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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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는 말 한 번 섞은 적 없는 약혼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들을 습관처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전쟁터를 휩쓸고 다니는 모습이 전신(戰神)이나 다름없다 했던가. 이제 고작 스무 살인 풋내기에게 붙기에는 제법 거창하지 않은가, 그리 여길 만한 이명이었다. 워낙에 극적인 걸 좋아하는 귀족들이 과장해서 붙인 사실일 것이다.

얼마 전에도 어떤 오페라 가수더러 천상의 목소리라느니, 백 년에 한 번 나올 목소리라느니 찬양을 해 대서 보러 갔더니 노래는 그저 그런데 얼굴만 미끈한 남자가 귀부인들에게 추파를 던져 대는 꼴이나 실컷 관람해야 했다.

사실 그녀는 이 약혼을 매우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혼자에게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에르퀼 백작의 유일한 아들인 그는 제법 이름을 날린 기사였던 아버지를 닮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손꼽히고 있었다. 아직 젊으니 좀 더 경험이 쌓이면 아버지를 뛰어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혀 관심 없는 그녀의 귀에도 들어올 정도였다.

아무리 대단한 기사이고 장차 더 위대해질 것이라는 말을 들어도 이졸데의 흥미를 유발하지는 못했다. 그래 봤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제 나이답지 않은 냉소적인 감상을 늘어놓던 이졸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에 잠깐 만났을 뿐인 그 소년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그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조르겠다던 계획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리’라는 애칭임이 분명한 호칭 외에는 그의 이름 한 자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모르는 자를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그와 우연히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그와 처음 만났던 곳 근처를 배회해 보기도 했지만 그런 운명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에 대한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이졸데는 침대맡에 앉아 그가 주었던 손수건을 매만졌다. 이미 본래 스며 있던 향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버릇이 되어 버렸다. 그 작은 천 조각이 주는 안정감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기에 충분했다.

바야흐로 천대받던 과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지나 전보를 보내는 대신 집에서 기계 장치 하나로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새가 아니어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주기적으로 쉬어 주어야 하는 말 대신 쉬지 않고 먼 거리를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며 물류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세레니티 백작 역시 그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 한몫 단단히 챙긴 부류였다. 다른 귀족들은 투자에서 그쳤지만 백작가는 직접 사업에 뛰어들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거드름만 피운다고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다. 돈은 새로운 권력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고 한들 귀족들의 오래된 관습이 파격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집안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결혼을 했고, 그렇게 맺어진 결혼은 견고한 동맹이 되었다.

그녀의 언니는 물론이고 가깝게 지내는 귀족가 아가씨들의 약혼자를 봐도 다 비슷비슷했다. 집안과 집안 사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해진 약혼에 감정이 낄 자리는 없었다. 어차피 본인의 의사가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몰래 정을 통하던 상대가 없는 경우에는 수긍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테지만, 이졸데는 그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세레니티 백작가와 에르퀼 백작가의 결합이 불러올 이득이 어떤 것인지 아직 어린 그녀는 알지 못했고 아무도 알려 주려 들지도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 양측에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킬 결합일 것이다.

아무리 세레니티 백작이 다정한 편이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애정 표현 하기를 망설이지 않는 사내라고는 하지만 그는 뼛속까지 사업가였다. 자녀들의 결혼 역시 사업의 일환으로 치부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정략혼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처음부터 마음에 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어코 다른 자와 결혼하겠다며 굽히지 않았다면 그 바람을 들어주었겠지만, 당장 상대를 데려올 수 없자 어린애 투정 취급당했다. 그렇게 진행된 약혼에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는 건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졸데는 늘 기대하곤 했던 생일 파티가 다가옴에도 기대되지 않았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어 왔던 대단한 약혼자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약혼자를 처음 만나는 자리라 한들 없던 흥미가 생길 리도 없었다.

리카온 에르퀼에 대한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전쟁터를 전전했던 터라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전장에서의 무훈에 대한 이야기뿐이었고, 그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쨌거나 열다섯 살이나 먹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며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졸데는 이제 약혼을 논할 만큼 어른이었고, 어른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떼를 쓰지 않는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그저 그런 외모에 그저 그런 사내겠지.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내 그리 생각했었다.

