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63화 (64/69)

63화

“어떻게 된 거야?”

“원장님도 난감하다고 하시고 여사님이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랍니다. 지금 몸이 너무 약한 상태라 회장님이 하시는 것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유주는 숨소리도 미약했다. 당장 치료를 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태욱은 유주의 손을 꼭 쥐고 신 비서를 차갑게 응시했다.

“상황이 이러면 연락을 했어야지!”

“저도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박 과장과 함께 세 분이 상의를 해 보신다고…….”

“당장 가서 원장님 불러와.”

“실장님이 가셨습니다.”

신 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금 원장과 진 여사. 그리고 박 과장이 병실로 들어왔다.

“누구든 설명하세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치유력을 견디기 힘듭니다. 그리고 민유주 씨는 임신 중입니다.”

임신? 태욱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유주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고 했을 때도 내심 안도는 했지만 준비 없이 안은 적은 없었다.

“잠시 이곳을 보시죠.”

금 원장이 모니터 화면을 볼 수 있게 돌려 주었다. 검은 화면에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처음 확인했을 때보다 아이가 더 자랐습니다. 아무래도 임신 상태에서 힘을 받아서인 것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 힘을 더 받으면 아이도 민유주 씨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태욱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유주가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 때문에 치료를 받을 수가 없단다.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거야? 우리를 죽일 작정이야?]

[서두르지 않으면 곧 죽을 거야. 살려 줘.]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로 살려 달라고 했던 그 목소리. 통증을 같이 느낀다고 하더니 설마 너였던 거냐?

“박 과장, 지난번 검사했을 때 내가 들은 말은 뭐야?”

“제가 몇 번을 확인했고 다른 닥터들과도 확인 후 원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몸 상태로는 임신이 불가능한 거 맞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기적?”

“달리 설명할 방법이……. 문제는 임신 기간을 견딜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자궁이 약한데다 아이 성장 속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게다가 수혈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어찌 된 일이지 민유주 씨 혈액에 저희 종족의 세포가 더 많아졌습니다. 저희 쪽도 평범한 사람 쪽도 불가능합니다.”

태욱은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반란 세력만 처리하면 아무 문제 없을 줄 알았다. 놀란 유주를 달래 주고 당분간 둘이 조용한 곳에서 쉬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눈앞이 캄캄했다.

“금 원장.”

“네, 회장님.”

“아이가 없으면 문제가 없는 겁니까?”

“네?”

“난 유주만 있으면 됩니다.”

넓은 병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팔찌의 효능이 증명되지 않은 터라 처음부터 조심하고 또 조심했었고 단 한 순간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잘못이다. 유주가 다친 것도 자신 때문이고 임신만 아니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손쓸 방법이 없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회장님, 현재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지금 민유주 씨를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건 아이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이가 민유주 씨한테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 속 아이만 믿고 유주를 지켜보기만 하라는 겁니까?”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작은 여자가 어느새 그의 세상 전부가 되었다. 다른 그 무엇도 유주를 대신할 수 없고, 그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유주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태욱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둘 다 살리던가. 유주만이라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회장님.”

금 원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 여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세요. 유주를 지킬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민유주 씨는 팔찌의 주인입니다.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믿을 수 없게도 아이가 힘을 내고 있고 민유주 씨도 꼭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여사님도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좀 전에 이야기를 하다 말았는데, 회장님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진 여사에게 향했다. 태욱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눈빛으로 진 여사를 응시했다.

그때 유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욱 씨.”

“유주야.”

황급히 달려가 유주의 손을 잡았다.

“살려…… 줘요.”

“내가 꼭 살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릴 테니까 날 믿어.”

“우리 아이. 아이를 꼭.”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유주의 눈이 스륵 감겼다. 금 원장이 다가와 청진기를 대 보고 주사약을 링거 줄에 투여했다.

