.‘
자신을 보고 기쁜 듯이 웃는 발레리안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아침.”
그러나 한편으론 의구심이 들었다.
‘기사 세례식이 이제 코앞이라 바쁠 텐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이렇게 연통도 없이 갑자기.
그녀는 뒤늦게 발레리안의 행동이 그답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헤어질 마당에 그러한 사소한 사실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이브. 안 그래도 같이 밖에 나가자고 할 생각이었거든.”
“밖에?”
“응, 한창 축제로 즐겁게 놀고 있는데, 우리도 빠질 수는 없잖아.”
그녀에게 손을 내민 발레리안의 눈이 곱다랗게 휘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브는 그가 내민 손을 못 본 척 지나쳤다.
오늘은 왠지 그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마차에 올라탄 이브는 곧바로 눈을 감은 채 마주 앉은 발레리안에게 말했다.
“나 조금 피곤해서 마차에서 눈 좀 붙일게.”
“그래, 그럼 푹 쉬어. 이브.”
발레리안은 여전히 햇볕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그녀가 어떤 걸 거절해도 무안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방금 손을 잡지 않은 일도 그랬다. 마음이 불편한 쪽은 이브였다.
‘날 보면서 웃고 있겠지.’
눈을 감아서 제 앞의 상황이 보이진 않았지만, 안 봐도 훤히 그려졌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장면이.
‘하지만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저 눈빛도 돌변하겠지.’
저렇게 다정한 눈빛도 그녀의 정체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원작에 근거가 있었다.
성기사단을 이끄는 발레리안은 지하 세계에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잔혹한 처형자, 발레리안 루드비히.’
차원의 틈으로 흘러나오는 악마들을 서슴없이 처형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러나 악마들만 그 처형의 대상인 건 아니다.
100년 전, 마법사들은 악마들과 손을 잡아 제국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때 마법사들은 거의 제국의 기사들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제 유일한 마법사가 그녀라는 걸 알게 되면 발레리안은 필히 자신을 죽이려고 들 것이다.
‘신성하고 거룩한 사명감에 미친 놈이니까.’
대대로 황실을 섬겨 온 루드비히 가문은 황제를 제외한 어느 황족에게도 밀리지 않은 권위를 떨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루드비히 가문이 바로 악마를 처단하는 일로 제국의 평화에 크게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입되어 온 신념이 여자 하나로 흔들릴 리가 없었다.
‘……어차피 이유리를 만나면.’
이별을 말하는 쪽은 이브가 아닌, 발레리안이 될 것이다. 그 전에 어서 끝내야만 했다.
그렇게 그녀 혼자만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마차가 멈추었다. 마부가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감았던 눈을 떠 창가를 보니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 공원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곳도 축제를 즐기는 수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브.”
먼저 마차에서 내린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브는 그 손을 보다가 마지못한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오자,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이브가 묻자, 발레리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 가게였다. 외향을 보아선 음식점 같은데…….
이브는 가게 안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에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와중에 위장은 배고프다고 나대네.’
참 누굴 닮은 위장인지 눈치가 없었다.
하루에 고기 몇 근은 거뜬히 먹을 수 있는데, 하루 굶었다고 위장이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식탐에도 불구하고, 이브는 뼈대는 가늘고 살도 얼마 없었다.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쪄서 좋아했더니, 다 마력이 만들어지는 데 쓰여지고 있었다니.’
이브는 제 체질이 결단코 축복이 아니란 걸 20년 만에 알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의 식탐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물론 그 드문 사람 중엔 어릴 적부터 그녀를 봐 온 발레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브, 마차 타는 동안 배고팠지?”
“……어떻게 알았어?”
이브는 흠칫 놀랐다. 안 그래도 밥도 먹지 않고 나왔기에 마차를 타는 내내 배가 고팠다.
설마 발레리안한테 독심술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큰일이다.
“이브는 배고플 때 미간을 찡그리거든.”
“내가 그랬나……?”