그동안 들려온 소문들을 생각하며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파티장을 걸어 들어오는 리카온 에르퀼의 모습은 단숨에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을 만큼 박력 있었다. 좋게 표현하자면 그러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험악함에 가까웠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저 남자가 에르퀼 공자라며 입을 모아 수군거렸을 때 이졸데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자리임에도 도무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리….”

그녀가 몇 년간 애타게 찾았던 그 남자였다. 혼자 혀를 굴려 발음해 보곤 했던 그 이름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이제는 거의 흐릿해진 그녀의 기억 속처럼 호리호리하고 왕자님처럼 화사하게 웃는 모습은 사라졌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검은 머리카락에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는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일 만큼 아름다웠다. 몇 년 사이에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머리 하나만큼 훌쩍 큰 모습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심장이 바닥에 쿵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오른 것처럼 뛰어 댔다. 아니,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다.

수년 만에 재회한 남자는 숨 막힐 듯 근사했다. 그녀의 기억보다 훨씬 더. 그가 뿜어내는 강렬한 남성미에 파티에 참석한 여인들이 모두 마른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저 남자가 그녀의 약혼자였다. 이건 운명이었다. 도무지 그 말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 모를 첫사랑이 약혼자가 되어 나타났는데, 이걸 어떻게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를 탐내기 시작하는 수많은 시선에 안달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 달려가 그의 팔을 끌어안고 내 것이라고, 넘볼 생각 말라고 마구 고함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흥분으로 숨이 가빠졌다.

“이졸데, 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약혼이 탐탁지 않은 건 알지만 표정 관리해야지.”

옆에 서 있던 큰언니 일라이자가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너무 좋은데. 당장 결혼하고 싶어.”

그녀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이며 내뱉은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일라이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 에르퀼 백작가에서 먼저 혼담을 보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저라는 걸 알고 있는지, 아니, 어린 시절 만났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지. 당장 그에게 저를 기억하고 있느냐고, 결혼하자고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의지로 자제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인 세레니티 백작과 인사를 나눈 남자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탓이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열렬하게 바라보던 시선을 그가 알아차리기라도 했을까 봐 심장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왜인지 조금 부끄러워졌다.

자꾸만 자제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이기라도 할까 봐 진정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키가 어찌나 크던지 시선을 마주하려면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녀가 똑바로 서도 머리꼭지가 그의 가슴팍에 닿지도 않을 듯싶었다.

“레이디 세레니티.”

“에, 에르퀼 경.”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의 이름을 더듬고 만 이졸데는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얼빠진 모습에도 남자는 예의 바르게 그녀의 실수를 모른 체했다.

리카온 에르퀼의 얼굴 위로 희미한 웃음기라도 스쳐 지나갔더라면 딱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을 게 분명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 그를 만났던 건 너무 어릴 때의 일이고 시간이 꽤 많이 지났으니 슬슬 의구심이 들었었다. 좋았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이졸데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그 소년의 기억 역시 지금에 와서는 지나치게 미화된 것이 아닌가 싶었던 적이 있기도 했다.

그를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미화된 기억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실망하게 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던 순간들은 지금에 와서는 모두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기억 속의 근사한 소년은 근사한 청년이 되어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만나 뵙는 건 처음이군요.”

리카온 에르퀼이 입 맞출 수 있게 손등을 내밀면서도 이졸데는 반쯤 넋을 빼놓았다. ‘처음이라니?’ 하며 의문스러워했다가, ‘공식적으로 신분을 밝히고 만나는 건 처음이긴 하지.’ 하고 장난스럽게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초면이라고 알고 있을 자리에서 굳이 오랜만에 본다는 둥 하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모두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심지어 그가 어릴 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히 모르지 않던가? 사실 그가 건넨 인사는 그저 이야기로는 많이 전해 들었다는 말이 생략된 것일 수도 있었다.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뇌어 보니 그게 더 적절해 보였다. 운명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너무 흥분한 모양이었다.

