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일산에 있는 장례식장이요. 저녁 같이 먹기로 했는데 미안해요.
“어쩔 수 없지. 장소 나한테 문자로 보내. 내가 신 비서한테 연락할게.”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신 비서님은…….
“당분간은 어쩔 수 없다고 했잖아.”
-알았어요. 상훈이가 와서 전화 끊을게요.
잠시 후 문자가 들어왔다. 신 비서와 짧게 통화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상훈이는 동생 같은 후배예요. 나를 많이 도와주는 진짜 좋은 후배.’
유주는 성격이 밝은데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친한 친구는 파리에 있고 회사 이야기를 할 때면 이상훈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니 질투를 할 수밖에.
집에 도착해서 아주머니가 준비해 놓은 음식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밤 10시, 재명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태욱은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혹시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니지?
“혼자야.”
-왜?
“일이 많은가 봐. 민준혁 사장 만난 건 어떻게 됐어?”
-연천 감악산 근처에 이준이 가끔 가는 곳이 있대.
“연천?”
-민 사장도 이준이 변장을 하고 다니는 걸 알고 있는 눈치야. 일본에서 찍힌 사진도 여자와 이상한 관계일까 봐 신경 쓴 게 아니라 괜히 소문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연천 어디인지 주소 알아?”
-정확한 주소는 말하지 않았어. 입구에서 꽤 떨어졌고 근처에 그 집밖에 없다니까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아.
태욱은 어차피 유주가 이 시간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금방 오지 않을 것 같아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타서 내비에 감악산을 쳤더니 입구가 여러 곳이었다.
그중 연천 쪽 주소를 클릭하고 차를 출발했다.
-지금 가서 확인할 거야?
“출발했어.”
-나도 그쪽으로 갈까?
“혼자 가도 돼.”
-혼자 보다는 둘이 찾는 게……. 확실한 건 아닌데 그곳에서 이준이 만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여자가 아니면 남자를 몰래 만난다는 거야?”
-그래서 민 사장이 소문날까 봐 쉬쉬한 거 같아.
당분간 스케줄이 없었는데 오늘 광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연락을 안 받는 걸 보면 그곳에 있을 것 같은데 사생활을 알고 있다는 걸 알면 난리 칠 거 같아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왜 여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끝에 훈이라는 이름이 나왔거든.
“훈?”
-보통 여자 이름에 훈은 잘 안 들어가잖아. 확실한 건 아니고 느낌상 그래.
훈, 훈이라. 태욱은 신호가 바뀌려고 하는 순간 속도를 더 높여 교차로를 통과했다.
-일단 나는 이준 주변에 훈이라는 이름이 있는지 찾아볼게.
“몰래 만나고 있었다면 찾기 쉽지 않을 거 같은데, 민 사장한테 더 알아볼 수 없어?”
-지금까지 민 사장이 소속 배우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한 건 처음이야. 지난번 일본에서 술 마시다 언급한 것 때문에 마지못해 했을 거야. 더 이상은 무리야.
“알았어. 나중에 다시 통화해.”
신 비서한테 전화가 걸려 와 황급히 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주 출발했어?”
-아직입니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혹시 회장님께 연락 온 게 있나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연락 없었어.”
-장례식장 도착해서 제게 들어오지 말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근데 좀 이상해서요. 외진 곳이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동안 장례차 한 대 외에 들어가고 나간 사람도 없고.
“전화 끊지 말고 지금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핸드폰을 통해 뭔가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 비서, 무슨 일이야?”
-불은 켜져 있는데 직원도 없고 빈소가 모두 비어 있습니다.
“유주는?”
-이상훈도 민유주 씨도 없습니다. 입구도 하나뿐이고 나가는 걸 보지 못했는데.
“장례차. 이상한 점 없었어?”
-건물에서 나올 때 잠깐 봤는데 운전자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운전자 얼굴은?”
-얼핏 보기는 했는데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 확인 못 했습니다.
태욱은 핸들을 거칠게 내리쳤다. 유주가 장례식장에 없다. 이상훈도 사라졌다. 빈소가 모두 비어 있다는 건 무슨 의도인지 모르지만 이상훈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공간이 있는지 주변 샅샅이 뒤져 보고 유주 찾으면 바로 전화해.”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당장 유주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아 차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재명이 한 말이 떠올라 급하게 차를 멈췄다.
‘말끝에 훈이라는 이름이 나왔거든. 보통 여자 이름에 훈은 잘 안 들어가잖아.’
