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렇게 일주일 후.
이 모든 일을 자초한 부모님께 활화산 같은 분노를 내뱉은 이브는 결론을 내렸다.
누구 탓을 해 봤자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다는 것.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야.’
제 약혼자한테 이별 통보를 하는 것.
그리고 제국을 빠져나오는 것.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시골 마을로 내려가 여생을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선이었다.
‘적어도 진짜 여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녀가 빙의한 책의 제목은 <성녀의 기사님>.
평범한 차원 이동물 로맨스 판타지였다.
처음 장면은 대신전에 성녀가 강림할 거란 신탁이 내려지는 걸로 시작한다.
몇백 년 만에 내려온 신탁의 주인공인 성녀. 바로 여주인공 이유리였다.
그녀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트럭에 치여 차원 이동한다.
신비한 오로라와 함께 등장한 그녀는 한순간에 신탁의 주인공이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지.’
그렇게 대신전에서 지내던 그녀는 세례를 받고 난 후, 신기한 능력이 각성된다.
바로 ‘타인의 마력을 보는 능력’.
다르게 표현하자면, 마법사를 구분할 능력이 생긴 것이다……. 망할.
그 능력으로 살해 위협을 당하는데, 아마 그 배후가 아무래도 우리 가문……인 것 같다.
‘배후가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까진 못 읽었으니.’
갑자기 무슨 일인지 거기서 연재가 중단되었다. 듣기론 작가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단순히 절필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배후의 주인공보단 여주인공의 능력이 문제였다.
‘절대로 이유리랑 마주쳐선 안 돼.’
자신과 그녀의 가족만 입단속을 한다면 정체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평생 밝혀질 일이 없을 텐데, 이유리가 복병이었다.
“남은 시간은 석 달.”
작중에 발레리안이 22살이 된 여름에 이유리가 소환된다고 했으니, 그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브는 곧바로 채비를 챙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대신전으로 가 주세요.”
몇 시간 마차를 타고, 대신전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발레리안과 같은 기사단에 있는 성기사 루크와 헬리엇이었다.
“에스텔라 영애, 오랜만이군요! 단장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대신전 앞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그들은 마찬가지로 익숙한 이브의 모습에 반가워했다. 그녀는 여트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레리안을 만나러 왔답니다.”
“하하, 단장님이 좋아하실 게 훤하네요. 들어와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보기만 하도 훈훈한 광경에 성기사들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기사들이 발레리안을 부르러 간 사이, 이브는 대신전에 들어섰다.
익숙한 하얀 돌벽과 그 사이로 태양의 신이 그려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이브를 알아본 몇몇 신도들이 인사를 건넸다.
“어머, 안녕하세요, 에스텔라 영애. 오늘도 루드비히 공자님을 보러 오신 거예요?”
그중 가장 독실하기로 유명한 신자인 실비아 부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네, 그렇답니다. 부인.”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요? 어떻게 서로를 이리 소중하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살피는 건지…… 그 신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셔야 한답니다.”
딱히 교황의 여러 명의 내연녀 중 하나인 그녀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지만,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순히 웃어 보였다.
“네, 좋은 말씀 감사해요, 부인.”
“태양의 가호가 에스텔라 영애와 늘 함께하길.”
이제 좀 관심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그 뒤로 계속 말을 거는 사람 때문에 이브는 자리를 슬슬 피했다.
발레리안의 명성은 제국에서도 자자했지만, 대신전에서는 거의 슈퍼스타였다.
그래서 더 그의 약혼자인 그녀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이리라.
‘발레리안은 언제 오는 거람?’
잠깐 그런 생각을 하자, 멀리서 익숙한 금발 머리의 미남자가 다가왔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그녀의 약혼자이자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는 훈련하다가 막 뛰쳐나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잘생긴 얼굴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외려 더 빛이 나고 있었다.
“이브,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그가 뱉는 숨엔 옅은 훈기가 느껴졌다.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자마자 곱게 휘어졌다.
그의 해사한 미소는 언제 봐도 이브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이게 바로 주인공의 마성인가?
한때 그 매력에 빠져 먼저 고백했던 그녀는 이제 제가 인연을 끊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에 긴장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오늘 그 앞에 등장한 목적은 첫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발레리안에게 이별 통보하는 것.
헤어질 구실은 단순한 변심이었다.
조금 조악한 사유였지만 딱히 떠오르는 변명도 없었으니까.
‘상처 많이 받을 텐데.’
이브는 괜스레 밝은 발레리안을 보니 미안해졌다.
‘바보같이 착해빠져선 나한테 나쁜 소리도 못 하겠지.’
하지만 몇 번 눈물을 흘리고 나면, 금방 저따위는 잊어버리고 여주인공 이유리와 행복하게 잘 지낼 것이다.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토라졌다고 생각한 발레리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여기 오는 길에 아리엘 대주교님이 계단에서 넘어지시는 걸 봤어.”
이브는 화들짝 놀랐다.
“뭐? 대주교님이 계단에서 넘어지셨다고?”
아리엘 대주교라면 이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발레리안이 몸을 담그는 기사단의 관할 사제였으니까.
대신전에서 실질적으로 정신적 지주는 무능력한 교황이 아닌, 아리엘 대주교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브에겐 조금 더 인연이 깊었다.
바로 아리엘 대주교가 어머니와 소꿉친구였기 때문이다. 신전의 계단이 낮은 편이 아닌데, 넘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걱정이 앞섰다.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고?”
