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후우.”
곧장 뒤따라 들어온 유주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원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 주변을 방방 뛰어다니고 있는 현.
두 사람을 본 현이 두 팔을 벌리고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엄마.”
유주가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현을 품에 꼭 안았다.
“왜 다시 왔어요?”
“우리 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내일이면 볼 텐데.”
현은 유주의 품에서 벗어나 다시 모닥불로 달려갔다. 진주만 현의 곁에 있고 진 여사와 재명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재명이 목장갑을 벗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녁까지 먹고 갔으면 알아서 잘 놀 것이지 왜 다시 왔어?”
끼익, 차가 멈추는 소리와 함께 신 실장과 구 차장도 뛰어 들어왔다.
“이거 무슨 상황이야? 누가 설명 좀 해 주지?”
“도대체 왜! 아무도 전화를 안 받는 겁니까?”
신 실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이 밤에 달려왔다는 거야?”
재명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지만 그는 통화가 안 되는 순간부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조두명은 존재 자체를 몰랐고 유주 곁에 있던 이상훈은 방심했다.
그로 인해 유주가 죽을 뻔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귀여운 내 조카가 달 구경하자고 해서 모닥불을 피우고 여사님이 고구마……. 근데 너 님만 오면 되지 왜 남의 여자까지 이 밤에 호출을 해?”
“호출을 한 게 아니라 제가 온다고 했습니다.”
“나 원 참. 어쨌든 이왕 다 모였으니까 저쪽으로 가요. 딱 봐도 현이 부모님은 정신 차리는 데 시간 좀 걸릴 거 같고, 신 실장은 우리하고 고구마나 먹어요. 차장님도 오세요.”
재명이 두 사람을 데리고 모닥불로 향하자 태욱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 여사가 유주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많이 놀라셨군요. 갑자기 현이가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핸드폰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미리 전화를 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태욱 씨, 진정 좀 됐어요?”
태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 여사가 유주를 데리고 가자 멀뚱히 서 있던 구 차장이 다가왔다.
“신 실장 전화 받고 심장이 철렁했는데 다행입니다.”
“구 차장한테까지 전화한 줄 몰랐어.”
“신 실장이 딱 두 마디 했습니다. 현 연락 두절, 당장 영매관으로.”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 그만 가서 쉬어.”
“저 고구마 좋아합니다. 회장님도 가시죠.”
“먼저 가.”
구 차장이 성큼성큼 걸어가자 현이 달려와 품에 덥석 안겼다. 까르르 깔깔, 웃음소리가 영매관에 울려 퍼졌다.
태욱은 잠시 서서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유주와 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진 여사가 다가왔다.
“왜 여기 계세요?”
“이런 행복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더 행복해지실 겁니다. 우리 종족의 불행도 해결됐고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습니다.”
“오래오래 우리 현이 곁에 계셔 주세요.”
“회장님. 아까 현이가 손도 안 대고 그릇을 깼습니다.”
“현이가요?”
태욱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유주의 무릎에 앉아 고구마를 먹고 있는 현을 쳐다보았다.
“마침 혼자 있을 때라 아무도 못 봤습니다.”
“여사님이 잘못 본 거 아닙니까?”
“그릇뿐 아니라 도자기도 깼습니다. 현은 본인이 무엇을 한 건지 인지를 못 하는 거 같았습니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특별하더니 회장님만큼 어쩌면 회장님보다 더 강한 아이가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 여사는 살짝 들뜬 표정이었지만 그는 걱정이 되었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무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5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유주가 알면 걱정할 텐데.”
“현은 영리하니까 회장님께서 설명해 주시면 잘 알아들을 겁니다. 저도 신경 쓰겠습니다.”
아빠! 현이 한 손에 고구마를 들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태욱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모닥불을 향해 걸었다.
결혼기념일을 뜨겁게 보내려던 계획은 이미 끝난 것 같고 현의 생각은 잠시 미뤄 둬야 할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현을 번쩍 안아 들고 유주 옆에 가서 앉았다.