이브는 제 미간을 살살 만졌다. 아무리 만져 봐도 미간은 반듯하게 있었다.
“난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야. 나만 볼 수 있는 미세한 변화거든.”
그런 그녀의 행동을 귀엽다는 듯 보던 발레리안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걸로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짓는 발레리안이 어이가 없었지만, 이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게 뭐야. 별걸 다 신경 쓰고 있었네. 그러면 안 피곤해?”
“난 이브 옆에만 있으면 피곤하지 않는걸.”
발레리안이 말했다. 누가 들으면 ‘하, 저놈 여자 꼬시는 데 참 진심이군.’ 하겠지만, 이브는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성정은 다감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발레리안이 저 말을 빈말로라도 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차,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어느새 가게 안에 앉은 이브는 얼굴을 굳혔다. 대화하다 보니 그에 휩쓸려서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행동하고 말았다.
그사이에 테이블엔 각종 음식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이브의 위장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비프 스테이크랑 레몬 소스가 발라진 양꼬치…… 닭안심 크림수프.’
유독 고기를 좋아하는 이브에겐 식욕을 참는 게 더 고역인 메뉴들이었다.
‘……여기서 배알 좋게 밥이나 먹을 수는 없어.’
마음을 굳힌 이브는 발레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발레리안…… 할 말이 있는데.”
“음식 나왔습니다.”
그때 음식점의 직원이 음식 트롤리를 이끌고 들어왔다. 이브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이번엔 노릇하게 구워진 랍스터구이였다. 육지에선 보기 힘든 해물까지!
산해진미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이브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리안, 오늘 무슨 날이야?”
“내가 원정 일 때문에 이브의 성인식을 제대로 축하해 주지도 못했잖아.”
“난 괜찮은데…….”
최근에 차원의 틈에서 나온 악마들을 처리하느라 기사단의 파견이 잦았다. 그래서 이브의 성인식에 발레리안은 참석하지 못했다.
‘오히려 참석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어쩐지 부모님이 발레리안을 성인식에 초대하지 말라고 만류했던 게 이상했는데, 그 이유를 성인식 날 알게 되었다.
“날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 줘.”
해사하게 웃은 그는 칠면조를 크게 한입 크기로 썰어 이브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이브는 입에서 터지는 육즙에 사르르, 마음이 녹아내렸다.
‘맛있어!’
그래, 음식은 죄가 없지. 이 아까운 걸 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한입 맛본 순간 그녀의 식욕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녀가 빠르게 음식을 비우기 시작하자, 발레리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어머, 이걸 누가 다 먹은 거람?”
정신을 차린 이브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제 앞에 비워진 접시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발레리안의 식기는 너무 깨끗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웃던 발레리안이 그녀의 말에 반색했다.
“배고프면 더 시킬까?”
“아, 아니…… 괜찮아.”
이브는 가까스로 이성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 먹다간 해가 질 때까지 말하지 못할 터였다.
발레리안과 함께 음식점에서 나온 이브는 무언가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식탐에 지배된 사람이었다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런 순간까지 열심히 접시를 비운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진 주홍빛 하늘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노을을 그리고 있었다.
소화를 시키기 위해 호수 공원을 걷고 있던 이브의 옆에 있던 발레리안이 돌연 사라졌다.
“아! 잠깐만 기다려 줘, 이브.”
이 말과 함께.
그는 어떤 가게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이브는 분수대 앞에서 한 차례 심호흡했다.
‘이제 진짜 말해야 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발레리안이 가게에서 나왔다.
그는 무엇을 숨기듯 뒷짐을 지고 있었다.
뒤에 아마 그녀를 위한 선물이나 꽃 따위가 있겠지. 끝까지 참 로맨틱한 남자였다.
그러나 여기서 낯짝 좋게 선물을 받을 만큼 이브는 뻔뻔하지 못했다.
적어도 발레리안에게만큼은.
그녀는 그를 보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발레리안, 우리 이만 헤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