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약혼, 취소하고 싶습니다-3화 (3/100)

3화

“제가 친히 배려해서 보낸 초대장도 깔끔히 무시를 한 분이 절 보고 싶다고 하실 줄은 몰랐군요. 이브 에스텔라 영애.”

단정하게 손질된 검은 머리를 쓸어넘긴 남자는 누가 봐도 빼어난 미남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의 이목구비는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인상이 오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미소가 스치면 누구보다 더없이 다정하게 보였고, 미소가 걷히면 누구보다 차갑고 매서워졌다.

이브에겐 후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그 제안, 아직 유효한 거죠?”

이브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무의미한 입씨름은 시간 낭비였다.

“아, 그 제안.”

한여름의 녹음을 닮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한 달 전, 그는 에스텔라 영애를 황궁으로 불러 요구했다.

‘저는 영애가 발레리안과 파혼해 주었으면 합니다.’

자비에는 그날, 제가 했던 요구를 떠올렸다. 그는 제 요구가 도가 넘는, 무례한 요구임을 잘 알았다.

그리하는 마땅한 사정은 있었지만, 그걸 에스텔라 영애에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넌지시 4년 넘게 그에 대한 눈치를 주었지만, 그걸 외면한 건 이브 에스텔라 영애였다.

근데 성인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황궁에 와서 그의 요구를 승낙하겠다니.

자비에는 그 의중이 의심스러웠다.

“정말 발레리안과 파혼하겠다는 말입니까?”

“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홀짝였다.

늘 고고한 학 같았던 남자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니 살짝 생경하기도 했다.

“저번에 황궁에 불러내실 때 하신 말씀 기억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브는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흘러갈 듯하여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그가 황궁에서 불러내 한 말은 아래와 같았다.

‘만일 리안과 헤어져 준다면 영애가 원하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드릴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때 당시엔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하며 소위 개무시를 했더랬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유일한 구명줄이야.’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자비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 그게 무엇이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브가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원하는 게 전하라도요?”

“……그게 무슨.”

“그 말뜻 그대로요.”

당황스러운 나머지 자비에의 하얀 밀가루 같은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외려 놀란 쪽은 이브였다.

‘뭐야, 이 순진한 반응은.’

그녀는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흘려들으세요. 어디까지 가능하나 궁금해서 간 좀 봤어요.”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정말 그런 의도였다. 이브는 이렇게 진지한 반응은 예상치 못했기에 난감했다.

허구한 날 대귀족들과 알력 다툼을 하는 황태자라 이 정도 농담쯤은 가볍게 흘릴 줄 알았지.

“그런 걸 농담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녀가 별종이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그에 이브가 무심히 대꾸했다.

“정말요? 워낙 전하께선 인기가 많으신 분이라 익숙하신 줄 알았는데 몰랐네요.”

자비에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완전히 고양이 같다니까.’

제 사람에겐 한없이 다정한데, 그녀에게 잔뜩 털을 세우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그녀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그럴 사이도 아니었기에 입을 열었다.

“그럼 진짜로 제가 원하는 걸 요구할게요.”

그녀가 본론을 꺼내자, 자비에의 머릿속엔 여러 요구가 스쳐 지나갔다.

아마도 돈이나, 다른 적당한 혼약자를 요구할 터.

하지만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그녀가 발레리안과 파혼할 이유는 없었다.

자비에는 고요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브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몽환적이지만, 인간과 동떨어진 듯한 이질적인 색.

그녀의 눈동자를 홀린 듯 보던 그는 이어진 그녀의 말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럼, 공문서 좀 위주해 주세요. 전하.”

“공문서, 말입니까?”

그의 예측과는 전혀 동떨어진 요구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자비에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이브는 이러다 제 얼굴이 뚫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네, 공문서.”

이브의 대답에 자비에는 잠시 옅은 한숨을 쉬곤 다시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위조해 달라는 겁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여기서도 보이는데요, 전하.

이브는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황궁에 에스텔라 가문에 관한 재무 문서가 있을 거예요. 그걸 조금, 아니, 많이 만져 주면 돼요.”

“심지어 재무 문서를 조작해 달라는 얘기군요.”

대체 무슨 수작이냐, 하고 추궁하는 시선에 이브가 말했다.

“저희 가문이 망해야 하거든요.”

반듯한 백작 가문이 망하면 한동안 세간이 시끌시끌하겠지만, 나중엔 곧 잊힐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발레리안과 파혼하는 것도, 시골에 내려가서 숨어지내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겠지.

“탈세 목적이라면 차라리 돈을 요구하십시오.”

자비에가 날카롭게 웃었다. 이브에겐 예상한 반응이었다.

보지 않아도 자비에 안에 그녀에 대한 호감도는 맥스를 찍었을 게 분명했다.

마이너스 쪽으로.

“그게 싫다면 저는 리안이랑 결혼할 수밖에 없어요.”