“진짜 맛있어요. 태욱 씨도 먹어 봐요.”
유주가 껍질을 벗긴 노란 고구마를 후후 불어서 내밀었다. 태욱은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무는 동시에 유주의 손가락을 잽싸게 혀로 핥았다.
주변을 살피는 유주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 * *
유주는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꽃이 모두 지고 초록색 이파리만 무성한 벚나무를 쳐다보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따스했다.
-나도 병원으로 같이 갈까?
“오래 걸리는 거 아니니까 끝나고 전화할게요.”
-알았어. 이따 약속 장소에서 봐. 근데 현이는 왜 이렇게 조용해?
“책 읽고 있어요.”
태욱도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고 하더니 현도 똑같다. 6살인 올해부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다고 해서 요즘 걱정이었다.
유치원은 재미로 다니는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아침이면 가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현, 아빠가 한 말 기억하지?
“네, 엄마를 지켜야 한다.”
-잊지 말고 엄마 곁에서 떨어지면 안 돼.
유주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 정면을 응시했다.
“왜 자꾸 현한테 나를 지키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알면 26살인 줄 알겠어요. 자꾸 그러니까 유치원에 적응을 못 하잖아요.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들 수준이 높은 거지.
“이건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는 아이답게 키우는 게 맞아요.”
-또 잔소리한다.
“잔소리가 아니라……. 맨날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그만 끊어요.”
-사랑해.
유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꾸를 하지 않으면 전화를 끊지 않을 것 같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얼른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항상 이런 식이라 그녀 혼자만 발끈했다가 풀어지게 된다. 태욱에 대한 불만은 딱 하나였다. 현을 너무 어른스럽게 대한다는 것.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엄마보다 아들이 더 믿음직스러워서.’
아무리 현이 또래보다 어른스럽다고 해도 이제 겨우 6살이다. 그런 황당한 말을 하고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남발하며 사랑한다고 하는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유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횡단보도 앞에서 차를 멈췄다. 양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좁혔다.
“저 차 왜 그러지?”
맞은편에서 트럭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다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게 보였다. 멈추지 않으면 그녀의 차와 정면으로 부딪힐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멈추겠지 하는 생각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앞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뒤에도 차가 몇 대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사달이 나겠다 싶어 현의 안전벨트를 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현. 당장 차에서 내려.”
단 몇 초면 차가 횡단보도를 통과할 것 같은데 현을 안고 내리기에는 늦었다. 놀란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걸음이 느린 할머니와 아이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현, 당장 내려!”
유주는 빠르게 횡단보도와 가까워지는 차와 꼼짝도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조수석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손이 닿지가 않았다.
정신이 없어 운전석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
“안 돼. 안 돼!”
내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현을 품으로 감싸 안았다. 끼이익, 귀를 찢는 마찰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주는 숨도 못 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트럭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트럭 양쪽으로 할머니와 아이가 주저앉아 있고 뒤에 있는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엄마.”
“응? 우리 현이 놀랐지? 괜찮니? 내리라니까 왜 안 내렸어?”
“엄마를 지켜야죠.”
“뭐?”
그녀가 놀란 시선으로 쳐다보자 현이 눈을 곱게 휘며 해맑게 웃었다.
“혹시 현이 네가.”
“병원 들렀다가 빨리 아빠 보러 가요.”
“아니지?”
“아빠가 책 사 온다고 했어요.”
현은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엉뚱한 소리만 하더니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양 비서님이 여기는 어떻게.”
양 비서는 회장 비서실 막내다. 성격도 싹싹하고 일 처리가 꼼꼼하다고 신 실장이 칭찬하는 소리를 몇 번 들었었다.
“우연히 사모님 차를 봤어요. 많이 놀라셨죠?”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십년감수했어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양 비서님이요?”
“저 오늘 월차라 저기 서점에 있었거든요. 마침 차도 안 갖고 왔고 저희 집이 병원에서 멀지 않아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도저히 운전을 못 할 것 같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녀가 현을 데리고 뒷좌석에 탔다.
