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봄볕이 드는 화창한 날씨.
어느덧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봄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 웃지 못하는 유일한 남녀가 있었으니.
그때, 가게에서 막 꽃과 작은 상자를 웃으며 들고나온 남자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브, 난 아직도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녀의 말에 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명백한 이별 통보였다.
이브는 햇살처럼 찬란히 빛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이브.”
“조만간 파혼 서류가 가문으로 발송될 거야. 발레리안.”
어차피 두 사람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사이였다. 이브는 그걸 지금이라도 끝맺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히 여겼다.
“이브,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당혹스러운 눈빛을 하며 답답한 말을 하는 그에게 이브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있는 말 그대로야. 우리 헤어지자고.”
“…….”
발레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는 빠르게 방금 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가?
필사적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브, 내가 혹시 잘못한 게 있어?”
“아니, 없어.”
“그런데 왜?”
발레리안은 그녀의 말에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 이런 식이었다. 비단 그녀는 그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이별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는 쉬이 제 입으로 이별을 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이브는 천천히 발레리안의 변화를 바라보았다. 당혹감이 번지던 얼굴엔 혼란스러움과 불안함…… 이어서 기이한 확신이 맴돌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래. 우리가 꼭 헤어져야 하는 일이 벌어졌어.”
그걸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이브는 입을 열었다.
“우리 집 망했어.”
그녀는 그대로 뒤돌았다.
“그럼 잘 지내, 발레리안.”
그게 그들의 끝이라, 이브는 착각하고 있었다.
* * *
이브 에스텔라.
그녀가 돌연 사랑하는 연인에게 파혼 통보를 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녀의 성인식 날 벌어진 일을 살펴봐야 했다.
그녀가 제 약혼자인 발레리안에게 이별 통보를 하기 정확히 2주 전.
그때만 해도 그녀는 즐거움에 한껏 젖어 있었다.
오늘 밤에 드디어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인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거울 속 이브의 모습은 보석을 사람 형태로 빚어놓은 것처럼 아름답고 휘황찬란했다.
평소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던 에스텔라 백작이 제 딸만큼은 끔찍하게 여겼기에, 그녀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보석과 드레스를 입은 상태였다.
이브는 활짝 웃으며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어때요, 어머니?”
그 모습을 흡족하게 보던 백작 부인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딸은 언제나 예쁘지.”
그러나 백작 부인의 미소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어머니의 미묘한 표정을 눈치챈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몸이 불편하세요?”
“아니, 아니란다…….”
안 그래도 성인식이 다가올수록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걱정이 엉킨 눈빛으로 그녀를 본 어머니가 다가왔다.
“우리 딸, 잘할 수 있지?”
“그럼요, 혹시 성인식 때문에 걱정하셨던 거예요?”
이브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마정석이 박힌 목걸이를 만지는 것뿐. 그녀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하지, 노아도 쉽게 해낸 일인데.’
제 오라비도 쉽게 해낸 일인데, 저라고 못할 거 있나. 오히려 더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아가씨, 황실에서 편지를 보내오셨어요.”
“어머, 네 성인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백작 부인은 감동한 시선으로 황금색 봉투에 든 편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시선에 이브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편지에 담긴 내용이 대충 어떤 내용일지 가늠이 되었던 탓이다.
‘또, 발레리안이랑 헤어지란 얘기겠지.’
발레리안의 오래된 친우인 황태자 자비에.
그는 그녀가 발레리안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저 그런 백작 영애가 루드비히 적자의 옆을 꿰차는 게 보기 싫은 건가.’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짐작 가는 구석은 별로 없었지만 대놓고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브의 성인식이 다가올수록 태도가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마뜩잖은 얼굴로 편지를 펼쳤다.
성인이 된 에스텔라 영애를 황궁 연회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번 연회가 영애에게 좋은 데뷔탕트 무대가 되길 희망합니다.
누가 봐도 황태자는 배려심이 넘쳐 보일 것이다.
‘그래, 허울은 좋네.’
데뷔탕트에 참가하면 예의상 황태자한테 인사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듣는 얘기는 뻔했다.
‘우리 에스텔라 영애에겐 다른 좋은 짝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대충 이런 뉘앙스로 젠틀한 목소리와 흠잡을 데 없는 우아한 태도로 말하겠지.
‘꺼지라 그래.’
이브는 코웃음을 치며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성인식을 치를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제 가요, 어머니.”
