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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온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도 저택을 떠났다.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리샤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마지막으로 봤던 날, 이졸데가 제게 했던 말들이었다.

그가 당연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한 말에 리샤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언가 목구멍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일그러지던 얼굴을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졸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일은 리샤르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그녀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건 일찍이 알아차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졸데가 형제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일인 줄 알았다. 그들을 안 지 얼마나 됐다고, 호감을 착각한 게 분명하니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 결혼에 사랑은 필요하지 않았고 설령 그녀의 감정이 여전하다 한들 그의 몫은 아니라고 여겼다. 지금껏 그가 살아왔던 인생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이 말해 주듯.

리카온이 떠나고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는 이졸데의 행동은 리샤르의 의심에 확신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졸데가 이혼해 달라는 말을 꺼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리카온이라고 생각했다.

리카온이 떠났으니 이혼하고 그의 뒤를 따라가기라도 하려는 계획이 아닐까 했던 예상은 뒤따른 그녀의 말과 행동에 박살 났다.

이졸데의 말은 꼭 저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리카온이 아니라, 리샤르 에르퀼을.

그가 확신을 얻지 못한 의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야멸차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레니티 백작가로 돌아간 이졸데는 몇 주가 지나도록 저택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리카온을 따라갈지도 모른다던 추측마저 처참하게 무너진 셈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도 리샤르는 이졸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한 번도 그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리샤르 에르퀼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리샤르는 이졸데가 내뱉은 몇 가지 말과 그동안의 행동들로 추측을 해야 했을 뿐이었다. 그의 안에 자리한 뿌리 깊은 불신이 그녀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리샤르가 믿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요한 호수 표면에 파문을 일으키듯 그녀가 던진 말들이 그를 울렁이게 했다. 제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었던 리샤르는 바쁜 하루의 중간중간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를 먹어도 어쩐지 속이 텅 빈 것 같은 공허가 하루 종일 뒤를 따라다녔다. 저택은 평소보다 더 커 보였고 정원은 어쩐지 황량하게 느껴졌다.

캄캄한 꿈속에서 어린아이가 된 그가 외로움에 몸을 떨며 울어도 깨워 주는 사람도, 눈물을 닦아 주고 끌어안아 주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 남은 밤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리!’

복도를 걷던 그는 문득 뒤에서 저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지나온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햇빛에 비산하는 먼지만 고요히 부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리샤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졸데가 없는 저택은 허전했다. 그녀가 걷지 않는 정원은 생기를 잃었고, 곁을 지키던 온기가 사라진 밤은 두렵기만 했다.

그는 이졸데가 그리웠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었다.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괴롭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마구 흔들렸다.

그저 건드리는 대로 반응을 보이는 게 즐거웠을 뿐인데. 구김 없이 밝은 모습을 보면 괴롭혀 울려 보고 싶기도 했다. 울먹이는 얼굴도 웃는 얼굴만큼이나 사랑스러울지 궁금했지만 정작 그녀가 애써 울음을 참는 모습에 가슴이 쓰라렸다.

“이졸데….”

분명 가볍게 건드려 보려던 마음이 언제 이렇게 깊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손끝만 담그려 했던 호수에 실수로 빠져 버린 것처럼 흠뻑 젖고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짬이 날 때마다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동그란 정수리에 수없이 입 맞추지 말았어야 했다. 대화하고, 함께 웃고, 귀엽다고도 여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늦은 밤, 악몽에서 깬 그를 끌어안아 주는 품 안에서 안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후회할 일도 없이 처음의 생각처럼 별거 아닌 일로 여길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잃고 나서야 깨닫고 후회하는 자들을 세상에 다시없을 멍청이라고 생각하며 비웃었건만 이제 보니 그게 제 이야기였다. 리샤르 에르퀼은 세상에 다시없을 멍청이였다.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함께 지낸 시간은 고작 몇 달일 뿐인데, 기차를 타고도 수 시간은 가야 할 만큼 멀리 떠난 리카온보다 고작 마차를 타고 가면 몇십 분쯤 걸릴 거리에 있을 여자가 더 멀게 느껴졌다.

차라리 깨닫지 말 것을, 부정적인 감정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에는 익숙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가슴을 꽉 틀어막는 답답함을 예사 것이라 여기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깨달음을 뒤따라온 후회는 끝이 없었다.

그는 그저 외롭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떠나 버린 아내가 그리웠으며, 이제는 사실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을 경험해 본 건 딱 한 번뿐이었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그때의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는 달랐다.

심장이 곧 멈춰 버릴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그는 강렬한 통증에 신음하며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휘청이다 간신히 벽을 짚었다.

늦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어리석게 놓쳤다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하지만 체념하고 잊어버리자고 하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숨이 막혔다.

지금이라도 이졸데에게 달려가 아직도, 그런 일들을 겪고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새었다.

벌써 그에 대한 마음을 털어 버렸거나 나아가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진저리가 날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 리샤르는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어 본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이졸데와의 관계에 있어서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지는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등을 돌리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쉼 없이 스스로를 속여 넘겨야 했다.