이브는 부러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다소곳하게 웃어 보였다.

“그 전개가 전하께서 원하시는 방향은 아닐 텐데요.”

그녀 자신을 향한 자비에의 눈빛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더할 나위 없는 하극상을 본다는 듯이.

‘아무렴, 고결하신 황태자 전하니까.’

하지만 이브는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냐, 들어주지 않느냐였다.

한편으론 그런 무례한 요구-리안과의 파혼-를 한 사람이, 그녀를 그런 눈빛으로 본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좋습니다. 재무 문서만 위조하면 되는 겁니까?”

생각보다 자비에는 그녀의 파혼을 훨씬 더 바라고 있던 모양이다. 이브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호기심이나 충족시킬 때가 아니었다.

“네, 그리고 이 사실은 리안 모르게 진행해 주세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리안이 알게 되면 모든 게 허사니까요.”

“……알겠습니다.”

끝까지 약혼자에겐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다 이건가.

‘발레리안은 이 영애의 어디가 좋다고.’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제 친우를 속으로 안타까워하며 자비에는 씁쓸한 입안을 차로 축였다.

이브는 그런 자비에의 속이 훤히 보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렇게 응접실을 나서기 직전,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희 가문이 망했다고 소문도 열심히 좀 퍼트려 주세요. 전하.”

* * *

돌연 집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제 딸이 걱정되었던 에스텔라 백작 부부는 집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멀찍이서 보이는 마차에 화색이 돈 얼굴로 활짝 웃었다.

“이브!”

다행히 제 딸의 모습은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 높은 마차에서 사뿐히 내려온 이브는 눈을 깜빡이며 다가온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왜 나와 계시는 거예요?”

“이브! 말도 없이 나갔다 오면 어떡하니!”

“말이 없었다뇨. 편지 남겼잖아요.”

그들을 향해 내뱉는 이브의 목소리가 절로 뾰족해졌다. 아직도 출생의 비밀을 숨긴 부모님께 화가 덜 풀린 상태였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브의 차가운 분위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다가 조금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다.

응접실에 들어온 그녀는 부모님이 제 앞에 앉는 걸 보곤 말했다.

“며칠 뒤에 기사가 뜰 거예요.”

“무슨?”

백작 부부는 설마, 하는 얼굴로 제 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경악하는 눈빛을 읽은 이브가 말했다.

“제가 스스로 제 정체를 밝힌 건 아니고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이브는 아까 황태자와 나눴던 대화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백작 부부의 얼굴이 점점 오묘해져만 갔다.

“그걸 황태자 전하께서 도와준다고 하셨다고?”

“네.”

“아니…… 대체 어떻게?”

황태자가 자신의 약혼이 파혼되길 간절히 바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괜히 말했다간 이상한 오해나 하시지.

‘그쪽은 나한테 쥐뿔만큼도 관심이 없는데.’

제삼자가 보면 황태자가 그녀한테 마음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있는 사람한테 보내기엔 황태자의 눈빛은 서리 폭풍이었다.

‘자고로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라면 리안처럼…….’

무심결에 다시 그의 얼굴을 떠올린 이브는 괜히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는 그녀를 보는 시선이 너무 따스한 남자였다.

“설명하면 조금 길어요. 그러니 이 일에 모두 입 좀 맞춰 주세요. 다른 친인척들한테도 얘기해 주시고요.”

이 모든 게 약혼자와 헤어지기 위해 벌인 일이란 말에 백작 부부의 얼굴이 복잡한 빛으로 물들었다.

“미안하구나, 이브. 우리 때문에 이 고생을 겪게 해서.”

아버지의 말에 이브는 부정하지 않았다.

“조금 일찍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거예요.”

지금 그녀의 오라비인 노아도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부모님이 자식들 양쪽 다 속인 셈이었다.

이런 대형 폭탄 같은 비밀을.

“……미안하구나, 구태여 이런 사실을 밝혀서 네가 죄인처럼 숨어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거예요.”

“지금 발레리안은 네 정체를 모르고 있지 않느냐?”

백작이 물었다. 발레리안이 모르는데 그걸 무슨 수로 알아내냐는 듯한 시선에 이브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알게 될 거예요. 제가 리안 옆에 있다면요.”

“뭐……?! 어떻게!”

깜짝 놀란 백작 부부는 피가 식는지 파리한 얼굴로 기함했다.

“조만간 아시게 될 거예요. 하여튼 저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가까스로 충격에서 헤어 나온 백작 부인이 딸에게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멀쩡한 가문이 망했다는 걸 설명할 거니?”

“포도 농장이 망했다는 식으로 대충 흘릴게요.”

에스텔라 가문의 주요 수익원은 와인 사업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나는 질 좋은 포도가 그 해의 와인 품질을 결정했다.

‘어차피 가문이 망한 이유는 제 마음대로 떠들어 댈 거야.’

가문이 망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면 금방 그 이유는 다르게 부풀려질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