“어, 발목을 좀 다친 거 말고는 괜찮으셔.”
대충 정황상 그가 다친 대주교를 치료실까지 부축했다가 늦은 듯했다.
“다행이야. 크게 다치지는 않으셔서.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에스텔라 백작 부인이 아팠을 때 아리엘 대주교는 몸소 그녀를 살피러 백작저에 왔었다.
두 분 다 어릴 적 친구라고 하지만, 누군가 다쳤다고 그 먼 길을 오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브에겐 이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발레리안에겐 어머니나 다름없을 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현재로선 병문안을 가는 건 당연한 도리였다.
치료실로 들어서자, 이브를 알아본 아리엘이 반갑게 웃었다.
“어머, 이브! 잘 지내고 있었니?”
고민이 많은지 눈가에 주름이 조금 깊어진 그녀는 여전히 푸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주교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럼, 나 아직 한창이야. 이 정도는 하루 이틀이면 금방 낫는단다.”
“하루 이틀로는 턱도 없어요.”
옆에서 핀잔을 주는 치료실의 사제에 아리엘 대주교는 얄미운 녀석을 본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래, 베로니카는 잘 지내고 있니?”
“너무 건강하세요.”
“그래, 벌써부터 몸이 아프면 안 돼. 베로니카한테도 계단 내려갈 때 조심하라고 하렴.”
친구라 그런지 이브의 어머니와 대주교의 말투는 판박이였다.
“오늘은 발레리안을 보러 왔고?”
“네.”
“참 보기 좋은 한 쌍이야. 오래오래 잘 지내야 한단다. 인연은 소중한 법이거든.”
“네…….”
어쩜 하시는 말씀도 어머니랑 이렇게 똑같으시지. 특히 발레리안이 에스텔라 백작저에 왔을 때 하는 말이랑 흡사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래선 안 되었어.’
어떻게 이브, 그녀의 정체를 알고서도 감쪽같이 발레리안이랑 잘 지내라고 말해 왔단 말인가.
이브가 내내 억눌러 온 원망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사정을 들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가문에서 마법사의 자질을 타고난 건 이브, 하나였다.
달의 힘을 받는 마법사는 대대로 여자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백 년 만에 태어난 여자아이가 자신이었다.
가족들은 그런 이브를 위해서라며 반역을 도모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행여 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가장 큰 적수는 태양의 힘을 가진 엘라, 루드비히 사람들이었다. 그 적수를 바로 옆에 두고 동태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상책이었다.
‘그래서 더욱 발레리안이랑 맺어지게 내버려 둔 거야.’
발레리안을 반역에 이용하기 위해…….
정확히는 발레리안에게서 정보를 캐내기 위한 것이었다.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무모한 전략이었다.
‘나 하나 살자고 이 세계관의 최강자 뒤통수를 치라고?’
그건 벌레 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꼴이었다.
그녀와 발레리안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리엘 대주교의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면 조만간 베로니카한테 편지 보내겠다고 말해 주렴.”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푹 쉬세요. 대주교님.”
“그래, 이브. 와 줘서 고마웠단다.”
당연한 일인걸요. 이브는 채 말하지 못하고 치료실을 나왔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이브, 나 보러 온 거였어?”
그녀를 보는 따스한 푸른 눈동자엔 기대감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빠르게 헤어지자고 하고 털어 버리려고 했던 이브는 그 눈빛에 멈칫했다.
‘응, 사실 너한테 이별 인사하려고 왔어.’
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분위기였다.
“오늘 마침 이브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브가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아.”
“매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면서, 이젠 가끔 생각나나 봐.”
이브는 불편해진 제 마음에 괜한 심통을 부렸다.
이브의 말에 발레리안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건 절대 아니야. 이브. 사실 매일 생각나는데…….”
발개진 뺨에 이어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그는 부끄러운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짓궂게 웃으며 더 그를 골려주었을 테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 모습에 이브는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빨리 말하고 털어 버리고 싶은데 좀처럼 타이밍이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헤어지자고 말한담.’
그녀와 대화를 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감정이 솔직히 드러났다.
이렇게 그녀를 순수하면서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는 건 그가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에 대고 변심했다고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쉽게 털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차라리 이유리가 빨리 나타나서 발레리안 쪽에서 그녀에게 이별 통보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리가 나타나면 내가 끝장인데.’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알아본다면, 정말로 그 길로 끝이었다.
대중에게 돌팔매질 당해서 죽을지언정 발레리안에게 처형당하는 건 더 끔찍했다.
“혹시 이브는…….”
잠시 머뭇거리던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얼굴이 붉었다.
저렇게 덩치는 커다래서 하는 짓은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나 안 보고 싶었어?”
“…….”
그녀가 쉬이 대답하지 않자 그의 눈빛에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그걸 본 이브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보고 싶었지.”
안도하며 말갛게 웃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이브는 쉬이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이브, 성인이 된 걸 축하해.”
그 해사한 미소를 보는 순간, 이브는 생각했다.
‘다른 이별 구실을 찾아보자.’
가능한 이 순수한 약혼자의 마음이 덜 다치는 쪽으로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발레리안과 깔끔하게 끝을 맺을 수 있을까.’
에스텔라 백작저로 돌아가는 동안, 이브는 치열하게 생각했다. 어느덧 에스텔라 가문 마차의 행선은 바뀌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