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잠시 후 들어온 박 과장이 유주 상태를 살피는 동안 그는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가 더 커지기는 했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약하게 진정제를 투여해서 한동안 주무실 겁니다. 혈액 검사 결과 나오면 다시 오겠습니다.”
박 과장이 나간 뒤 재명이 들어왔다.
“제수씨는 괜찮아?”
“일단은.”
“잠깐 나가서 이야기할래? 차수연 사장…….”
“네가 알아서 처리해.”
고작 20분도 안 되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두 번 다시 실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거 처리했어. 근데 아까 그 힘은. 아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른 자들이 더 있는지 확인해. 차수연 주변과 직원, 식당에 자주 드나들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싹 다.”
“이미 구 실장한테 연락했어. 곧 진 여사님도 오실 거야.”
“앞으로 출입은 최소한으로 줄일 거야. 너도 오지 마.”
“아무리 그래도 나까지…….”
“회사는 네가 알아서 하고 꼭 필요한 것만 전화나 메일로 보내. 그만 가 봐.”
재명은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갔다. 그는 유주가 깨어날 때까지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 * *
“태욱 씨, 나 새콤달콤한 거 먹고 싶어요.”
4월 초, 병원 주변은 벚꽃이 만발했다. 유주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태욱은 책을 보고 있다 냉장고로 향했다.
차수연이 말한 남자가 조두명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유주에게 설명했더니 고개만 끄덕이고 별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무사한 것 외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딸기, 멜론, 망고, 천혜향. 다른 거도 있는데 다 줄까?”
“천혜향 먹을래요.”
천혜향을 들고 와 껍질을 까는 동안 유주는 입을 아, 벌리고 기다렸다. 입에 넣어 주자 오물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태욱 씨도 먹어요. 아.”
“난 됐어.”
“내가 주는 거 안 먹으면 삐질 거예요.”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천혜향 대신 손가락 하나가 쏙 들어왔다. 잽싸게 빼려고 하는 걸 꽉 잡고 손가락을 혀로 꼼꼼히 핥았다.
“천혜향보다 네 손가락이 더 맛있다.”
“장난치려고 한 건데.”
“이런 장난은 언제든 환영이야. 손가락 말고 다른 곳도 물론 환영이고.”
그가 씨익 웃자 유주의 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유주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럼 나도.”
유주의 입술이 볼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볼 말고 입술에.”
“쪽.”
“뽀뽀 말고.”
“누가 들어오면 안 되잖아요.”
“아침에는 해 줬잖아.”
“그땐 들어올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죠. 이따 밤에 해 줄게요.”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천혜향을 유주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하나를 다 먹은 유주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도 좋고 꽃구경 가고 싶다.”
“여기서도 벚꽃 보여.”
“30층에서 보는 거 말고.”
“안 돼.”
“병원 주변 산책하는 거도 안 돼요? 태욱 씨하고 같이 가면 되잖아요.”
“안 돼.”
단호히 안 된다고 하자 유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동안 병실에서만 있었으니 답답하겠지.
더 보채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보니 갈등이 생겼다.
“그럼 딱 10분만.”
“겨우 10분이요?”
“싫으면 말고.”
“당장 가요.”
태욱은 배를 감싸고 침대에서 내려서는 유주를 부축했다. 배가 제법 불러 움직임이 둔한데도 표정은 소풍이라도 가는 거처럼 즐거워 보였다.
옷장에서 얇은 카디건을 가져와 입힌 뒤 유주를 데리고 병실을 나왔다. 안내실에 앉아 있던 진 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주가 답답하다고 해서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조심해서 다니시면 괜찮을 겁니다.”
유주는 승강기에서 내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깊게 들이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따뜻한 햇살, 바람.
얼마만의 외출인지 가슴이 펑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창문 열고 병실에서 느끼는 기분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 저쪽 공원까지 갔다 와요.”
“너무 멀어서 안 돼.”
건물 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꽤 넓은 공원이 있었다. 병실에서 내려다보면서 벚꽃이 장관이라 가 보고 싶었는데 태욱의 표정이 너무 단호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지 모르잖아요.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너 안 죽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살릴 거야.”
유주는 잔뜩 표정이 굳은 태욱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이제 아이는 20주에 들어섰다. 또 밖에 나올 일이 없을 것 같아 한 말인데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동안 태욱은 그녀가 배가 당겨 인상만 찌푸려도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말은 아이 낳기 전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어요. 혹시 공원까지 가는 게 귀찮아서 일부러 그런 말 한 거 아니에요?”
