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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59화 (60/69)

59화

유주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겨우 일어나 앉았다.

“상훈아, 너 괜찮아? 다친 곳 없어?”

다급하게 묻는 말에 상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유주는 빠르게 상훈을 살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묶여 있는 그녀와 달리 차를 마시고 있었는지 테이블에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네 걱정을 어찌나 하던지 눈물 날 뻔했어.”

이준이 빈정거리며 상훈의 옆자리로 가 앉아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씨익 웃었다. 유주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멍청하게 눈만 껌벅거렸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상훈이 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필 선배라서 안타깝기는 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준 형이 눈치를 주었을 때 현명하게 행동했으면 좋았을 텐데, 남자한테 눈이 멀어서 사리 분별을 못 한 선배 탓이라는 뜻이에요.”

“네가 말한 형이라는 사람이.”

“강태욱은 내가 죽일 거야. 좀 더 일찍 죽이고 싶었는데 누가 그러더라고. 가장 행복할 때가 적기라고.”

유주는 상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상훈은 동생 같고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말투도 눈빛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너도 혹시…… 무족이야?”

“강 회장이 내 이야기는 전혀 안 했나 봐요. 하기는 그동안 내가 너무 얌전히 있기는 했지.”

상훈도 무족이었구나. 놀라기는 했지만 충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상훈이 왜 태욱을 죽이겠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강태욱이 가진 전부를 내가 가져오려고. 그동안 그 집안에서 충분히 누렸으니 이젠 주인이 바뀔 때가 되었지.”

“상훈아, 정신 차려.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

갑자기 상훈이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이준도 차를 마시며 피식거렸다.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상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발목에 묶인 끈을 풀었다. 손목도 풀어 주더니 팔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아직도 내가 말 잘 듣는 착한 후배로 보여?”

* * *

유주는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가 알던 상훈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는 나를 이해 줘야 해. 설마 가진 거 없이 살던 사람들은 계속 바닥만 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선배도 그동안 강태욱 덕에 누리고 살았잖아. 난 그러면 안 돼?”

“상훈아,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을…….”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야. 다시 말하지만 선배라서 안타깝기는 한데 그동안 내가 많이 도와줬으니까 이번엔 선배가 희생해.”

그녀의 양손을 잡은 상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푸른빛으로 돌변했다. 팔찌를 한 손은 아무렇지 않은데 반대편 손목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유주는 팔이 타들어 가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아, 미안. 곧 내 세상이 된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돼서.”

상훈은 유주의 손을 놓고 일어나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의자를 끌어왔다. 잔뜩 겁먹은 표정인 유주를 보며 방긋 웃었다.

“선배, 앉아요.”

“…….”

“내가 안아서 앉힐까요?”

유주는 끙끙대면서도 몸에 손대는 게 싫은지 비틀거리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상훈은 그 옆 바닥에 털썩 앉았다.

“강태욱이 선배를 찾으러 올 거 같아요?”

“…….”

“지금쯤이면 장례식장에 우리가 없는 걸 알았을 테고, 멍청한 신 비서는 아마 강태욱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태욱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강태욱을 너무 모르네. 그동안 강태욱의 손에 죽은 목숨이 몇인 줄 알아요?”

강씨 집안은 그 긴 세월 종주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들에게 반하는 자들에게 용서 따위 없었다.

반란이 종족의 진심 어린 목소리라는 걸 절대 인정하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오래전 일까지 거슬러 갈 필요 없이 강지만 회장 사건 때 강태욱 손에 죽은 자들만 수십 명이다.

“난 선배가 현실적이어서 좋았어요.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꿋꿋이 노력하는 모습도 예뻤고. 왜 하필 선배가 팔찌 주인이 된 건지. 우리 인연이 여기까지라서 아주 조금은 슬퍼요.”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태욱 씨와 대화를 해 보는 건 어때?”

“대화하면 강태욱이 아, 그렇구나. 그럼 너 다 가져. 그럴 거 같아요?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그 팔찌 내가 빼 줄까요? 신경 쓰인다고 했었잖아요. 원한다면 내가 해결해 줄게요.”

“불가능하다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손목을 자르면 돼요.”

유주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손목을 자르다니, 설마 상훈이 그런 짓을 할 거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동안 봐 왔던 모습과 너무 달라 충격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싫어요?”

“괘, 괜찮아. 이젠 아무렇지 않아.”