설마 그 훈이 이상훈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이상훈은 그동안 의심 갈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유주가 팔찌의 주인이 되기 전부터 가까이 있었고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만약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손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텐데, 가끔은 흑심을 품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유주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조두명, 이준, 최현성.”
조두명은 이준의 집 지하실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외 주변 누구와도 접점이 없다. 오랫동안 도움을 받은 최현성은 ‘그자’의 정체조차 모른다고 했었다.
“서로를 모르게…….”
조두명 혹은 그자가 주변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이상훈도 그쪽이라면. 그동안의 행동으로 봐서 아닐 것 같지만 혹시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 다시 연천으로 차를 돌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구 실장 어디야?”
-박재명 사장님과 통화하고 지금 연천으로 가는 중입니다.
“유주가 사라졌어.”
-네? 그게 무슨.
“자세한 이야기는 신 비서한테 듣고 연천으로 오지 말고 그쪽으로 가.”
태욱은 전화를 끊고 속도를 최대한 높였다. 그동안 이준이 변장을 하고 다닌 탓에 누구를 만나고 다녔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만약 이준과 이상훈이 서로 연관이 있다면 유주가 위험하다.
“유주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죽여 버리겠다. 저 깊은 곳에서 걱정과 염려 불안 그리고 분노가 들끓었다.
* * *
유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이 온통 시커멨다. 몇 번 눈을 껌벅이고 나서야 얼굴에 뭔가 쓰여 있다는 걸 알았다. 손도 뒤로 묶이고 발목도 끈으로 묶여 있었다. 어찌나 꽉 묶어 놨는지 풀려고 하면 살갗이 벗겨져 쓰리고 아팠다.
“누구 없어요? 상훈아? 상훈이 거기 있니?”
상훈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들어갔을 때 맨 끝에 있는 빈소까지 비어 있는 걸 봤었다. 직원도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옮긴다고 했으니 아직 준비가 안 된 거라고 생각했다.
‘선배,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와야지, 내가 너 혼자 보냈겠냐고. 그 말을 하기 전에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상훈이 그녀를 부축하고 무슨 말을 더 한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상훈아. 이상훈!”
상훈은 어떻게 된 걸까.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걱정도 되고 무섭고 두려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그나마 신 비서가 장례식장까지 따라온 걸 봐서 안심이 되기는 했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천 사이로 흐릿한 빛이 느껴졌다.
“상훈이니?”
대답은 없고 다가오는 발소리만 들렸다. 유주는 움찔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당신 누구야? 나와 같이 있던 사람 어디 있어?”
“다른 사람을 걱정할 처지가 아닐 텐데.”
“혹시 이준 배우?”
얼굴에 쓰여 있던 복면이 훅 벗겨졌다. 유주는 눈이 부셔서 인상을 찌푸리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환하게 웃는 있는 이준이 보였다.
“딩동댕.”
“여기가 어디예요? 나를 왜 이런 곳으로 데려왔어요?”
“그러게 내 충고를 새겨들었으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쯧.”
“…….”
“강태욱은 위험한 자라고 도망가라고 했잖아요.”
태욱한테 이준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런 짓까지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쨌든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궁금한 건 풀렸을 테고.”
“날 보내 줘요.”
“그건 안 되겠는데.”
이준은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차갑고 냉랭했다. 유주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으윽.”
차라리 확 토했으면 좋겠는데 나오는 건 없었다. 한참을 구역질을 했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속이 안 좋은가? 아니면 혹시 임신?”
“상훈이는 어디 있어요?”
“곧 알게 될 거야. 근데 상훈이가 그렇게 걱정돼?”
“상훈이는 아무 상관 없잖아요. 보내 줘요.”
무섭고 두렵지만 그녀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상훈까지 나쁜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신 비서는 어디 있는 걸까. 태욱도 알고 있을까?
유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인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고 텅 비어 있었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이 모든 건 민유주 씨가 선택한 거니까 억울해하지는 말고.”
“…….”
“살려 달라고 안 하네?”
“나를…… 죽일 건가요?”
“글쎄.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서.”
유주는 이를 악물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불현듯 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통증.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참 침착하단 말이야. 질질 짜지 않아서 마음에 들기는 한데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니니까 원망은 말고.”
“이런 짓을 한 걸 태욱 씨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우리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거든.”
이준이 씨익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넓은 거실 소파에 상훈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