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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 늦게 잠든 이졸데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혼란한 마음 탓인지 잠을 잤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된통 몸살에 걸렸을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렸고 몸이 무거웠다.

침대에 앉은 채 시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멍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어제 있었던 일은 꿈이었던 게 아닌지 고민했었다.

남편이 사실은 쌍둥이였다니 길거리의 하잘것없는 연극에도 등장하지 않을 촌극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고 그 사실이 오늘만큼은 원망스러웠다.

그동안 어딘가 삐걱거린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야 맞아 들어갔다. 내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너무 다른 말투, 다른 행동…. 기분 문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달라서 의아했던 그 행동이 모두 정말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라니.

누군들 알 수 있었을까? 어느 누가 멀쩡히 결혼한 남편이 사실 쌍둥이였고, 그 형제가 번갈아 가며 남편 행세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는 말이었다.

이졸데는 평범하게 그가 꽤 변덕이 심한 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면 심각해 봤자 이중인격이거나, 혹은 바람을 피우고 있다거나.

갑자기 그가 숨겨 두었던 내연녀가 튀어나와 이졸데를 보고 그 자리는 내 것이라며 패악을 부리는 일 따위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된 게 정말 다행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난번 하녀가 무언가 이상하다며 횡설수설했던 말을 왜 그냥 흘려들었을까. 그건 어떤 전조였음이 분명하건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습니까? 또다시 나와 불장난을 칠 마음이 있습니까?”

어째서 남편과 몸을 섞는 일을 불장난이라고 부를까 의문스러웠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너무도 이상했다.

이졸데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제 그동안 겪어 왔던 남편의 모습 중 리카온과 리샤르를 조금쯤은 구분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성격이 그렇게 다른데도 그게 서로 다른 사람이라 그렇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늘어났다. 이졸데는 적어도 두 사람 모두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건 정말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고, 하필이면 그 상대가 남편이 아니라 그의 형제라는 사실은 다시 불행인 것 같았다.

“으….”

절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둘 다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말하던 남자들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들 알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그녀 외에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

자고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고민하면 어떠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요원해 보였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갔고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그녀가 잠에서 깼는지 확인하러 온 하녀임이 분명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더 생각을 이어 갔다가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속에 잠겨 익사해 버릴 것 같았던 참이었다.

“들어와.”

“레이디 에르퀼, 일어나셨군요.”

들어온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꽃병에 꽃을 갈고 창문을 열고 이졸데의 시중을 들었다. 창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축 가라앉아 있던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식사는 밖에서 할래.”

“네, 정원에 준비하겠습니다.”

늘 오던 하녀들 대신 어딘가 낯선 얼굴을 한 하녀들은 조금 더 노련하고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이졸데는 오히려 그편이 편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볼까 싶어 방을 나서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내 남편은?”

“서재에 계십니다.”

이졸데는 태연한 대답을 내뱉는 하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는지 하녀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분명히 낯선 얼굴이었다. 그녀가 친정에서 데려온 아이가 아니라 본래부터 에르퀼 백작가에서 일하던 아이이기 때문일 터였다.

이졸데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그녀의 남편이 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그녀뿐인지. 그게 아니면….

“둘 다?”

“…한 분은 연병장에 계십니다.”

보일 듯 말 듯 한 동요를 빠르게 감춘 하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졸데는 비뚤게 웃었다. 이 저택에서 그녀의 남편이 둘이라는 것을 몰랐던 건 그녀 자신과 그녀가 데려온 하녀들뿐인 모양이었다.

어제의 충격이 가시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은 분노였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작당을 해서 사람을 속여 먹을 수가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녀는 야멸차게 대답하고는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꼴도 보기 싫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이졸데는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제풀에 지쳐 화를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둘이 되어 버린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내내 화를 불태우기에는 기운이 따라 주지 않았을 뿐이지.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가제보(Gazebo)로 향한 이졸데는 자리에 불청객이 먼저 와 있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방만한 자세로 앉은 남자가 리카온인지 리샤르인지 한눈에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든 간에 꼴도 보기 싫다는 것만큼은 똑같았다. 이졸데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남자에게 팔을 붙잡혔다.

