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10/13)

09

이졸데는 차를 마시기 위해 내려간 응접실에서 태연한 낯으로 차를 마시는 두 남자를 마주쳤다. 남편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그녀가 모르고 있던 충격적인 비밀을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구분하지 못하는 게 당연할 만큼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리카온이 리샤르보다 좀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분위기도 달랐다. 리카온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인다면 리샤르는 좀 더 유해 보였다. 겪어 본 바 보이는 그대로의 성격은 아닌 것 같았지만.

문제는 이졸데가 오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그녀를 만나러 왔던 남자를 다시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결혼한 이래로 그 감정이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는 현실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겁니까?”

리샤르는 그녀가 두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말투를 보니 리샤르였다. 이졸데는 능숙하게 동요를 감추고 자리에 앉았다. 하녀들이 차를 내어 왔다.

그녀는 찻잔에 각설탕을 두 개 넣고 저었다. 다홍빛 찻물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이졸데는 달짝지근한 차를 마시며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무시할 생각입니까?”

이졸데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반이나 남았지만, 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쫓기듯 자리를 떴다. 피하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지만 아직은 멀쩡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마주할 수 없었다.

조용히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기에 집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평정을 유지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형제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아무리 저택 안을 싸돌아다녀도 두 남자를 동시에 마주치는 일이 없었는데 들키고 나서는 그녀의 머릿속에 남편이 둘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박아 넣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어도 집 안에서 피해 다니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둘이면 더 어려웠다. 그녀는 결국 하지도 않던 약속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대체 엘레나는 왜 부른 거야?”

“넌 나한테 매번 왜 그러니?”

이졸데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에 큰언니 일라이자와 함께 차를 마시려 했던 약속에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난입한 탓이었다.

엘레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일라이자를 향해 불평했지만 일라이자는 곤란한 낯으로 웃을 뿐이었다. 입이 무겁고 사려 깊은 일라이자에게 그녀가 최근 맞닥뜨리게 된 상황에 대한 상담을 하려던 이졸데의 계획은 모두 어그러져 버렸다.

비밀이 중요한 이야기는 엘레나 앞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꼭 비밀을 지키겠다며 약속에 약속을 거듭해도 그 비밀을 털어놓은 상대를 마구 놀려 먹다가 실수로 발설하기 일쑤였다.

점잖고 기품 있는 일라이자와 딱 한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기왕 만날 거 세 자매가 모두 만나면 더 좋지 않겠니.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일라이자가 이졸데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지만 결국 엘레나를 보내겠다는 말만큼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가라고 해도 순순히 나갈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저택의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찻잔이 채워지고 달콤한 향기를 흘려 내는 디저트들이 준비되었다. 본래 그녀라면 버터와 설탕 덩어리인 디저트에 될 수 있으면 손을 대지 않으려 애썼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졸데는 설탕 시럽을 코팅해 반짝반짝 빛나는 딸기가 다소곳이 올라앉은 케이크 접시를 냉큼 끌어당겼다.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푹푹 떠먹는 모습을 보며 일라이자와 엘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졸데, 너 무슨 일 있니?”

“없어.”

그녀가 안 하던 짓을 하면 가장 먼저 눈치챌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뭔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지만, 이졸데는 엘레나가 있는 자리에서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 없었다.

이졸데는 언니들의 대화에 한마디도 얹지 않은 채 과자를 먹고 차를 마셨다. 배가 빵빵해졌고 더는 단것을 입에 대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무렵,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있어?”

“너 이혼하고 싶어!?”

대번에 엘레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반응만 봐서는 당장 이졸데가 이혼하겠다는 선언이라도 한 것 같았다. 엘레나라서 그런지 짜증부터 났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왜 그렇게 들어?”

이졸데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민망한 듯 엘레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노려보는 이졸데의 시선을 보고 고개를 팩 돌렸다. 뭘 잘했다고 토라진 체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저렇게 기분 상했다는 티를 낼 바에는 아예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좋으련만.