이미 빠져 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은 사람은 그를 상처 입힐 수 없었지만 사랑했던 사람이 남긴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 아물지 않는다. 그는 이미 상처투성이였고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뿌리 깊은 불신은 그녀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으나 그 자신의 사랑은 달랐다.

이혼이라. 내내 어딘가 잠겨 있던 것 같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붙잡아야 했다. 그가 어디에서 또 이런 사랑을 받아 보겠는가? 세상에서 그의 존재를 지워 버린 부모에게? 그의 곁에 있는 내내 하루하루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던 리카온에게?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리카온과 리샤르 사이에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거라면, 그게 나라고 쉼 없이 속삭여서라도 제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버림받기 싫다면, 버리지 못하게 만들면 될 일이 아닌가?

리샤르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졸데를 붙잡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를 다졌다. 무릎을 꿇고 사랑을 구걸하거나 용서를 비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녀의 동정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과하게 포장해 볼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이미 부부였고 누구라도 인정할 법한 한쪽의 과실이 증명되거나, 양측이 합의하지 않으면 이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가 제게 미안해야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듯 말했던 게 아니겠는가?

순순히 합의하라는 뜻이었겠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리샤르에게 그녀와 이혼하고픈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졸데는 결코 그와 이혼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함께 살고, 죽어서도 그의 곁에 묻히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제법 마음이 흡족했다. 이렇게라도 서로를 묶어 놓을 수 있는 끈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리샤르가 제 마음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는 사이에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그는 마침내 세레니티 저택에 있을 아내에게 이혼 합의서 대신 보낼 편지를 썼다. 배우자와 함께 참석해야 하는 파티 초대장과 작은 메모 그리고 튤립 꽃다발을 한 아름 보냈다.

메모에는 그녀가 기다렸을지도 모를 사과 대신 우리는 아직 부부이니 아내로서의 의무를 하라는 말을 적었을 뿐이었다.

배우자와 함께 참석할 것을 권하는 파티에 홀로 나타난다는 것은 부부간의 불화를 의미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었지만, 이졸데가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린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못했다.

약속했던 날, 마차에 올라 세레니티 저택으로 향하면서도 리샤르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혼하자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생각이었으니까.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이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슬슬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한 대로를 달리던 마차가 세레니티 백작가의 대문을 넘어 이윽고 저택의 입구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양을 본 저택의 사용인이 그의 방문을 알리러 달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제법 여유롭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코앞에 그녀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문득 이졸데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리샤르는 마차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졸데는?”

그는 급하게 달려오는 버틀러를 보며 마치 제집인 양 물었다.

“아, 아가씨께서는… 방에.”

인사를 먼저 해야 할지,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버틀러가 대답을 골랐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했던 리샤르는 인사 따위나 받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카펫이 깔린 홀을 가로지른 그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이졸데의 방으로 향했다.

더 이상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듯 쌩하게 걸어가는 그의 기세가 얼마나 거세던지, 뒤늦게 그의 방문 소식을 듣고 내려온 세레니티 백작마저도 멈칫했다.

그 사이에 리샤르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지나쳤다. 무례한 태도란 걸 스스로도 빤히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려던 리샤르는 간신히 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들어오라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열어젖힌 문 안쪽에서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이졸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옆에 있던 하녀가 서둘러 물러나는 것을 보며 리샤르는 안으로 들어섰다.

말을 전하러 온 하녀에게 그가 왔다는 이야기를 분명 전해 들었을 텐데 이졸데에게서는 방을 나서려던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드레스를 입고 머리 손질과 화장을 끝낸 상태인데도 그랬다.

책상 위에 펼쳐진 채 놓여 있는 초대장이 리샤르가 들이닥치기 직전까지도 그녀가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리샤르는 무작정 밀고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밖의 마차 안에서 한없이 기다리다가 거절당하기나 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들어오라고 했어요?”

화를 내는 얼굴도 기꺼웠다. 그에게 화를 낸다는 건 차라리 좋은 신호였다. 적어도 어떤 감정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들어오라고 했을 겁니까?”

리샤르는 버릇처럼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이졸데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이런 말투를 싫어했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는지 궁금한데.”

리샤르는 그녀의 목덜미로 흘러내린 금발 몇 가닥을 노려보며 물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매만지는 이졸데의 손길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나는… 아직, 결정하지….”

“준비도 다 끝난 모양이니 가죠.”

그는 못 들은 척 슬며시 그녀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좀 더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졸데는 의외로 순순히 그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평소처럼 그에게 한마디라도 더 걸어 보려고 안달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에게 평소다운 모습을 기대하지 않았다.

마차가 멈춰 서고,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파티 홀로 들어설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졸데는 어떤지 몰라도 그는 정말 드물게 어떤 말을 꺼내야 좋을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정한 말로 어르고 달래고 싶기도 했고, 기어코 눈물을 쏙 빼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리샤르는 괜스레 손끝이 저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에게 팔짱을 껴야 할지 말지 고민 중인지 움찔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졸데의 손은 약간 서늘했고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무거워 보일 만큼.