“왜, 내가 리카온이 아니라서 함께 식사하기가 싫습니까?”

그는 리샤르였던 모양이다. 허리를 휘감은 팔이 이졸데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의 품은 그녀의 몸을 온통 뒤덮고도 남았다.

굵은 나무뿌리처럼 단단한 그의 팔을 풀어내려 몸부림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리샤르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듯 읊조렸다.

“남편을 차별하면 안 되죠.”

탓하는 것치고는 웃음기가 담뿍 배어 있는 말은 놀리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애써 가라앉혔던 화가 다시 치솟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꿎게 허공에 대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거 놔!”

리샤르가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것이 무색하게 남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그녀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의자에 앉은 그가 이졸데를 무릎에 앉힌 채 움직이지 못하게 구속하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식사를 내어 왔다.

이졸데는 통하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몸부림치는 것을 그만두고 하녀들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그와 함께 식사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누가 그녀가 정원에 갔다고 리샤르에게 일러바쳤는지 모를 일이지만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하고 식사하죠. 아침도 거르고 배고플 텐데.”

이졸데는 그가 포크에 찍어 내미는 음식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삐친 어린아이를 달래듯 얼렀다.

“화도 기운이 있어야 내죠. 안 먹으면 누구 손해인지 생각해 봐요.”

그녀는 그가 내민 음식 대신 제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스스로도 제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서 더 초조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했고 그의 얼굴이 제게 미소 짓는 걸 보면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제 모습에 다시 화가 솟구쳤다. 감정이 이렇게 널을 뛰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걸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리샤르는 그를 외면하고 있는 옆모습에 쉼 없이 입을 맞추었다.

이졸데는 고개를 푹 숙였다. 화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슬픔이 남았다. 단 한 순간도 그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데. 서러움에 차오른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히다가 뚝뚝 떨어져 남자의 손등을 적셨다. 반복해서 씹던 입술에서 피 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졸데는 그가 깨물지 못하게 하는 입술 대신 그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제법 아프게 깨물었는데도 남자에게서 아파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손가락을 뱉어 냈다. 리샤르가 피가 배어나기 시작하는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당겼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자 리샤르가 가볍게 입 맞췄다.

떨어져 나간 그의 연한 분홍빛 입술 위로 그녀의 입술에서 샌 핏방울이 맺혔다.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피를 핥는 모습은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다. 남자의 눈이 이졸데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듯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 모르겠는데…. 아, 이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이채를 띠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문득 두려워졌다.

“당신…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졸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리샤르는 여전히 그녀의 반응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응시하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리카온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태도에서 그녀의 감정에 대한 존중이나 긍정적인 반응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재미난 것을 발견한 듯한 태도는 이졸데에게 큰 상처였다.

“누구를 사랑하는 겁니까? 말해 봐요.”

아직 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마당에 제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어지러웠고 리샤르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다시 한번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리샤르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을 종용하기만 했다. 이졸데가 말하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참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으면 설명을 해 봐요. 내가 구분해 줄 테니….”

“…당신은 아니에요.”

그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매몰차게 대답했다. 저의 감정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상대 앞에서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주체하지 못하고 줄줄 흘려 냈을 감정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모조리 주워 담고 싶었다. 이런 남자에게 쏟은 애정이 아까웠다.

“그러면 리카온을 사랑합니까? 당신이 리카온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요? 그에 대해 말해 봐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영락없이 비웃는 것으로 들렸다.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분했다. 이졸데는 전과 다른 사람인 것 같다고 느꼈을 만큼 확연한 차이를 보였던 성격을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꾹 깨물던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리카온은… 와, 와인보다는… 브랜디를….”

“음.”