애초에 자매라고는 해도 엘레나와 이졸데가 붙어 있는 자리라면 도무지 화기애애할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엘레나는 이졸데가 하는 말은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놀리기 일쑤였고 제 딴에는 막내에 대한 애정 표현을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르나 이졸데로서는 둘째 언니를 지긋지긋하다 느끼게 되었을 뿐이었다.

이졸데는 그녀를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엘레나는 그런 동생의 태도에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섭섭해하면 할수록 이졸데는 더 화가 났으니 악순환이었다.

그 사이에 낀 일라이자로서는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을 테니 두 사람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정말 잘못했다며 그동안의 일들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한 이졸데는 그녀와 사이좋게 지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요즘도 고작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언제까지 꽁해 있을 거냐는 말이나 하는데.

“나는 갈래. 둘이 놀든가 해.”

이졸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좋지 못한 기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기는 싫었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그녀의 뒤로 뛰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쫓아온 일라이자가 이졸데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이졸데.”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이졸데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며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네가 하고 싶다면 해. 우리 가족은 언제나 네 편이잖니.”

‘우리 막내.’ 그리 속삭이며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따뜻하기만 했다. 귀신같이 그녀가 원하던 말을 해 주는 일라이자의 얼굴에는 따스한 애정이 스며 있었다. 이졸데는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간신히 미소 지었다.

집에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조금 전, 일라이자의 응접실에서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이혼이라. 엘레나의 호들갑처럼 정말로 이졸데가 이혼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장 제정신인 사람이 가질 선택지인 것 같았을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는 해도 똑같이 생긴 쌍둥이 형제 모두를 남편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니 멀쩡한 축에 속하는 그녀의 윤리관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엘레나가 그렇게 기절초풍할 듯이 놀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귀족들에게 이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이유가 필요했고 양측의 합의가 없다면 재판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은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웠다.

배심원들이 지켜볼 법정에 서서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녀가 결혼하고 보니 남편이 쌍둥이였고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제 남편 행세를 했다고?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남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너덜너덜해질 그녀의 명예와 함께 묶여서 곤두박질칠 가문의 이름을 생각하면 어느 것이든 제멋대로 밝힐 만한 사실이 아니었다.

차라리 애초에 백작 부인이 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편이 더 조용히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쌍둥이를 불길하다고 여기는 인식은 쌍둥이를 낳다가 죽어 나가는 여자가 유독 많았기 때문에 생겨난 선입견이었고 예전만큼 끔찍하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환영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혼담부터 뚝 끊겼겠지.

밝히지 못한 것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한 번 그렇게 공표한 사실을 뒤늦게 번복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이제 와서 바로잡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적어도 알려진 후 손가락질을 당하지는 않을 테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올라가 쉬려던 이졸데는 충동적으로 걸음을 돌렸다. 지나가는 하녀를 붙잡고 남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라면 더 쉬웠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집무실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집무실의 커다란 마호가니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숨을 죽이고 가까이 다가간 이졸데는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기차를 타면 좋겠지만 이목을 끌기 쉬워. 어디서 에르퀼 백작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고, 그렇다고 얼굴을 꽁꽁 싸매면 그거 나름대로 이목을 끄니까.”

“이동이야 말을 타고 해도 되지만 짐은 화물로 부쳐도 되잖아.”

“그렇지. 꼭 필요한 것만 챙겨. 나머지는 다 영지에서 구할 수 있을 거야. 구하지 못하면 나한테 연락해.”

본의 아니게 엿듣는 꼴이 되었지만, 그대로 돌아서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꼭 누군가 떠나는 것 같지 않나, 그리 생각하던 참에 말소리가 이어졌다.

“나흘 뒤에 출발할까 하는데.”

“그렇게 이르게?”

“질질 끌 필요는 없지.”