내민 손이 남자의 커다란 손 위에 안착했다.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굳은살 박인 거칠고 뜨거운 피부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가 허리를 숙였고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도 선명한 금빛 눈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결에 눈이 마주친 이졸데는 맹수 앞에서 굳어 버린 사냥감처럼 꼼짝도 못 한 채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손등에 약간 까슬한 감촉이 꾹 눌러졌다가 떨어져 나갔다. 지나친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너무 흥분한 탓인 것 같기도 했고 너무 기쁜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웃음이 튀어나왔으면 나았으련만.

“이졸데!”

아연실색한 어머니의 부름에도 이미 뺨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눈으로 도로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둘러 눈물을 닦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굴어야겠다는 생각은 그녀의 손보다 먼저 닿은 손길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랑한 뺨 위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손끝이 눈물을 닦아 냈다. 남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이졸데의 눈이 커졌다.

“눈에 뭐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도 이렇게 닦아 줬잖아요.”

이졸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던 남자가 이윽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잠시 닿았던 손끝에서 열기가 옮겨 온 것처럼 뺨이 뜨거웠다.

어설픈 미소는 금세 흔적도 찾기 어렵게 사라져 버렸지만, 이졸데는 어떤 확신을 얻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벼락같은 환희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졸데의 눈물을 아무렇지 않게 걷어 낸 남자가 미련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몸을 일으켰다. 이졸데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따라 올라갔다.

그녀를 보는 남자의 시선 어디에서도 저와 같은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샌가 몸의 떨림은 멎었고 희미한 실망감에 손끝이 저렸다. 이졸데는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기분에 혼란스러워하며 시선을 내렸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남자가 내민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풀어 봐도 되나요, …경?”

“물론입니다, 레이디 세레니티.”

차마 부르지 못하고 얼버무린 호칭에도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정중하게 대답했다. 이졸데는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으로 떨리는 손으로 공단 리본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기품 있는 포장에 커다랗게 부풀었던 마음이 그대로 뻥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제 눈 색과 같은 연녹색 보석이 촘촘히 박힌 은빛 티아라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어린 시절 일레인의 결혼식에서 보고 탐냈던 티아라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너무…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리가 결혼할 때 쓰면 좋겠어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입에 담고도 설레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결혼이라니. 최대한 미룰 수 있다면 좋겠다던 생각이나, 아직 식을 치르지도 않은 약혼을 파투 나게 할 계획을 세우던 기억은 어딘가로 내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리카온에게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졸데에게는 강렬했던 재회 이후로 두 사람이 만날 만한 일은 그다지 없었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리카온 에르퀼이 알뜰살뜰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괜스레 안달이 나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릴 때는 조금 더 유쾌하고 다정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라지만 너무 변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어쩌면 전장이 그의 쾌활함을 닳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샘솟았다.

이졸데는 매 순간 그를 생각했다. 리카온. 그렇게나 알고 싶었던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순간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멍하니 방에 앉아 그가 준 티아라를 들여다볼 때는 물론이고 이미 그녀의 향기가 흠뻑 배어 버린 손수건의 해진 솔기를 매만지거나 책을 읽다 말고 멍한 눈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좋았던 부분을 되뇌는 편이 즐거웠다. 그의 무심한 시선에 실망했던 건 잊으려 애썼고, 그런 이졸데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건 미끈하게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태도, 눈물을 닦아 주던 따뜻했던 살갗의 감촉 같은 것들이었다.

마음은 나날이 깊어져 갔지만, 리카온의 감정이 어떤지 모르니 결국은 혼자만의 감정인 셈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무심한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매우 바빠졌고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생각하는 것만큼 저를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끔 보내는 선물에 동봉된 카드를 읽고 나서야 그가 약혼자의 존재를 아주 잊어버리지는 않았구나 하고 사실 적시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생각을 해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어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리카온의 무심한 얼굴을 거치면 그저 우연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그리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리카온에 대한 마음은 깊어지기만 했다. 마치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 것처럼 거침없었다.

게다가 그를 좋아한다고 한들 잘못된 건 없는 일이 아니던가. 리카온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거리낄 것은 조금도 없었다.

또래의 친구들은 거의 다 일찍이 겪었던 첫사랑을 접은 지 오래였다. 그 대상이 가정 교사, 약혼자가 있는 귀족 영식 혹은 가문의 기사, 오페라 배우 따위의 이루어질 가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대상이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끝내게 되었지만.

