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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67화 (68/69)

67화

에필로그

유주는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차를 마셨다. 두 달 전 돌 때 찍은 사진이었다.

강 현. 이름은 그녀가 지었다.

‘우리 아기 괜찮아요?’

병실에서 정신이 들고 제일 먼저 아이 상태부터 물었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건강하다고 했다. 진통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아이를 낳았고 몰랐는데 이후에 꼬박 하루를 잤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푹 자고 났더니 출산한 몸 같지 않게 멀쩡했다.

‘아직은 안 돼.’

태욱은 아이를 낳고 계속 퇴원을 못 하게 했다. 나중에 진 여사까지 나서서 집에 함께 있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자꾸 퇴원 못 하게 하면 앞으로 무기한 각방 쓸 거예요.’

퇴원을 한 달 반 만에 했다. 그런 협박이 먹힐 줄 알았으면 진작 할 걸 그랬다.

태욱은 병원에 있을 때 아이는 더 이상 없을 거라며 수술을 했다고 했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결정했다는데, 임신 기간 내내 그리고 무사히 출산을 한 후에도 불안에 떨던 태욱의 마음을 알기에 꼭 안아 주었다.

빈 잔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소파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실버초코라고 떴다.

-내 조카 잘 있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아.”

-기특한 녀석.

은정은 파리에 있고 당분간 들어올 계획이 없다고 했다. 퇴원하고 먼저 전화를 걸어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했다가 엄청 잔소리를 들었다. 각오했던 터라 미안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었다.

당장 쫓아올 기세더니 회사 일이 바빠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

-남편은?

“회사에 잠깐 나갔어. 금방 올 거야.”

-같이 있을 때 통화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다시 전화해야겠네.

“왜? 태욱 씨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우리 회사에 자금 문제가 있었는데 태욱 씨가 도와줬다고 방금 들었어.

“그랬구나.”

-난 네가 말을 해서 도와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몰랐던 거야?

“잠깐 지나가는 말로 하기는 했는데 도움을 준 건 몰랐어.”

태욱과 은정은 영상 통화로 서로 인사했다. 이후에 가끔 통화할 때 옆에 있으면 안부를 묻는 정도였는데 도움을 준 건 몰랐다.

-네 남편 널 진짜 많이 사랑하나 보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너도 옆에 있잖아. 두 사람 결혼 안 할 거야?”

-바쁜 일 끝나면 올해 안에 할까 해. 결혼식은 간단히 하거나 안 할지도 모르겠어. 그 사람 식구들이 모두 파리에 있어서 둘 중 한 집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번거로울 거 같아.

“그렇기는 하겠다.”

-너 결혼식 안 한 거 후회 안 해?

“전혀.”

결혼식은 하지 않았고 가까운 지인 몇 명만 모여서 식사하고 사진만 찍었다. 혹시 태욱이 서운해할까 봐 다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예상했던 대답만 들었다.

너만 있으면 된다고.

-나도 형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현이 자?

“응, 정원에서 한참 놀더니 피곤한지 조금 전에 잠들었어.”

-오늘은 이모님 안 계셔?

“어제 가셨는데 다음 주에 오시기로 했어.”

무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진 여사를 태욱의 이모라고 말했다. 상주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는데도 진 여사는 자주 집에 들러 며칠씩 머물다 가곤 했다.

-나 전화 들어와서 그만 끊어야겠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유주는 현의 방을 살며시 열어 보고 서재로 향했다. 회사에 사직서를 내러 갔을 때 사장님과 남 부장은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돌아오라고 했지만 아직은 현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태욱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그녀가 집에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책을 읽다 깜박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 보니 태욱이 옆자리에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잠들었나 봐요. 언제 왔어요?”

“방금.”

“깨우지 그랬어요.”

“침대로 데려갈까 하다 너무 곤히 자서. 많이 피곤한 거 같은데 현이가 힘들게 한 거야?”

“아니요. 내가 만약 피곤하다면 현이 때문이 아니라 밤에 잠을 못 자게 한 누구 탓일 거예요.”

“엄청 좋아한 걸로 아는데.”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자 태욱이 피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냉큼 다가가 태욱의 무릎에 앉았다.

“대답을 안 한다는 건 인정한다는 뜻?”

“알면서 뭘 물어요.”

태욱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 매 순간 미칠 것 같은 열락에 허덕이다 정신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같이 샤워할까?”

“현이 깰 때 됐어요.”

“주말에도 아주머니를 오시라고 해야겠어.”

“일주일에 이틀은 우리만 있고 싶어요.”