“그러지 말고 부탁해요. 선배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거 알잖아요.”

“싫어. 가, 가까이 오지 마.”

상훈이 불쑥 그녀의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선하게 웃었다. 유주는 황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웃는 모습이 악마처럼 보여 끔찍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선배가 싫다면 굳이 수고할 생각은 없어요.”

상훈의 손이 그녀의 턱을 스윽 만지고 물러났다. 그 짧은 접촉에도 소름이 돋았다.

“선배.”

“…….”

“대답해야죠. 난 선배가 부르면 늘 쪼르르 달려갔는데 대답을 안 하면 화나잖아요.”

“말, 말해.”

다시 바닥에 앉은 상훈이 그녀의 오른 손목을 잡고 손가락을 하나씩 툭툭 건드렸다.

“강태욱이 언제 올지 맞혀 봐요.”

“오지 않을 거야.”

“올 거예요.”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텐데…….”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아서 민 엔터테인먼트 사장님한테 이준에게 관심 보이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니 이곳 위치를 살짝 흘리라고 했어요. 아니면 커밍아웃한다고 협박했거든.”

“…….”

“내가 아는 형, 반짝반짝 빛나는 애인. 같은 사람인데 설마 아직 눈치 못 챈 거예요?”

유주는 상훈과 이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시간에 손가락 하나씩.”

“그, 그게 무슨. 아악!”

새끼손가락이 뒤로 확 꺾였다. 지독한 통증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녀가 손을 감싸려고 하자 상훈이 왼쪽 손을 재빨리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선배를 좋아하니까 손가락을 자르지는 않을게요. 혹시 중간에 마음이 변할 수는 있어요.”

“제, 제발 이러지 마.”

그때 이준이 성큼 다가왔다. 뭔가 못마땅한 게 있는지 상훈을 홱 밀치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동시에 오른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아아악!”

유주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아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어렴풋이 상훈이 점잖게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해. 너무 일찍 죽으면 안 되잖아.”

“미끼면 미끼답게 대우해. 둘이 시트콤 찍어?”

“설마 질투하는 거야?”

“야, 이상훈!”

“형, 선 넘지 말라고 했잖아.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거야?”

“네가 너무 민유주를 곱게 대하잖아.”

“안 그래도 착한 후배 짓은 그만하려고 했어. 난 한숨 잘 테니까 이제부터 형이 알아서 해. 너무 괴롭히지 말고.”

상훈이 방으로 들어간 뒤 이준이 냅다 그녀의 뺨을 갈겼다. 볼에 불이 붙은 것처럼 아팠지만 손목의 통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훈이한테 꼬리 치면 그땐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

미친 새끼, 상훈도 이준도 단단히 미쳤다.

유주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 * *

태욱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감악산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지고 출입 금지란 팻말과 함께 도로를 막아 놨다.

[왜 이렇게 꾸물대는 거야? 우리를 죽일 작정이야?]

단단히 잠긴 철문을 훌쩍 뛰어넘어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우뚝 서서 주변을 살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주변은 칼바람만 불었다.

[누구냐?]

[나도 통증을 같이 느껴서 미칠 것 같단 말이야.]

어린아이의 목소리인데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다.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근처라면 유주의 존재가 느껴져야 하는데 전혀 없고 꼬마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곧 죽을 거야. 살려 줘.]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태욱은 지체 없이 높이 솟아올랐다. 주변을 살피자 저 멀리 집 한 채가 보였다.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불이 켜진 건물은 1층이었다. 정원 앞에 서자 유주의 체취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건물 안에 있다면 존재감이 뚜렷해야 하는데 피 냄새가 워낙 진해서 선명하지가 않았다.

태욱은 안으로 들어가려다 우뚝 멈춰 섰다.

“나와라.”

건물 옆에서 이준이 싱글싱글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종주가 오셨네.”

“유주는 어디 있지?”

“당연히 안에 있죠. 설마 이 추운 날 밖에 뒀겠어요?”

유주의 안전을 확인하는 게 먼저라 돌아섰다. 그때 핑, 소리와 함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태욱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돌아섰다.

“운도 좋으셔라. 친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냥 가면 안 되죠.”

“너 따위가 감히 내 앞을 막겠다는 거냐?”

“화가 많이 나셨나 본데 나도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아요. 내 남자가 그쪽 여자를 너무 챙겨 주는 거 같아서. 그 꼴을 보고 있는 내 기분이 어떻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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