그에 비하면 이졸데는 얼마나 운이 좋단 말인가? 별일이 없다면 그녀는 첫사랑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

이졸데의 생일로부터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두 사람은 약혼했다.

리카온의 약혼이 귀족 사회의 평균보다 좀 늦은 탓인지 제법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약혼식은 사실 결혼식이 아니었나 착각할 정도로 성대했다. 세레니티 가문의 부를 과시하듯 화려한 모습에 이졸데마저도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약혼자를 다시 볼 날을 애타게 기다리며 기대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가늘게 떨리는 이졸데의 손을 붙잡고 약혼반지를 끼워 주는 그의 손길은 무심했고 냉막한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열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렘과 흥분은 맥없이 스러졌고 그녀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두려움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약혼식을 치르기 무섭게 북부 국경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부리나케 다시 국경으로 떠나 버린 리카온은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북부의 분쟁이 오래지 않아 전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수도는 평화로웠지만, 국경 지역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내륙 국가인 아젠다가 일으킨 전쟁은 바다와 접한 땅을 원하는 그들의 집요함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왕국의 영토는 드넓었고 국경 또한 머나멀었다. 항상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위험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전쟁은 끔찍했다. 제가 간신히 찾아낸 운명의 상대가 피가 튀는 전쟁터에서 매 순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리카온 에르퀼은 지휘관이니 최전방에서 죽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달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도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같이 리카온이 전사했다는 전보가 도착하는 악몽을 꿨다. 끔찍한 악몽을 되풀이해 꾸고 식은땀과 눈물로 흠뻑 젖은 채 깨는 매일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간혹 리카온이 약혼자를 잊지 않고 보내는 짤막한 안부 편지를 보며 안도하는 순간은 잠시였다. 이졸데는 이러다간 약혼자가 무사히 돌아오기도 전에 제가 신경 쇠약으로 말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했다. 차라리 리카온 에르퀼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더라면 좀 나았을까.

이졸데는 급기야 믿지도 않던 신을 찾았다.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 기도를 올리며 약혼자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기부를 하고 난민과 고아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은 고되고 다행스럽게도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녹초가 되어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면 어떤 악몽도 꾸지 않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지치는 법이었다. 혼자서만 저만치 앞서 나가는 감정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녀는 만나지도 못하는 대상을 향해 자꾸만 깊어지는 마음에 제동을 걸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매일같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심지어 상대는 그녀에게 어떤 감정도 없는 듯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를 좋아해 이리도 혼자 속을 태우는 게 억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했던가. 실로 옳은 말이었다. 이졸데가 약혼자를 적당히 좋아하려고 마음을 다스리기에 충분할 만큼 시간은 많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사로잡았던 게 무색할 만큼 쉬이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녹초가 될 만큼 지치지 않아도 무사히 잠들 수 있었고 전보가 날아와도 제법 담담하게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약혼식으로부터 6년이 지난 현재. 길고도 지난했던 전쟁은 승리로 끝났고 다행스럽게도 리카온 에르퀼은 다친 곳 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크게 다친 곳도 없었고 공로까지 세운 데다 은퇴한 아버지로부터 작위까지 물려받았으니 오랫동안 미뤄 두었던 결혼을 하기에 이만큼 적절한 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졸데는 이제 스스로의 감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 품었던 뜨거운 감정은 모두 식어 버린 것 같기도 했고 빛이 바랜 것 같기도 했다. 리카온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어도 심장은 잠잠하기만 했다.

하긴 6년이 어디 짧은 시간이던가? 그를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세어 보자면 장장 13년이었다. 서로 불같이 사랑했어도 변함없는 사랑을 장담하기 어려운 마당에 어린 날 홀로 품었던 설익은 감정이야 덧없이 스러졌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마음을 죽이려고 애쓴 시간이 얼마인데. 나름대로 노력이 결실을 맺은 셈이었지만 그게 마냥 좋은 일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이졸데는 곧 다가올 결혼을 별일 아니라 치부했다. 어차피 그녀가 리카온 에르퀼을 사랑하든, 하지 않든 결혼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원래부터 그녀의 감정이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그사이에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생긴 것도 아니니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결혼을 달갑지 않게 여길 만한 이유 또한 없는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딱 지난주였다.