형제를 구분하지도 못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이제 이졸데는 말투만으로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떠나는 사람이 리카온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내밀며 문을 밀었다. 문이 안쪽으로 열리고 대화하던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어딜 가는데요?”

“…엿듣는 건 나쁜 습관입니다.”

“문을 열어 놓지 말았어야죠.”

이졸데는 뻔뻔하게 쏘아붙였다.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날을 세우는 일은 그녀답지도 않았고 피곤한 일이었지만 마음이 상한 탓인지 자꾸만 날카로워졌다.

그녀를 업신여기는 것 같다고 여겨지는 상대를 다정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이었다.

“리카온, 당신 어딜 가느냐고요.”

“그는… 자크시즈 코르네유라는 이름으로 새 인생을 시작할 겁니다.”

리카온 대신 리샤르가 대답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손끝으로 펜을 굴리던 남자는 시종일관 침착했고 그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피지 위로 잉크가 뚝뚝 떨어졌다. 이미 그들 사이에 오갔던 적이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이졸데는 코웃음을 쳤다.

“나더러는 남편이 둘이라는 둥, 헛소리를 하더니.”

“다행 아닙니까? 남편이 둘이라는 사실을 끔찍하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언제부터 이럴 생각이었는데요!?”

논점을 자꾸만 벗어나려는 말에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가 불쾌감을 느끼는 부분이 어디인지 진정 모르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모른 척하려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런 상황에서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리는 리샤르 특유의 말버릇이 이졸데를 화나게 했다.

“결혼식 날부터입니다.”

리샤르 대신 리카온이 대답했다. 맥이 탁 풀렸다.

“…그때부터 이럴 작정이었으면 차라리 내가 계속 모르게 잘 숨기지 그랬어요?”

불같이 화르륵 타올랐던 화가 갑작스럽게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꺼졌다. 정원에서 화를 내던 그녀를 붙잡고 남편이 둘인 게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며 주절거리던 리샤르의 말도 모두 그녀를 놀리는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무겁도록 그녀의 정신을 짓눌렀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이런 복잡한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 리카온이 떠나더라도 알아채지도 못한 채 짝사랑하던 남편과의 신혼 생활을 마음 편히 보냈을 것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다가도 형제가 저를 기만하는 것도 모르고 웃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피가 식는 것 같기도 했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녀는 마른세수를 하는 척 얼굴을 가리고 방을 나왔다.

***

이혼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리고도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갈팡질팡했던 생각이 이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사실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현실을 외면했던 것들도 우스운 꼴이 되었다.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했다.

혼자서 침잠하는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누구의 말에 더 상처받았는지 깨닫는 건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형제 중 누구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명확한 해답이 나왔어도 속 시원하기는커녕 서글퍼지기만 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과 달리 그 속내만큼은 누구보다도 냉소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마냥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게 낫다고 여겨질 지경이었다. 바로 곁에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는 건 실연보다도 지독했다.

그래도 그녀가 진실을 마주하기 전에는 짓궂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다정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변해 버린 걸까? 아니면 변한 게 아니라 그게 그 남자의 원래 모습인 걸까?

이졸데가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 리카온은 짐을 꾸려 저택을 떠났다. 그녀는 배웅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배웅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럴 만한 사이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나가 봤자 리샤르를 마주치면 속 뒤집는 소리나 듣겠지.

이제 저택에 에르퀼이란 성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만 남았다. 아니, 그녀까지 포함하면 두 사람이었다. 정상적인 숫자였다. 보통 사람처럼 남편이 한 명이 되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냥 살아야 하는 걸까?

그녀는 솔기가 다 해진 손수건을 버릇처럼 매만지며 깊은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러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리샤르의 웃고 있지만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그녀가 상처받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내뱉은 말들을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언제나 술로 도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약하기 짝이 없다고 비웃었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술은 아주 좋은 도피처였다. 그녀가 취해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이졸데는 울었고 소리를 질렀으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리샤르가 매일같이 보내오는 튤립이 한가득 꽂혀 있던 유리병이 깨지는 걸 봐도 속이 개운해지지 않았다. 바닥에 유리 조각과 꺾인 튤립 그리고 물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왜 지금도 매일같이 꽃을 보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했던 꽃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내게 아무 감정도 없으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그의 모든 것들이 싫었다. 아니, 싫어하고 싶었다.