“…….”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 치사해.”
그녀가 흥, 콧방귀를 끼고 돌아서자 태욱이 조용히 뒤따랐다. 유주는 태욱을 기다렸다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생각해 봤는데 초대할 사람도 없고 이미 혼인 신고도 했는데 결혼식 안 하면 안 돼요?”
“그동안 종주 결혼식을 안 한 적은 없어.”
“그럼 꼭 해야 하는 건가? 아, 혹시 아이 이름 생각해 봤어요? 고민하다 여사님께 여쭤봤는데 우리 둘이 지어 보라고 하셨어요.”
신 비서가 말을 해 주기 전에는 태욱을 닮았다는 게 아들이라고 알려 주는 건지 몰랐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태욱 씨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여사님.”
“그럼 우리 아이도 여사님께 다시 부탁해 봐야겠다. 음, 지금 우리 공원으로 가는 거 같은데.”
“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안 된다고 하더니.”
“돌아갈까?”
“아니요.”
유주는 헤헤 웃으며 태욱의 팔짱을 꼈다. 화창한 봄날, 이제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아무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은 가장 힘들 때 그녀를 찾아왔고 지켜 주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내 사람, 내 사랑.
“나 부탁이 있어요.”
“말해.”
공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유주는 걸음을 멈추고 태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이에요. 나중에 혹시 나와 아이 중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민유주.”
태욱의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한 아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이를 선택해 줘요.”
* * *
태욱은 깊게 잠든 유주를 오랫동안 응시하다 창가로 향했다. 새벽빛이 어스름하게 번지고 있는 세상은 고요했다. 어느새 7월 말, 이제 예정일이 열흘 정도 남았다.
‘아이를 선택해 줘요.’
그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온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고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잠을 잘 수도 없고 어쩌다 잠이 들면 얼굴도 본 적 없는 그의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죽어 가는 꿈을 꾸기 일쑤였다.
“후우.”
태욱은 긴 숨을 토해 내며 다시 유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손을 살며시 잡고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괜찮을 거야.”
수도 없이 괜찮다고 되뇌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았다.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꼭 괜찮아야 한다. 반드시, 꼭!
날이 환하게 밝아 올 때까지 태욱은 유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으으읏.”
씻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유주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유주야. 왜 그래?”
“배가. 윽.”
태욱은 심장이 철렁해서 황급히 비상벨을 눌렀다. 진 여사가 급하게 뛰어 들어오고 잠시 후 간호사가 달려왔다.
“진통이 시작된 거 같습니다. 분만실로 옮겨야겠어요.”
간호사가 다시 뛰어나갔다. 진 여사는 늘 그렇듯 침착해 보였지만 태욱은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유주야. 민유주.”
“태욱 씨. 아악!”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편안하게 자고 있던 유주는 갑작스러운 진통에 고통스러워했다.
“아무 징조가 없었는데 어째서.”
“사모님은 며칠 전부터 느끼셨을 겁니다. 회장님이 걱정하실까 봐 말씀을 안 하신 거 같습니다.”
유주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진 여사가 땀을 닦아 주고 그는 유주의 손만 꼭 잡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유주는 분만실로 옮겼다. 같이 들어가려고 하는 그를 금 원장이 말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여사님도 함께 있으니 이곳에서 기다리셨다가…….”
“곁에 있겠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분만실로 들어갔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진 여사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태욱 씨.”
“나 여기 있어. 곁에 있을 테니까 안심해.”
유주는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박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행이 매우 빠릅니다.”
신경이 바싹 곤두서서 괜찮은 거냐고,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오로지 유주만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젖은 얼굴, 차라리 소리라도 지를 것이지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이 각인처럼 눈에 새겨졌다.
통증을 내게로 가져올 수 있다면, 대신 아파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화가 났다.
“참지 말고 소리 질러.”
“태욱 씨가 더……. 읏. 아파 보여요.”
태욱은 유주의 손을 꼭 잡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주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감정조차 사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자, 이제 숨을 깊게 들이켜고 힘주세요. 한 번 더!”
잠시 후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유주의 몸이 축 늘어졌다.
“회장님 지금입니다.”
진 여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태욱은 유주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팔찌의 기적이 유주에게 닿기를.
유주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치유력과 함께 힘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