리샤르는 그녀가 아파하지 않을 만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를 흘끔 올려다보는 시선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런 파티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이라도 이졸데를 달랑 안아 들고 어디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버리고 싶었다.

파티장에 도착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달짝지근한 로제 와인을 마시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척하면서도 리샤르의 신경은 오로지 그의 팔을 살며시 잡은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눈치 빠르게도 그걸 알아차린 몇몇 귀부인들이 못 말린다는 듯 웃음 지었지만 리샤르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도 이졸데는 입이 달라붙기라도 했는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리샤르가 건네준 잔 속의 와인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리샤르의 마음속에 전보다 더 짙은 불안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하필 후작이 그를 불렀던 탓에 이졸데를 두고 자리를 비워야 했던 건 불안을 부채질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커튼 근처를 서성이던 이졸데가 잔을 들어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던 리샤르는 간신히 후작과의 대화로 관심을 돌렸다. 그가 몇 번이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되묻자 후작이 껄껄 웃었다.

“아내를 혼자 두는 게 그렇게 신경 쓰이나?”

“아… 각하, 그런 게….”

“변명할 필요 없네. 가 보게.”

손을 내젓는 후작의 얼굴에 불쾌함은 없었다. 그는 이제야 자네가 제 나이로 보인다며 껄껄 웃었다. 리샤르는 머쓱함에 모른 척 인사하고 돌아섰다. 남들도 단번에 알아보는 감정을 저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셈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졸데가 서 있던 자리를 훑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얌전히 있을 것만 같던 아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리샤르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방황하며 아내를 찾았다. 다행히 그는 오래 지나지 않아 이졸데의 틀어 올린 머리를 장식했던 푸른 꽃을 발견했다. 커다란 기둥 뒤에 반쯤 가려졌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하던 그녀가 당황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리샤르의 걸음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냉큼 이졸데의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그녀를 물러서게 만들었던 상대를 확인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남자였다. 그것도 기사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새파란 애송이였다.

“이런, 내가 대화를 방해했습니까?”

전혀 몰랐다는 것처럼 놀란 티를 내자 이졸데가 당황을 수습하고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얘기 끝났어요, …여보.”

그녀는 상대가 들으란 듯이 그와의 관계를 알릴 호칭을 덧붙였다. 리샤르의 어깨를 살며시 짚으며 보여 주는 결혼반지는 덤이었다. 하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녀에게 수작을 걸어 보려던 차에 바로 남편이 나타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았는지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이졸데는 못 들은 체했고, 리샤르도 굳이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수치로 붉어진 얼굴로 빠르게 물러났고, 리샤르는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천천히 그녀를 기둥 밖으로 이끌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로 이졸데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이혼하자고 했는지 알겠습니다. 저 남자 때문입니까?”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 생트집을 잡았다. 아니, 강렬하게 밀려오는 불안에 가까웠다. 기어코 그녀가 격렬하게 부정하는 말을 입 밖에 내어놓게 만들고 싶었다.

“…방금 그 사람 말인가요? 정말이지 터무니없군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한껏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분노가 모두 가려지지는 않았다.

“그자가 내 이름조차 모르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슬슬 돌아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괜찮지만, 우리가 별거 중인 게 알려지면 저런 벌레들이 더 달려들 것 같군요.”

“내 말 듣긴 했어요?”

이졸데의 입에서 기어코 한숨이 튀어나왔다. 리샤르는 순순히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돌아와요.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덧붙인 말에 동요했는지 그녀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하지만 이윽고 평정을 되찾은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왜요? 번거롭게. 우린 곧 이혼할 거니까 상관없잖아요.”

“내가 이혼해 주겠다고 했습니까?”

리샤르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혼해 달라던 이졸데의 말에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적 없었다. 미안해야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저 그녀에게 하면 안 될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나요?”

“…물론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이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정말 의문이라는 듯 이졸데의 눈을 바라보았다. 봄에 피어난 새순 같은 초록빛 눈이 혼란스러운 듯 마구 흔들렸다.

리샤르는 그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살갗이 닿을 때마다 이졸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자꾸만 깨물어 붉게 물든 입술이 열렸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도 않잖아요.”

리샤르는 툭 건들면 그녀가 울어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까지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는 부부는 차고 넘친다는 말을 지껄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그딴 말을 꺼내는 순간 아내의 마음은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다.

리샤르는 잠시 대답을 미루며 태연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악단은 여전히 춤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밤이 깊어 가며 분위기 역시 무르익었다.

사람은 여전히 많았고, 이런 곳에서 이졸데가 눈물을 보이기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어떤 소문이 퍼져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디에나 시선은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은근슬쩍 파티장을 떠나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방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졸데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빠르게 준비된 마차에 이졸데를 태우고 뒤따라 올라탔다. 마부에게 에르퀼 저택으로 가라고 말하자 이졸데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내리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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