그렇게 이브가 회랑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외부 사람들은 참석할 수 없는 자리인 이유로 모두 친인들뿐이었다.
“이제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브가 도착한 걸 본 에스텔라 백작이 단상에서 선 채 입을 열었다.
에스텔라에서 치르는 성인식의 의식은 단순했다.
성인식을 치르는 주인공이 달의 아티팩트이자, 빛의 마도구인 ‘라디아’를 직접 사용하여 어두워진 회랑을 환하게 밝히는 것.
다른 가문에 비하면 조금 남다른 성인식 절차긴 했다.
이브는 아버지의 눈짓에 따라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섰다.
단상 위 유리관 안에 들어 있는 목걸이를 본 이브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름다워…….”
이토록 영롱한 빛을 내는 목걸이는 처음 보았다.
황홀한 오색의 빛을 띤 보석이 중앙에 있는 단순한 디자인의 목걸이였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거라 그런가?’
특히 원으로 뚫린 천장 아래 달빛을 받은 탓에 더욱 요요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이걸 만지라는 거지?’
인간에겐 조금씩 마력이 흐르는데, 그 마력을 사용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막상 위험한 느낌이 들어서 만지고 싶은 마음이 선뜻 들지 않았다.
“이브, 어서 목걸이로 회랑을 밝히거라.”
평소처럼 다정함이 묻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안심한 이브는 목걸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
그녀의 손이 목걸이에 닿자마자, 보석 중앙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회랑을 잠식했다.
“윽!”
다들 눈이 부셔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지만, 무슨 일인지 이브는 그 빛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이게 바로 후계자의 힘인가…….”
언뜻 그런 말소리도 들린 것 같았지만, 워낙 멀리 있어서 이브의 귀에까진 닿지 못했다.
“잠깐만요, 목걸이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이브는 손을 떼려다가, 아직 손을 떼라고 말하지 않는 아버지를 상기하고 황급히 말했다.
“언제까지 쥐고 있어야 해요?!”
“이브, 진정하고. 그게 뜨거운 보석이 아닌, 차가운 보석이라고 생각해 보거라.”
백작의 목소리에 채 가시지 않는 묘한 흥분과 열기가 있었다.
이상한 아버지의 말에 이브는 당황했지만, 목걸이를 놓지는 않았다.
오라비인 노아도 해낸 일을 그녀가 해내지 못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보석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아무리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라지만 평범한 사람은 마정석이 가진 고유의 속성을 바꿀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 할 수 있다. 이브 에스텔라.”
주춤거리는 딸의 기색을 눈치챈 백작이 그녀를 다독였다.
이브는 반신반의했지만, 이대로 목걸이를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 손에 있는 건 차가운 보석이다, 차가운 보석.’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말대로 그녀의 손에 있는 보석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브는 이게 바로 믿음의 효과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진짜로 차갑게 느껴지는 보석에 당황했다.
“……보석이 차가워졌어요.”
어쩐지 보석의 색도 조금 푸르스름하게 바뀌어 있는 것 같고?
이브는 당황한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그녀를 보는 흐뭇한 아버지의 시선에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얘기잖아요. 제 착각이죠?”
불현듯 이브는 예전에 읽었던 금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마법사는 마정석을 이용해 다양한 마법을 펼칠 수 있다.’
그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물었다.
“아버지, 제가…… 마법사예요?”
백작의 자안이 빛나는 달빛 아래서 요요한 빛을 머금었다. 인간의 눈동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빛이었다.
“이 빛의 마도구는 사실 달이 아니라 태양의 마도구란다.”
그가 라디아를 잡은 이브의 손을 맞잡으며 감격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마법사란다. 태양의 마정석따위는 쉽게 바꿔버릴 수 있는!”
그녀 눈에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브는 제 앞에 떨어진 날벼락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가…… 마법사?
‘이번 생은…… 망했어.’
마법사들은 100년 전의 악마 소환 사건으로 제국의 척결 대상 1호였다.
아득해지는 그녀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발레리안 루드비히.’
그녀의 약혼자이자, 마법사를 척결하는 데 가장 앞장설 성기사.
그리고 원작의 남자 주인공…….
그렇다. 그녀는 훗날 그 남자 주인공에게 처단당하는 악당이었던 것이다.
‘그걸 성인식 날 알게 된 거고.’
환장할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