리샤르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졸데는 조금이나마 밝아진 얼굴로 다시 꺼낼 말을 골랐다.

얼마 전에 그에게 시가 케이스를 선물했던 게 떠올랐다. 마차 안에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그 얼굴은 리카온의 것이 확실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시가를 피우는 것 같았어요.”

남자가 낭랑하게 웃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리샤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입가에 머문 진한 미소를 떠나보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리카온은 담배 안 피웁니다. 참, 시가 케이스는 전해 받았어요. 잘 쓸게요.”

그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건을 꺼냈다. 정확히, 이졸데가 남편에게 선물했던 그 물건이었다. 이게 리샤르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녀가 고심하고 선물했던 물건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 되었는지.

이졸데가 당황으로 물든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자 이미 그는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웃었다. 얼핏 패배감마저 들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마치 은밀한 비밀을 말해 주듯 속삭였다.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라고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당신 마음도 편하고 우리도 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인 윤리관을 가진 그녀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모습을 보며 이졸데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홀린 듯 따라붙던 시선을 애써 떼어 내고는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이졸데는 얼토당토않은 말에 대답하는 대신 물어야 할 다른 것을 기억해 냈다.

“…언제까지 속일 작정이었어요?”

“속이지 않았는데. 말을 좀 생략했을 뿐이지. 난 오히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식의 변명을 기대했으나 그는 여전히 가벼운 태도였다. 그녀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모조리 심심풀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졸데가 그들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도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실망감이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저를 노려보는 이졸데의 붉어진 눈가를 손끝으로 살살 매만지던 남자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한 게 놀랍습니다.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모양인데.”

길쭉한 손가락이 잠시도 그녀를 가만히 둘 수 없다는 듯 등 뒤로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감다가 놓아주고 말랑말랑한 귓불을 매만졌다. 귀찮다는 듯 손을 쳐 내도 소용없었다.

“정말로 몰랐습니까?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이 아니고?”

이졸데가 좀 더 화내기를 바라는 것처럼 쿡쿡 찔러 대는 그의 말을 무시하는 게 가장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에게 묻고 싶은 건 산더미만큼 있었고 굳이 따로 시간을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답을 듣기에는 리카온도 함께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지만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자면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왜 나예요? 당신들이 날 가지고 놀아도 멍청하게 그러려니 할 것 같았나요?”

“…잊었습니까? 당신이 결혼하자고 했잖아요.”

이졸데는 잠시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리샤르가 그녀의 콧잔등을 톡 두드렸다.

“나더러 왕자님이라고 했던 것도 잊었나?”

그제야 이졸데는 그가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리샤르는 그녀가 열 살도 되기 전에 겪었던 그들의 첫 만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 내리꽂혔다. 내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고민의 답이었다.

두 형제 중, 그가 바로 ‘왕자님’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버려지지 않았던 그녀의 첫사랑.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녀가 했던 터무니없는 말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졸데는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왕자님’의 다정한 모습이 리샤르가 가진 모습 중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일부분만을 보고 사랑에 빠진 일이 얼마나 우습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리샤르는 그녀에게 별다른 마음도 없을뿐더러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런 뻔뻔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졸데가 저를 미워하더라도 조금도 제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 그녀에게는 또다시 상처로 돌아왔다.

그를 사랑했던 나날들을 되돌아보기만 해도 리샤르와 제 감정의 차이를 쉬이 알 수 있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 별것 아닌 행동조차도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고 걱정했던 것은 모두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졸데는 철저하게 약자의 입장이었다. 제가 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나랑 결혼했다는 건가요?”

그녀는 약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떤 말이든 지껄여야 했다.

“뭐, 사실 그건 아닙니다. 우연이지. 아주 기막힌 우연.”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사과를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단단한 과육을 씹는 소리가 들렸고 과즙을 머금은 그의 입술이 촉촉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선을 떼기 어려울 만큼 그는 이졸데에게 절대적인 매력을 느끼게 했다.