잠깐 이러다 말아야지. 술에 대한 다짐인지 사랑에 대한 다짐인지 정할 수 없었다.

빈 와인병의 잘록한 목을 의미 없이 손끝으로 덧그리던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졌다. 술은 자꾸만 이졸데를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화가 났고 충동적으로 병을 집어 던졌다.

당연히 들어온 사람을 맞히려고 한 건 아니었다. 적당히 바닥의 카펫 위로 구르도록 던질 생각이었지만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취한 그녀가 몸을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과 달리 날아간 병이 문 옆의 벽에 부딪혀 박살 났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리샤르였다. 부서진 유리 파편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그의 왼쪽 뺨 위로 길게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이졸데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 그의 얼굴을 붙잡고 상처를 살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리샤르에게 화가 나 있었고 그에게 난 상처가 너무도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는 한편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말로도 상처 줄 수 없다는 건 이졸데에게 다시 상처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이졸데는 그녀가 겪는 것만큼의 고통을 그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만큼 아팠을 그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겨 주기를 바라는 비참하고도 저열한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이졸데, 술을 마시는 건 좋지만, 술만 마시는 건 안 됩니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왔어요?”

이졸데는 헛웃음을 지었다. 리샤르는 제 몸에 난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 말을 하러 온 것뿐이라는 듯이. 뺨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턱까지 궤적을 그렸지만 남자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녀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라도 제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는 서러워 울었다. 실컷 짜증을 내는 듯하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리샤르는 복잡한 얼굴을 했지만 이졸데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식사는 거의 거른다고 들었고… 잠은 자고 있습니까?”

“무슨, 무슨 상관이에요!”

헐떡이며 쏘아붙인 그녀는 그를 노려보기 위해 애썼지만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지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걸음을 옮긴 남자가 그녀가 웅크리고 있는 소파 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알았지만 이졸데는 세운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을 뿐이었다. 이렇게나 울어 본 건 그가, 아니 리카온이 그인 줄 알았을 때 전쟁터에서 죽는 꿈을 꾸었던 날 이래로 처음이었다.

“나가요.”

“내가 나가면 식사할 겁니까?”

이졸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깟 끼니 좀 거른 것 가지고 왜 유난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밥을 먹든지 굶든지 쥐뿔도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남은 상처가 속상하기도 했고 비틀린 쾌감을 느끼게도 했다. 이졸데는 손을 뻗었다. 엄지손가락으로 길게 남은 상처를 짓누르자 그제야 리샤르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아픈가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남자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아프다니 기뻐요.”

악에 받친 목소리를 듣고도 남자는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제 피가 묻은 그녀의 엄지손가락을 핥아서 핏자국을 지워 낸 그가 어린애 투정을 대하듯 가볍게 이졸데의 뺨을 꼬집었다.

“식사해요.”

그가 나가고 미리 준비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방으로 음식이 들어왔다. 이졸데는 이번에는 군말 없이 식사를 했다. 잠은 잘 오지 않았지만 잠들려 노력했고, 술을 마시는 것도 그만두었다. 리샤르의 말을 들으려 노력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짧은 일탈이 끝난 셈이었다.