태욱은 유주를 애타게 쳐다보다 진 여사를 향해 돌아섰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전에 다쳤을 때 했던 방법과 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힘을 아주 약하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한 손은 심장에 다른 손은 배 위에 올려놓고…….”

일주일에 이틀씩 두 달은 계속해야 한다고, 두 손의 힘이 같아야 하며 절대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만 하면 유주가 무사할 수 있는 겁니까?”

“힘의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방법이 있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구 실장이 잽싸게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았다. 태욱은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도 몇 개 풀었다. 심호흡을 하고 유주의 배와 심장에 손을 올려놓았다.

* * *

태욱은 잠시도 유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주는 약 때문인지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한 달쯤 지나서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태욱 씨.”

“나 여기 있어.”

“물 좀.”

“잠시만.”

컵에 물을 따라서 유주의 몸을 살짝 일으켜 주었다. 반쯤 따른 물을 다 마시더니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태욱 씨 괜찮아요?”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할 말이 많은데.”

“나중에 해. 그때 다 들어줄게.”

“사랑해요.”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알지?”

유주는 다시 잠이 들었다. 태욱은 유주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그나마 잠깐씩 눈을 뜨고 목소리를 들어 안심이 되기는 한데,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 치료를 시작한 지 2달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12주에 접어든 아이는 성장 속도가 빠르기는 해도 유주가 잘 견뎌 주고 있다고 했다.

“여사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던데, 원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몸도 좋아지셨고 아이도 안정적입니다. 이 상태가 유지된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태욱은 초음파 모니터 화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엔 유주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달갑지 않은 마음이 컸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팔찌의 기운이 온전히 흡수됐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이를 낳고 난 후의 상황이 걱정되고 불안한 건 여전했다. 진 여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팔찌의 효능은 확인된 게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두려웠던 적이 없었는데, 유주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걸 지켜보면서도 매 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태욱은 금 원장이 상주하는 간호사에게 짧게 지시를 하고 나간 뒤 창가로 향했다. 2월의 첫날,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재명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너도 볼 겸 겸사겸사.”

“날 왜?”

“사실은 네가 식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신 비서가 가 보라고 해서 왔어.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식사는 해야지.”

“회사 일이나 신경 써.”

“안 그래도 뾰족한데 더 뾰족해졌네. 제수씨가 네 얼굴 보고 아무 말도 안 해? 절대 안정해야 하던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나가.”

“할 말이 있어. 네가 잠깐 나와.”

그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재명이 한숨을 쉬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나가라고 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아 간호사에게 부탁한다고 한 뒤 재명을 지나쳐 걸었다.

“제발 내 조카가 널 닮지 말아야 할 텐데.”

“입 다물어.”

태욱은 몇 걸음 걷다 말고 재명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재명이 두 손을 반짝 들어 올렸다.

밖으로 나오자 차수연 사장과 진 여사가 와 있고 테이블에 커다란 종이 가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차수연 사장이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소식은 진작 들었는데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여사님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나 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앞으로 회장님 식사와 민유주 씨 아니 사모님 식사는 제가 맡겠습니다.”

“전 됐고 유주 식사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재명도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진 여사와 차 사장이 음식을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와우, 진수성찬이 따로 없네.”

재명의 호들갑에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근데 제수씨는 혼인 신고 한 거 알아?”

오로지 유주만 걱정하느라 생각 못 했는데 진 여사를 포함한 모두가 혼인 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결혼을 할 생각이었으니 서류를 준비해 오라고 했었다. 2주가 지난 지금까지 아직 유주한테 말은 못 했다.

“좋아할 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아, 그리고 결혼식 준비는 아버지가 알아서 한다고 하셨어. 물론 나도 누구 때문에 엄청 바쁘지만 적극적으로 도울 거고.”

“결혼식은 나중에. 지금은 유주 건강이 우선이야.”

“이런 말 낯간지러워서 안 하려고 했는데 네 지극 정성에 하늘이 감동해서 내 조카도 제수씨도 건강할 테니까 걱정 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