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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65화 (66/69)

65화

“전혀 아니에요. 너무 신세를 지는 거 같아 죄송해서 그러죠.”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맛있게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요즘 식욕이 가히 폭발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태욱과 먹는 양이 비슷한데도 수시로 먹을 걸 달고 있다.

배는 살짝 표만 나는 정도인데 먹는 양으로 봐서 곧 굴러다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같이 드세요.”

“전 먹고 왔어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유주는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양상추와 치즈, 딸기, 토마토에 견과류가 들어간 소스는 고소하고 달콤했다.

“으음. 소스 어떻게 만든 거예요? 맛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려드릴게요. 차는 따로 준비를 안 했는데. 아, 이거 드시면 되겠네요. 말린 매화꽃 잎을 우려낸 거예요. 여사님이 넉넉하게 주셔서 외출할 때마다 갖고 다닌답니다.”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차 사장이 가방에서 작은 보온병 하나를 꺼내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랐다.

“사장님 드실 차를 저를 주시면 어떡해요?”

“약속이 취소됐어요. 밖에 한 병 가져다 놨으니 입에 맞으면 드세요.”

“매화꽃 차는 전에 구례 갔을 때 마셔 봤어요. 향이 은은하고 맛이 부드럽더라고요.”

“어때요? 맛이 그때와 같나요?”

“음, 사장님이 주신 차가 더 맛있는 거 같아요.”

“다행입니다.”

소스 향이 강해서 구례에서 마신 차 맛은 느낄 수 없었지만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홀짝홀짝 들이켰다.

“오늘은 간호사도 없네요.”

“많이 괜찮아져서 이제 전처럼 상주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랬군요. 회장님은 이야기가 길어지시나 봅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됐어요. 혹시 태욱 씨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연락할까요?”

“아닙니다. 올 때마다 항상 같이 계셔서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이제 혼자 있어도 된다고 해도 태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진 여사가 있을 때만 병실 밖에서 일을 하고 늘 함께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진 여사가 영매관에 잠깐 들러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 퇴원하면 태욱이 어렸을 때 지낸 영매관을 가 보기로 했는데 가까운 시일에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 아이가 또 발로 찼어요.”

유주는 빙그레 웃으며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좀 전보다 더 강한 느낌이었다. 배를 살살 문질러도 아이의 발길질이 멈추지를 않았다.

“부러울 정도로 행복해 보이네요.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그 사람이 죽고 나서 매일 기도했어요. 그들이 나보다 더 불행해지기를.”

유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연은 그동안 봐 왔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비틀린 입술, 독기를 뿜은 눈빛,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니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왜 저런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오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네요.”

“그게 무슨.”

“그 사람을 죽인 게 강태욱 회장이거든.”

“네?”

너무 놀라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갑자기 돌변한 수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속도 뒤틀리고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겼다.

유주는 황급히 배를 감싸 안고 침대 끝으로 물러났다.

“시작은 그 사람이 했어. 강지만 회장, 강태욱의 할아버지를 그 사람이 죽였거든.”

“…….”

“그 사람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말릴 수가 없었지. 나도 따라가려고. 그 전에 그 사람을 위해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

“태욱 씨가 곧…… 올 거예요.”

“늦었어. 방금 마신 차에 독을 탔거든.”

안 돼! 유주는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고 토악질을 했다. 어떻게든 게워 내려고 했지만 헛구역질만 나올 뿐 소용이 없었다.

* * *

태욱은 옥상 끝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월의 첫 주, 날씨는 좋은데 바람은 싸늘했다. 빈 컵을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재명을 바라보았다.

“그만 내려가야겠어.”

“이제 겨우 10분 조금 넘었어. 간호사와 의사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해?”

“남은 이야기는 안내실 가서 해.”

진 여사가 없어 안내실에 있으려고 했는데 유주가 등을 떠밀었다. 재명도 회사 이야기는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옥상으로 올라왔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알았어. 그럼 확답이라도 하고 내려가. 출근은 언제부터 할 거야? 설마 아이 태어날 때까지 출근 안 할 건 아니지?”

“더 길어질 거야. 1년이나 2년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재명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지만 아이가 태어나도 안심할 수 없어 당분간 유주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내가 최대한 도울 테니까 회사는 당분간 네가 맡아.”

“싫어.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분명히 말하는데 여기서 종주 카드 꺼내지 마.”