힘들게 고개를 돌린 이졸데는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가기 위해 꿈지럭거렸지만 리샤르가 놓아주지 않았다.

“…내려갈래요.”

“안 됩니다.”

뭐 하나 뜻대로 하게 해 주는 게 없었다. 이졸데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고 남자의 손가락이 그러지 못하도록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식사하지 않았잖아요.”

같잖은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다시 식기를 들어 음식을 작게 썰어 이졸데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를 흘겨보던 이졸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벌렸다. 기어코 그녀가 식사하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먹겠다고 몇 번쯤 식기를 빼앗으려 했지만 리샤르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점심을 먹여 줄 생각인지 테이블 위의 음식을 골고루 집어다 날랐다. 그러면서 마치 세뇌라도 할 작정인 것처럼 다정하게 속삭여 대기 시작했다.

“뭐 어떻습니까? 당신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둘인 게 왜요? 우린 당신에게 충실할 거고 당신은 남들이 하나밖에 가지지 못하는 것을 둘이나 가진 셈인데.”

조금 전에 했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서 하는 뻔뻔한 얼굴은 정말 잘못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까? 그것도 아닐 텐데.”

리샤르가 다 안다는 듯 웃었다. 그가 말하는 결혼 생활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건 그저, 당신이 가진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가 후식으로 나온 판나코타를 일일이 떠먹이면서 쉴 새 없이 말했다.

이졸데는 그의 말을 모두 헛소리라 치부하며 무시하고 싶었지만 들을수록 저도 모르게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그렇게까지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라고 설득하거나 아주 사소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구는 리샤르의 태도 때문이다.

“어차피 아무도 당신이 형제와 붙어먹었다는 건 모릅니다. 그냥, 평소처럼 함께 지내요.”

얌전히 그의 말을 듣던 그녀는 도무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을 지적했다.

“…형제 모두와 붙어먹지는 않았잖아요.”

“이런, 놀라워라. 잘 기억하고 있군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때려 주고 싶었다. 이졸데는 요 며칠간 있었던 꿈같이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나누고 긴 밤을 열정으로 물들였던 순간들. 잠들기 전이면 내일이 기다려지던 그 순간을.

그녀는 지나치게 짓씹어 건드릴 때마다 알싸하게 아려 오는 입술을 핥았다.

이졸데가 제 남편이 쌍둥이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부터 묘하게 느껴지던 리카온의 냉소적이었다가 다정했다가,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생각하면 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살짝 눈감고 지금까지처럼 지내면 된다는 말도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은 불가능했다.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리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리샤르의 모습 또한 이졸데의 불안에 한몫했다.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떤 필요나 흥미에 의해서 그녀에게 다정한 체하고 있었지만 실은 무뚝뚝해 보이는 리카온보다도 더 냉정한 사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졸데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녀 역시 제 감정에 보답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리샤르의 웃고 있지만, 차가운 금빛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고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제 성에 찰 만큼 먹였는지 이번에는 이졸데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왜 구분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보자는 듯 리샤르는 침묵했다.

“남편이 둘이라니,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어요. 중혼은 불법이니 안 되겠고. 하나는 내 남편으로 삼고, 하나는 내 정부가 될 텐데.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졸데는 부디 제 미소가 비웃음으로 보이기를 바랐다. 대답이 의외였는지 눈을 빛내는 리샤르의 모습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불쾌하기를 바라며 한 말이었는데. 그가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는 사실만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기세 좋게 쏘아붙이고 나왔지만 그게 그녀가 괜찮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면 분명 생각의 늪에 잠기게 되어 버릴 게 뻔했고, 그렇다고 외출을 하거나 누군가를 초대할 만한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이졸데는 고개를 숙이고 텅 빈 회랑을 따라 걸으며 지나치는 바닥의 커다란 디딤돌 개수를 세었다.