“양 비서님,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트럭 운전자가 심장 마비를 일으켰나 봐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트럭 문이 열려 있고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심폐 소생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119에 실려 떠났다.
경찰이 차선을 정리해 줘서 뒤차부터 출발한 뒤 트럭과 제일 가까운 그녀의 차도 잠시 후 그곳을 떠났다.
* * *
태욱은 침대에 앉아 그가 가져온 책을 몽땅 올려놓고 그중 한 권을 읽고 있는 현을 잠시 바라보다 소파로 향했다.
유주를 품에 꼭 안아 주고 등을 토닥였다.
“식사는 30분 있다 올려 보내라고 했어.”
“마침 양 비서님을 만나서 다행이었어요.”
유주는 모르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외출할 때마다 양 비서가 따라다닌다. 양 비서의 전화를 받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트럭 운전자는 무족도 아니고 심장 마비가 확실하다는 연락을 받아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집으로 갈 걸 그랬나?”
“아니요. 책을 미리 갖다 놨다는 말 듣고 현이가 좋아하는 거 봤잖아요. 근데 나 물어볼 거 있어요.”
유주가 품에서 벗어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죠? 혹시 알고 있었어요?”
“놀랄 거 같아 말 안 했어.”
“언제부터 알았어요?”
“얼마 안 됐어.”
벌써 1년이 지났지만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아 말을 하지 못했다. 14살도 특별한 케이스라고 했는데 5살이라니.
혹시 몰라 양 비서한테는 말을 해 놨었다.
“그럼 우리 현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달라지는 건 없어. 현도 자기가 무족인 걸 알고 있어. 힘을 써야 할 때와 아닌 때를 충분히 알려 줬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태욱은 한숨을 푹 쉬는 유주의 두 볼을 감싸고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유주 네가 아주 대단한 놈을 낳은 거 같아.”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으니. 그래서 자꾸 나를 보호하라고 한 거였구나.”
“오늘 보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요. 지난번에 넘어져서 무릎 다쳤다고 했잖아요. 약을 가지러 간 사이에 상처가 작아졌더라고요. 잘못 봤나 했는데.”
“다른 능력은 강한데 아직 제 몸 치료하는 건 부족한 거 같아. 곧 그것도 좋아질 거야.”
“그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유주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태욱은 한 팔로 감싸 안고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대단한 남자에 대단한 아들이라니.”
“그런 남자 둘이 널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마.”
“당연하죠. 아직은 현이 어려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태욱 씨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어요. 나도 특별한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둘로 부족해?”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넘쳐요.”
태욱은 빙그레 웃었다. 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유주가 안다면 기절할지도.
‘진짜 해요?’
주먹으로 그의 손을 쳐 보라고 했더니 6살인데도 힘이 제법 강했다. 현은 집중력도 상당하고 머리가 영리하다. 하나를 알려 주면 그 이상을 깨닫는다.
“아빠, 엄마.”
현이 쪼르르 달려와 그의 무릎에 앉아 작은 팔로 두 사람을 안았다. 유주가 현의 볼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아들.”
“저도 사랑해요.”
“배 안 고파?”
“배고파요.”
그때 벨이 울렸다. 음식이 식탁에 차려지는 동안 현은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
그가 잠깐 방에서 통화를 하고 돌아왔을 때도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배고프다면서 왜 안 먹고 있어?”
“현이가 아빠랑 같이 먹어야 한대요.”
“우리 현이 기특하네. 자, 이제 맛있게 식사할까?”
네! 우렁찬 현의 목소리에 태욱은 유주와 마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내 아내, 내 아이, 가족.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걸 꿈꿨었다. 하루하루가 행복이 넘쳐흐른다. 태욱은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 유주와 현을 쳐다보았다.
식사를 하는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창밖은 조금씩 어둠이 물들기 시작했다.
< 끝 >
@JV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