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제발 그러기를 매 순간 바라고 있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엔 유주가 아이를 낳고 잘못되는 꿈까지 꿨었다.
꿈인데도 너무 고통스러워 잠에서 깨고도 한참 동안 심장이 아팠었다.
“그동안 식사를 잘 안 하셨다고 해서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해 왔습니다. 혹시 몰라 사모님 드실 건 따로 준비했습니다.”
차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실에 있던 간호사가 나왔다. 태욱은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입니까?”
“사모님이 배가 고프시답니다.”
황급히 병실로 들어가자 유주가 베개에 기대 누워서 그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태욱 씨, 나 배고파요.”
배고프다는 말을 얼마 만에 듣는 건지.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유주 식사해도 되겠습니까?”
“원장님께서 가리는 거 없이 드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간호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본 유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식사 전에 인사를…….”
“식사 먼저.”
태욱은 재명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유주를 일으켜 앉힌 뒤 일단 물부터 마시게 했다.
“어느 거부터 먹을래? 흑임자죽도 있고 전복죽도 있어.”
“지금 같아서는 여기 있는 거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먼저 전복죽부터 먹자.”
재명은 죽을 떠서 유주의 입에 넣어 주는 태욱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알고 있는 강태욱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주변을 살폈더니 진 여사와 간호사도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하고 차 사장만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다들 나가세요. 재명이 너도 나가.”
“아직 인사도 못 했는데 왜 나가래?”
“유주 식사 방해돼.”
다들 나갔지만 재명은 그대로 서 있었다. 이런 재미있는 광경을 언제 또 보나 싶어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천천히 줘. 그러다 제수씨 체하겠다.”
“왜 안 나가고 아직도 거기에 있어?”
“기필코 눈도장 찍고 가려고.”
그가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 내내 태욱이 주는 음식만 받아먹던 민유주가 고개를 돌렸다. 재명은 재킷을 여미며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인사를 하게 되네요. 저는.”
“내가 말했던 박재명 사장이야.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
유주 대신 태욱이 툭 끼어들더니 어서 먹으라며 수저에 죽을 떠서 입에 넣어 주었다. 민유주는 천천히 입을 오물거리며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와, 이 그림 뭐지?
태욱이야 원래 저런 성격이니 그렇다 치지만 민유주는 처음 보는 그를 마치 신기한 상대를 마주한 것처럼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했다.
“유주야. 아.”
“잠깐만요.”
“더 먹어야지. 재명이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
“나 사장님 본 적 있어요.”
“재명이를 언제? 어디서?”
나를 본 적이 있다고? 그는 민유주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재명은 의아해서 태욱과 유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난 오늘 처음 보는데 어디서 나를 봤을까요?”
“신 비서님 핸드폰에서요. 전화 올 때 우연히 봤는데 화면에 사진과 함께 ‘내님 예정’이라고…….”
“잠깐만요.”
그동안 신 비서와 딱 2번 만났다. 그마저도 시간이 없다고 해서 진짜 밥만 먹었다. 그런데 그를 ‘내님 예정’이라고 저장했다는 건 희망이 보인다는 뜻?
재명은 눈빛을 반짝이며 씨익 웃었다.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태욱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됐어?”
“된 게 아니라 될 예정.”
“그 말은 시작은 했는데 남자답지 못하게 아직 뜨뜻미지근한 상태라는 거야?”
“제수씨 앞에서 말 좀 가려서 할 수 없어?”
“내가 누구 눈치 보면서 말할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 잘났다. 어쨌든 난 급하게 가 볼 데가 있어. 제수씨,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인사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식사 잘하시고 얼른 쾌차하세요.”
재명은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차 사장과 진 여사한테 대충 인사하고 복도를 뛰어가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신 비서가 전화를 받지 않아 주차장으로 내려가자마자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 * *
유주는 주는 대로 다 받아먹다가는 배가 터질 것 같아 물을 마시고 고개를 흔들었다.
“더 먹지 왜?”
“죽 한 그릇 다 먹었잖아요. 태욱 씨는 식사했어요?”
“먹었어.”
그동안 식사를 제대로 안 했는지 얼굴이 홀쭉해진 것 같았다. 유주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태욱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얼마 만인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나 때문에 고생 많았죠? 미안해요.”
“나로 인해 네가 그런 힘든 일을 겪었으니 사과는 내가 해야지, 절 견뎌 줘서 고마워.”
그날 상황은 정신을 잃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태욱 또한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준도 그렇고 상훈이 그런 악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훈이는.”
“다시 만날 일 없을 거야.”