그녀가 27개째를 셌을 때 군화를 신은 발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만했다. 리샤르를 만나고 나서 잔뜩 어지러워진 머리로 만나고 싶지 않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돌아가며 그녀를 가만두지 못해 난리인지.

이졸데는 뚱하게 그가 어떤 말이든 먼저 꺼내기를 기다렸다. 무슨 용건이 있으니 이렇게 찾아와 앞을 가로막은 게 아니겠는가?

“리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그녀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하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는지 남자는 그리 물었다.

그러나 이졸데는 그의 말에서 걱정을 느끼기보다는 리샤르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리카온의 귀까지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형제가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끔찍한 거부감이라니!

“그 ‘리’에는 당신도 포함인가요?”

이졸데의 짜증 섞인 대답에도 리카온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의 편린도 드러나지 않았다. 인형을 상대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성싶었다. 지금만큼은 도무지 이 형제를 보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으면서도 판에 박은 것같이 똑같은 얼굴들을 보면서 아직도 제가 이들에게 가진 감정이 작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그녀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이졸데는 괜스레 날을 세웠다.

“그렇다고 하면 당신이 뭘 어쩔 건데요?”

그는 고목처럼 침묵을 지켰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멱살을 거머쥐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며 흔들어 대고 싶었지만, 이졸데는 평정을 가장했다. 덩치가 한참은 차이 나는 사내를 그녀 힘으로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은 내 남편이죠. 나는 분명 리카온 에르퀼과 결혼했으니까. 우리가 아직 초야를 보내지 않았다는 게 이 결혼을 무효로 돌릴 수 있다는 뜻이란 건 알고 있나요?”

“초야는 증명되었습니다.”

“당신의 형제와 보낸 것 말인가요? 그걸 초야라고 부를 수 있나요?”

“아니라고 할 셈입니까?”

한마디도 져 줄 생각은 없다는 듯 구는 남자가 괘씸했다. 비틀린 마음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꼬투리 잡고 싶어 했다.

이졸데는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단단한 가슴팍에 살며시 손을 얹고 올려다보자 그녀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듯 의문으로 가득한 눈이 이졸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나랑 자지 않는 거죠?”

답을 들으려는 물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그저 남자의 변화라고는 없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불능인가요?”

이졸데는 시선으로 슬그머니 아래를 가리켰다. 무엇을 묻는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사내들이 무엇으로 자존심을 채우는지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들은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제대로 비웃는 것으로 보이기를 바라며 픽 웃었다.

“쌍둥이라면서 그런 건 안 닮았나 보죠? 안타까워라.”

정말 안타까운 건 미동도 없는 사내의 얼굴이었다. 리카온은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고 싶지 않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낮게 물었다.

“한 남자로는 만족이 안 됩니까?”

미소 짓던 얼굴이 단번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매섭게 노려보는 이졸데의 시선에 리카온은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조소나 승리감이 깃들어 있었다면 참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겠지만, 그 냉랭한 얼굴 위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쌩하게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는 건 이졸데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와 평생을 함께했던 윤리관은 이 결혼이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속삭여 댔고,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은 이대로 눈감으라 속삭였다.

이졸데도 옳은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대로 저택을 뛰쳐나가 결혼 생활의 실질적인 끝을 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친정으로 돌아간 에르퀼 백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댈 테고 법적인 이혼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공방이 이루어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울며 매달리면 세레니티 백작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녀의 뜻을 따라 줄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에 있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마음이 초조해질수록 리샤르가 속삭이던 말에 휩쓸리듯 수긍해 버리고 싶은 나약한 마음이 시시때때로 불쑥 치솟았다. 그래서 이졸데는 한동안 남편들을 피해 다녔다.

이런 날이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안에서 어떤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는 홀로 고민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똑같이 생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꾸만 별거 아닌데 날을 세운다는 식으로 말하는 리샤르도 꼴 보기 싫었고, 무심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리카온도 짜증이 났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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