리카온 에르퀼이 에르쉬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 어제였고 오후쯤 세레니티 저택에 방문하겠다는 전보가 온 것은 아침 식사가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그 약속 때문에 이졸데는 이른 아침부터 하녀들의 난리 법석을 견디며 단장을 해야 했다.

“아가씨, 목걸이는 이걸로 하세요.”

“너무 과해.”

눈이 부실 만큼 번쩍거리는 장신구를 모두 물린 그녀는 한때 리카온이 선물했던 귀걸이 한 쌍, 브로치 하나에 약혼반지만 허락했다.

장신구는 하나도 하지 않고 수수한 모직 드레스 차림으로 봉사하러 다닌 시간이 길어서인지 화려한 드레스와 주렁주렁한 장신구가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졸데가 오랜만에 하는 성장(盛裝)에 불편함을 느끼며 미미하게 몸을 뒤틀고 있을 때쯤 하녀가 호들갑을 떨며 뛰어왔다.

“에르퀼 백작께서 도착하셨어요. 내려오셔요, 아가씨.”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긴장을 느끼며 이졸데는 무릎 위에 두고 매만지던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방을 나섰다.

홀은 유명한 전쟁 영웅을 맞이한단 핑계로 구경을 나온 사용인들로 어수선했다. 가장 앞에는 이졸데의 부모님인 세레니티 백작 부부와 일레인이 남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졸데! 어서 이리로 오렴.”

마침 그녀가 내려온 것을 발견했는지 어머니가 손짓했다. 그녀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발바닥이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를 않았다.

6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리카온 에르퀼을 처음 만난 날, 강렬한 운명을 느꼈던 그 순간의 생생한 기억.

이졸데가 지금도 그를 무섭다고 여긴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는 그 남자가 불러일으킬 기억이 두려웠다. 오래전에 덮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불씨에 다시 불이 붙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여전히 한숨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잘생긴 얼굴은 시간의 흐름을 덧입어 더욱 성숙하고 근사해졌다. 기분 탓인지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이졸데는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을 매만지며 천천히 걸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깍듯한 인사를 건네는 리카온의 얼굴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도록 무덤덤하기만 해서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게는 이 결혼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이졸데는 그가 품에 안겨 주는 커다란 꽃다발을 받아 들며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비워 주었다. 배려는 감사한 일이었지만 단둘이서 어떤 회포를 풀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불편하기만 했다.

어렸을 때야 그 나름의 천진함으로 격의 없이 다가가거나 떼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이제 스물한 살이었다. 떼를 쓸 나이는 지나도 한참 지난 시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킨 목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꽃을 하녀에게 건네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드시고 가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지체 없이 흘러나온 리카온의 대답에 이졸데의 얼굴 위로 감추지 못한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기꺼운 것 같기도 했고 불편한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헤어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밀려오는 아쉬움에 그녀는 아직도 제 안에 자리한 감정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좀 걷고 싶군요. 세레니티 저택의 장미 정원이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어진 그의 말에 이졸데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어색하게 웃었다.

“이쪽이에요, 에르퀼 경.”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고 매우 느린 것 같기도 했다. 슬쩍슬쩍 곁눈질로 그의 귓가로 흘러내린 흑발과 단단한 턱, 넓은 어깨와 허리로 이어지는 선을 훔쳐봤다. 그의 모든 것은 6년 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

이렇게 근사한 남자였다. 멋모르고 품었던 풋사랑의 실체는 이런 모습으로 훌쩍 성장해 돌아왔다. 몇 년을 애타게 마음 졸이고, 시간에 지쳐 이제 모두 잊었다고 생각한 마음에 다시 불씨를 틔울 만큼.

그녀가 모르는 그의 지나온 시간들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소년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그 변화하는 과정 모두를 지켜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보고 느꼈던 것, 그의 생각, 그 다정한 소년이 이렇게 딱딱하고 무심한 사내로 변하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었다. 그녀에게 그럴 권리가 있기는 한 건지 모를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가까이 서고 싶었으며 동시에 그가 얼른 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남자에게서는 차가운 느낌의 향수 냄새와 희미한 화약 냄새가 났다. 정원을 가득히 채운 장미의 화사한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온 신경이 옆에 선 남자에게 쏠렸다.