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 죽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상훈을 포함 다른 사람들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날 구하러 와 줘서.”
“너무 늦게 가서 미안해.”
“아니에요. 너무 무서워서 태욱 씨가 와 줬으면 했다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그날 일은 전부 다 잊어. 이제 네 몸만 신경 쓰면 돼.”
유주는 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날 병원에 도착해서 태욱이 그녀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
‘분명 민유주 씨는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정신이 없어 대화 내용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만은 똑똑히 들었다.
“태욱 씨가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한 건 나를 걱정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난 아이를…….”
“쉿! 우리 이제 지난 일은 잊어요.”
태욱이 아이를 거부하는 이유도 알고 그녀 또한 겁이 나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한 아이다.
진지하게 서로 대화를 한 뒤 계획을 세우고 임신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기적처럼 찾아와 준 아이를 꼭 지키고 싶었다.
“사랑해요.”
“나도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사랑해.”
유주는 태욱을 꼭 껴안았다. 태욱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 위기를 넘겼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게 가장 무섭고 두려웠다.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요.”
“나도 그래.”
“나 태몽 꾼 거 같아요. 은빛 털이 아주 예쁜 아기 늑대였어요.”
유주는 태욱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처음 꿈에서 본 아기 늑대는 뭔가 불만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었다.
너무 작고 예뻐서 만지고 싶은데 가까이 가는 게 겁이 날 정도였다.
이후에 또 꿈을 꿨을 땐 친근하게 다가와 그녀의 품에 쏙 안겼다. 윤기 나는 은빛 털이 어찌나 보드랍고 따듯한지 계속 쓰다듬어 주다 꿈에서 깨어났다.
“팔찌 기운이 내 몸에 흡수되었다고 하는 말 들었어요. 나 믿어요. 태욱 씨와 함께 우리 아기가 날 지켜 줄 거라고.”
“나도 요즘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도하고 있어.”
“나 졸려요.”
“한숨 자.”
유주는 침대에 누워 베개를 편안하게 받쳐 주는 태욱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좀 더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잠이 쏟아졌다. 귓가에 태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곁에 있을 거라고, 마음 푹 놓고 자라고.
* * *
유주는 침대에 앉아 태교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고 태욱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태욱이 상의 없이 혼인 신고를 했다는 말을 듣고 잘했다고 칭찬했다.
“어?”
유주는 배를 톡톡 차는 느낌에 얼른 손을 가져다 댔다. 태욱과 함께 있을 때도 몇 번 느꼈었다. 손을 배에 가져다 댔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금세 손을 뗐다.
“아가. 잘 있다가 우리 건강하게 만나자. 알았지?”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아이는 곧 얌전해졌다. 그녀는 딱히 모르겠는데 금 원장과 진 여사는 아기가 태욱을 닮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겼다고 했다.
결혼, 아이, 가족. 태욱을 만나기 전엔 꿈꾸지 않았던 일상이었고 아직도 엄마라는 말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엄마, 엄마.”
유주는 조용히 엄마라고 불러 보았다. 언젠가 아이가 그녀한테 엄마라고 부르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마 감동해서 눈물이 날지도 모르겠다.
‘일단 병가 처리해 달라고 했어.’
한동안 정신이 없다가 뒤늦게 회사 생각이 나 걱정을 했더니 태욱이 사정 이야기를 하고 병가 신청을 해 놨다고 했다.
남 부장과 통화는 했다. 상훈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사직서만 달랑 보내고 끝이었다고,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차수연 사장이 들어왔다.
“혼자 계시나 봅니다.”
“오셨어요? 박재명 사장님이 오셔서 잠깐 이야기하러 나갔어요.”
“멀리 가셨나요?”
“아닐 거예요.”
그동안 태욱은 치료를 하지 않을 때도 병원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마침 박재명 사장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에 그녀가 바람도 쐴 겸 나갔다 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금방 오겠다고 하고 나갔으니 아마 옥상이나 병원 근처 산책로에 있을지도.
“점심도 맛있게 먹었는데 뭘 또 이렇게 준비해 오셨어요?”
예쁜 통에 담긴 샌드위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차수연 사장은 괜찮다고 해도 매번 사람을 시켜 음식을 보내거나 가끔 찾아와 이야기를 하다 돌아갔다.
진 여사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느낌은 조금 달랐다. 두 사람 모두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진 여사가 호수라면 차수연 사장은 바다를 연상시켰다.
“약속이 있어 나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 가도 되겠다 싶어 준비했어요.”
“너무 감사한데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혹시 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