현을 돌봐 주는 분과 집안일 해 주시는 분도 주말엔 쉬게 했다. 오늘처럼 태욱이 잠깐 회사에 나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서서히 준비를 해야 하나.”

“무슨 준비요?”

“아이를 엄마 껌딱지로 키울 수는 없잖아.”

“현이 이제 돌 지난 지 두 달 됐어요. 스물 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스무 살까지 끼고 있겠다고?”

“그게 아니라 지금은 엄마 품이 필요할 때라고요.”

“녀석이 엄마를 너무 좋아해.”

“설마 아이한테 질투를 느끼는 거예요?”

태욱은 아니라고 했지만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유주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한테 질투하는 사람은 태욱 씨밖에 없을 거예요.”

“질투 아니라니까.”

그때 문이 열리고 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벌떡 일어나 다가가서 현을 품에 안아 들었다.

“우리 현이 깼구나? 엄마가 없어서 놀랐어?”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다 태욱을 향해 팔을 벌렸다.

“아빠한테 가고 싶어?”

“네.”

“아빠가 오실 거야.”

그녀가 돌아보자 태욱이 다가와서 현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아빠 방금 들어와서 씻어야 해. 이따가 안아 줄게.”

“혀니도.”

“아빠랑 씻고 싶다는 뜻이야?”

끄덕끄덕.

태욱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더니 현을 안아 들고 서재를 나갔다. 유주는 잠들기 전에 씻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아빠라고 한 거야?’

현은 다른 아이들보다 모든 게 빨랐다. 처음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과 현이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을 때 태욱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색함, 감동.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유주는 빙그레 웃으며 안방으로 향했다. 욕실 입구에 태욱과 현이 벗은 옷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첨벙, 첨벙. 까르르, 깔깔.

태욱이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웃음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편, 아이, 가족. 평화롭고 안정적인 일상들.

아이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행복하다. 유주는 나직이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나왔다.

* * *

챙, 잔을 부딪치자 유리 글라스 안 붉은 와인이 파르르 파동을 일으켰다. 태욱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뜨거운 시선으로 유주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유주가 정한 결혼기념일이다.

‘나도 모르게 혼인 신고를 했으니 그날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사진 촬영한 날을 기념일로 하기엔 좀 그렇죠.’

그래서 두 사람이 처음 죽녹원에서 만난 날을 결혼기념일로 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유주를 사랑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현은 5살이 되었다.

“우리 현이 잘 자겠죠?”

“오늘은 나한테만 집중하라고 했잖아.”

현이 영매관에서 혼자 자고 오는 건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날 밤새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 결국 새벽에 영매관으로 향했다.

“설마 지금 당장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까 현이 하는 말 들었잖아요.”

현은 또래답지 않게 꽤 의젓했다. 가끔은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할 때가 있었다.

오늘도 현이 먼저 영매관에서 자겠다고 했다.

‘이곳에서 아이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진 여사는 어릴 때도 자주 집으로 와서 현을 챙겨 주더니 영매관에 있는 현을 볼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나보고 집중하라더니 무슨 생각 해요?”

“네 옷을 벗기는 상상.”

“아우, 음흉하기는. 현이가 잠들었다는 전화가 오기 전에는 안 돼요.”

“지금 해 보면 되지.”

“이제 9시예요. 벌써 잘 리가 없죠.”

집에서는 늦어도 10시 전에는 잠을 자는데 오늘 하루 종일 뛰어놀았으니 일찍 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도 전화를 안 받지?”

진 여사와 진주. 오늘은 재명까지 함께 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순간 몇 년 동안 느끼지 못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 봐야겠어.”

그가 벌떡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향하자 유주도 서둘렀다.

“나 와인 안 마셨어요. 운전은 내가 할게요.”

차가 곧장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가는 동안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를 않았다. 혹시 몰라 신 실장한테 전화했다.

2년 전 실장으로 승진한 신 비서는 재명과 몇 년째 만나고 있으면서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네, 회장님.

“신 실장, 혹시 오늘 재명하고 통화한 적 있어?”

-낮에 잠깐 했어요. 오늘 영매관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현이가 그곳에 있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아.”

-네?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유주가 꼭 잡았다.

“걱정 말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유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운전을 하면서도 그를 다독였다. 반드시 그래야 하고 그럴 거라고 믿지만 유주가 사라졌던 그때가 떠올라 어금니를 꽉 물었다.

와인을 괜히 마셨다. 유주가 속도를 높이고 있는데도 마음이 급해 속이 바싹 탔다.

“먼저 내릴게.”

태욱은 영매관 입구에 차가 멈추자마자 뛰어내렸다. 대문을 열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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