“말씀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레이디께서 괜찮으시다면 결혼을 서두르고 싶습니다.”

“아.”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침묵을 깨고 들려온 말을 듣자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어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시 그녀를 불러 말해 주었던 이야기가.

결혼은 어차피 정해진 일이었고 빠르든 늦든 상관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알아서 하시라고 한 다음 새카맣게 잊어버렸던 일이었다. 다시 떠올린다고 한들 달라질 것 없었다.

“들었어요. 저는 상관없어요.”

“다행입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경의 탓이 아닌걸요.”

이졸데의 대답에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홀린 듯이 응시하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눈이 마주친 탓에 불에 덴 듯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결혼을 서두르는 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의 나이는 벌써 스물여섯이었으니 남들에 비하면 꽤 늦은 편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늦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귀한 외동아들이 전쟁터에서 비명횡사하기라도 했다가는 대가 끊겨 버리니 에르퀼 백작가도 제법 속이 타들어 갔으리라.

세레니티 백작가의 입장에서도 오히려 달가운 제안이었다. 이졸데는 벌써 스물하나였고 그녀와 친분을 나누는 귀족가 영애들은 모두 결혼을 한 지 오래인 것은 물론 진작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었다. 지나치게 늦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슬슬 서둘러야 할 때인 건 사실이었다.

그리 냉소적이라 할 만한 이유를 들었지만, 실은 그저 좋기만 했다. 드디어 이 잘난 사내가 제 것이라고 온 세상에 공표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녀를 보면 단 한 번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다음 주말에 시간 있으십니까?”

“주말이요?”

생각에 잠겨 있던 이졸데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피했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저 눈을 마주했을 뿐인데 뺨에 열이 올랐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남자가 제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몸의 반응을 주체할 수 없다니.

“오페라 티켓이 있는데,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졸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적당히 튕기라든가 도도하게 굴어야 한다는 친우와 언니들의 이야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런 건 서로 적당히 감정이 있는 관계에서나 가능하지, 제게 관심 없는 사내에게 할 만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짧은 순간 그런 계산을 할 만큼 이졸데가 관계에 능숙한 편도 아니고.

“저는 좋아요.”

데이트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좋았다. 세상 그 무엇도 관심 없다는 듯한 눈을 하고 건넨 제의에 기뻐하는 제가 우습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나름대로 약혼자에 대한 성의를 보이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괜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의 성격에 맞지도 않았다.

“그럼 시간에 맞춰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이졸데는 그와의 짧은 산책 내내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건 흔히 표현하듯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이 아닌 듯이 느껴지는 그 기묘한 감각은 술을 잔뜩 마신 후의 몽롱함과 닮았고, 이른 아침 잠이 덜 깼을 때 느껴지는 감각 같기도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잠시 망설이던 리카온이 그녀의 뺨에 살며시 입 맞췄을 때 그 기분은 절정에 이르렀다.

리카온을 태운 마차가 떠나고 방으로 돌아온 이졸데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정신 차리라는 듯 제 뺨을 두드렸다. 완전히 떨쳐 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이 짧은 만남으로 다시 불이 붙은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이제 그녀는 혼자 품은 감정이 얼마나 속을 상하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 남자도 저를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며 기대하기도 싫었다. 기대할수록 실망하게 되는 마음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또다시 감정을 꺼트리기 위해 애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편이 덜 괴로울 테니까.

이졸데는 그가 전장에 있던 몇 년 동안 받아 보았던 편지들을 꺼내 보았다. 1년에 한두 번쯤 받아 보았던 편지들은 모두 합쳐도 몇 장 되지 않았다.

그의 성격처럼 단정한 필체로 너덧 줄 쓰인 편지의 내용은 안부와 근황, 그냥 하는 말일 것이 분명한 보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때 그 맺음말이 예의상 하는 겉치레라는 걸 알면서도 어찌나 설레 했는지.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라 지금의 것과 합쳐졌다. 이졸데는 아주 잠시 편지를 품에 안고 숨을 골랐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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