‘내가 그 곁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그리 생각했던 이졸데는 그의 곁에 있는 게 ‘버티기’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같이 지내다 보면 언젠가 정이 들거나, 종내에는 리샤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되뇌던 낙관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이졸데는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았다. 맵시 있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줄도 몰랐다. 결단을 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음주를 그만둔 이후로 리샤르가 찾아오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자신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게 감정의 방아쇠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했는지, 그가 찾아오지 않는 건 배려에 가까운 일이었다. 덕분에 혼란은 사그라들었고 조용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늦은 오후, 이졸데는 해가 기울어 뾰족한 첨탑 위에 걸리는 걸 지켜보다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티끌만 한 용기라도 생겼을 때 해치워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차올랐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제 발로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걸음에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항상 이 시간쯤이면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 업무를 해치우느라 바쁜 리샤르를 찾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커다란 마호가니 문 앞에서 멈춰 섰다. 한참이나 달음박질을 친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댔다.

노크를 하기 위해 들어 올린 하얀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멈춰 보려 주먹을 꽉 쥐었다 펴도 잦아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돌아가기는 싫었다. 이졸데는 마른침을 삼키고 문을 두드렸다.

숨을 죽이자 두꺼운 문 건너편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인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한세월은 지난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속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황동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가고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서서히 열리는 문 안으로 보이는 얼굴에 눈앞이 아뜩해지는 걸 보니 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야겠다며 며칠이나 흘려보냈던 시간들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안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리샤르가 잠깐이나마 얼이 나간 얼굴을 하는가 싶더니 금세 입꼬리를 올리며 다소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방에서 나오셨군. 리카온을 떠나보낸 슬픔은 잘 추슬렀습니까?”

속을 훌떡 뒤집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제 할 말만 쏟아 낸 다음에 돌아 나올 생각이었음에도 차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으며 그리 말하는 얼굴에 조금 전의 부자연스러운 미소는 사라진 후였다. 그녀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 남자는 도무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는 일이 없었다. 이졸데는 그의 헛소리에 대한 대답을 듣길 포기했다.

“이혼해 줘요.”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가당찮은 것을 요구하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리카온을 따라가기라도 할 생각입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리카온이 왜 나와요?”

참자고 생각한 게 방금이건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꾸만 흥분으로 가빠지려는 숨을 가라앉히듯 긴 숨을 내쉬었다. 물어 봤자 지금까지 그러했듯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겠지. 이졸데는 막 무언가 말하려는 그를 막듯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니, 됐어요. 듣고 싶지 않아요.”

집무실에는 그가 업무를 보는 커다란 책상과 혹여 손님이 찾아오면 앉을 수 있는 안락의자가 있었지만, 이졸데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앉는다는 건 말이 길어진다는 뜻이었고 그녀는 질질 끌 생각이 없었다.

“당신은 우습다고 하겠지만, 나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이졸데는 그동안 혼자서 생각했던 말들을 차근차근 꺼내 놓았다.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고, 모른 척 조금만 더 눈감고 싶은 마음을 다잡는 건 끔찍하도록 어려웠으나 그녀는 멀리 내다보기로 했다.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지도 알 수 없고 그녀 역시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저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노력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 덕분에, 그걸 ‘덕’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알았어요. 단지 내가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럼 아닌가요?”

그리 되묻는 목소리가 꼴사납게 떨렸다. 울먹이지 않기 위해 애쓴 보람이 있게 그 정도로 그쳤지만. 이졸데는 이미 어떤 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으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는 자신의 미련함을 비웃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감정이 남긴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이졸데가 발견한 건 감추지 못한 당황과 혼란뿐이었다. 침묵은 때론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대답이 되어 주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축축하게 젖어 오는 눈가를 감추려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예상했던 일이니 괜찮다고 되놰도 생각에서 그치던 것과 현실을 직접 마주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며 울컥 치솟는 감정도 함께 삼켜 내었다.

“이번 주 내로 나갈 거예요.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죠? …미안해야 할 거예요.”

이졸데는 리샤르의 앞에서 꼴사납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속사포처럼 말했다. 그가 뻔뻔하게도 미안하지 않다고 할까 봐 못 박듯이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리샤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읽어 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로부터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리샤르는 그녀를 불러 세우거나 붙잡지 않았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어 황금빛으로 빛나는 복도가 춥고 어둡게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