“종주가 아닌 사촌이자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더 협박처럼 들려. 상황을 모르지 않지만 내 선에서 해결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거 알잖아. 당장 이번에도 봐. 건설과 항공 쪽에서 문제가 터졌는데…….”

“난 네 결정을 믿어.”

“지금껏 설명한 걸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거야?”

건설은 경기 탓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그동안 만연했던 여러 문제를 이 기회에 손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 쪽은 네 방식대로 처리해. 항공은.”

태욱은 미간을 좁혔다. 건설 쪽은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더 칸 항공은 골치가 아프기는 했다.

지난번 인수 합병했던 항공사와 자꾸 마찰이 생기는 데다 적자 폭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잘라 낼 건 잘라 내야지.”

“그러니까 네가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으면 너도 할 수 있어.”

“아, 몰라. 사장도 억지로 맡았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잠깐.”

태욱은 갑자기 섬뜩한 기운에 휩싸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왜 매번 필요할 때 없는 거야? 짜증 나 진짜.]

그때 들었던 아이의 목소리였다. 태욱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옥상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아이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쏜살같이 복도를 내달려 vip 병동 1호실 문을 열고 응접실을 지나 병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과 옷장을 모조리 열어 보고 침대 아래도 살폈는데 유주는 없었다.

재명과 간호사가 달려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제수씨 어디 갔어?”

태욱은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간호사를 응시했다.

“병실에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스테이션에 계속 있었습니다.”

“병실에 들어온 사람은?”

“몇 번 오셨던…….”

“누구?”

그의 기세에 눌린 간호사가 시퍼렇게 질려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재명이 간호사를 돌려세웠다.

“진정하고 말해 봐요. 우리가 없을 때 다녀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름은 모르고 음식 가져오는 그 여자분이요.”

“차수연 사장?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거 확실합니까?”

“네, 저뿐 아니라 다른 간호사 세 명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나가셨다면 알았을 겁니다.”

“그럼 아직 이곳에 있다는 건데.”

태욱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휴게실은 간호사실을 지나쳐야 하고 vip 병동은 병실이 세 개뿐이다. 유주가 사용하는 병실 외 두 곳은 비어 있다고 했었다.

이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결계를 쳤다는 뜻일 거다.

그가 2호실 재명이 3호실로 향했다.

“민유주!”

침대가 비어 있는 걸 보고 안으로 들어가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어마어마한 기운과 함께 쾅, 굉음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뛰쳐나오자 재명과 간호사가 복도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간호사는 움직임이 없고 재명은 벌떡 일어섰다.

“유주야!”

병실은 엉망이었다. 태욱은 한쪽 구석에 배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는 유주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혔다. 박살 난 유리창을 통해 바람이 몰아쳤다.

다른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유주만 보였다.

벽에 기대 숨을 헐떡이고 있는 유주를 안아 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유주야, 정신 차려.”

“독을 마셨……. 아이를, 제발 아이를.”

태욱은 손가락을 깨물어 유주의 입 속에 넣었다. 한 손에 심장을 대고 치유력을 발휘했다.

금 원장과 간호사가 달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처도 있고 독을 마셨습니다.”

초음파를 확인한 금 원장이 소리쳤다.

“아이가 흥분한 것 같습니다. 사모님한테 손을 떼셔야 합니다.”

미칠 것 같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유주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손을 뗐다.

“독은 회장님 피로 해독이 될 테고 상처는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를 빨리 진정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태욱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유주의 배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좀 전 상황으로 봐서 힘을 쓴 건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차수연이 힘을 방출했다면 유주는 아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심호흡을 하고 유주의 배를 두 손을 감쌌다.

“지켜라.”

네 엄마를,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내 아내를 반드시 지켜라.

네가 흥분하면 엄마가 위험해. 제발 진정하고 유주를 지켜 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아이에게 호소했다. 잠시 후, 아이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후우, 이제 진정이 된 거 같습니다.”

금 원장의 목소리가 들려 천천히 눈을 뜨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초음파 속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있었다.

“유주 괜찮은 겁니까?”

“네, 사모님도 아기도 괜찮습니다.”

심장 박동도 이상 없고 숨소리가 고른 걸 보니 유주는 잠이 든 것 같았다. 내내 함께 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이 생기다니.

병실을 벗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모두 나가세요.”

태욱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유주의 옷을 갈아입혔다. 혹시 상처가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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