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차 문을 열자 휘이익, 찬 바람이 몰아쳤다. 진 여사는 진주가 건네는 가방을 받아 들고 돌아섰다.
“여사님, 전화 주시면 모시러 올게요.”
“알아서 갈 테니까 걱정 말고 그만 가 봐.”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곧장 정원을 가로질렀다. 여느 때라면 직원이 달려왔을 텐데 다리를 건널 때까지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식당 문까지 닫은 건가?”
진 여사는 잠시 멈춰 서 주변을 둘러보다 걸음을 서둘렀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연락을 주고받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얼굴 본 지도 좀 됐고 궁금해서 전화했더니 차수연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수연과 인연이 닿은 지는 오래됐다. 영매는 사적인 감정을 자제해야 하지만 처음 강지만 회장과 이곳에서 식사를 한 후 수연과 꾸준히 연락을 하면서 지내 왔다.
별채에 도착해 노크를 해도 인기척이 없었다.
“저 왔습니다.”
거실이 텅 비어 있어 들고 온 매화차를 한쪽에 내려놓고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침대도 아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차수연이 보였다.
“차 사장, 무슨 일입니까?”
늘 반듯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정신이 반쯤 나간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철렁해서 황급히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이기에.”
“내가 잘못 산 걸까요? 큰 욕심 부린 적 없어요. 난 그저, 내가 원한 건…….”
수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 여사는 수연을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자 서럽게 눈물을 토해 냈다.
“그마저도 욕심이었는지 기어이, 기어이……. 흑.”
도대체 수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정을 모르니 섣불리 위로의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수연은 한참 동안 피를 토하듯 울음을 터트렸다.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서럽게 울던 수연이 살며시 고개를 들고 젖은 얼굴을 손으로 훔쳤다.
“여사님한테 추한 꼴을 보였네요. 더 흘릴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여사님 보니까 감정이 복받쳐서.”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참는 게 능사는 아니지요. 차 한 잔 마실까요?”
“네. 금방 나갈게요.”
밖으로 나와서 차를 준비하는 동안 옷을 갈아입은 수연이 거실로 나왔다. 진 여사는 차 두 잔을 준비해서 테이블로 향했다.
“매화차네요.”
“올해 말린 게 향이 좋아서 조금 가져왔어요.”
“잘 마시겠습니다.”
진 여사는 차를 마시는 수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거의 비워질 때까지 수연은 말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어요.”
“저런.”
“다정하지도 않고 무뚝뚝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좋은지.”
“차 사장한테 그런 분이 있었군요.”
전혀 내색을 한 적이 없던 터라 오랜 시간 봐 왔어도 수연에게 그런 존재가 있는 줄은 몰랐다. 진 여사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전에 여사님이 인연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셨지요. 그날 이후 매일 기도했어요. 우리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더 욕심내지 않을 테니 제발, 제발. 그런데 결국 이렇게 끊어 버리네요.”
“…….”
“여사님 말씀이 맞는다면 아마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겠죠.”
무족이 아닌 민유주가 팔찌의 주인이 됐을 때, 진심으로 태욱과 맺어지기를 바라서 수연에게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을 했었다.
당시 태욱이 팔찌 주인인 민유주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아 그녀의 바람을 담아 한 말인데,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아니면 이 또한 하늘의 뜻일까요?”
“차 사장.”
“사실 인연이 아닌 줄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미련하게 놓지 못한 내 잘못이겠죠.”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뭐든 말해요.”
“이렇게 와 주시고 하소연 들어주신 것만으로 많은 위로가 됐습니다. 곧 괜찮아질 테니 걱정 마세요.”
“식당 문을 닫은 거 같은데 당분간 영매관에서 저와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며칠 쉬려고 직원들 휴가를 보냈어요. 저도 바람 좀 쐴 겸 여행을 다녀올까 생각 중입니다.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마음 같아서는 선뜻 그러자고 하고 싶은데 반란 세력 중 한 명인 조두명이 죽었고, 이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수연의 상황도 안타깝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고 해도 지금은 영매관을 비울 수는 없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안 될 거 같습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돕겠습니다.”
“지금은 차 사장만 생각하세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마음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요. 말씀해 주세요.”
진 여사는 빈 찻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실체가 드러나면 태욱이 알아서 해결하리라 믿지만 수연은 입도 무겁고 실력이 상당해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드디어 팔찌 주인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도 그녀와 똑같은 마음으로 기뻐했고, 그때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달라고 했었다.
“사실은 종주를 해하려는 자들이 있어요.”
* * *
태욱은 노크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구 실장이 들어와 찻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달랑 3일 쉬고 출근했을 때만 해도 한쪽 볼이 살짝 표가 나더니 지금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몰라볼 정도다.
“이준은 아직이야?”
“매니저도 모른다고 하고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숨어 있지는 않을 텐데.”
벌써 이준이 사라진 지 열흘이 지났다. 어쩌면 변장을 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이 바싹 탔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당분간 스케줄이 없답니다. 혹시 외국으로 나갈지 몰라서 손은 써놨습니다.”
“이준 오피스텔 맞은편 집이 오랫동안 비어 있다고 했었지?”
“네. 집주인이 외국에 있는데 연락이 안 되고 3년 넘게 비워 둔 상태입니다.”
오피스텔과 파주 집에서 여자 용품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매니저 집도 아니면 다른 장소가 있다는 건데, 태욱은 턱을 느리게 쓸었다.
“가서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구 실장이 나가고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렸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었어. 앉아.”
“방금 아버지 만나고 오는 길이야.”
“말씀드렸어?”
“조두명 이야기 듣고 많이 놀라신 거 같아. 자책도 하시고.”
“외삼촌 잘못 아니야.”
“나도 그렇게 말씀드리기는 했어.”
조두명을 비서실에 추천한 사람이 외삼촌이라고 했다. 사표를 냈을 당시 직접 설득까지 했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두명의 존재를 알려야 할 것 같아 재명에게 직접 다녀오라고 했다. 혹시 정보가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고.
“아버지 말씀이 조두명이 회사를 떠났던 시기에 몇 명이 같이 나갔대. 1년도 안 돼서 다 죽었다는데 이유는 3명 빼고 원인 불명.”
“몇 명이나 되는데?”
“8명.”
“조두명 짓인가?”
“3명은 강지만 회장님 사건 때 죽었고 나머지 다섯은 조두명이 죽었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어. 이준은 찾았어?”
“아직.”
매니저도 스케줄이 없을 땐 이준이 파주나 오피스텔에서 조용히 지낸 걸로 알고 있었다. 개인 핸드폰도 해지했고 친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믿는 건 민준혁뿐인데, 도통 입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민준혁 사장 이따 만나기로 했어. 그건 그렇고 아버지와 식사하고 나오다 노진성 어른을 만났어. 같이 차를 마셨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아.”
또 결혼 이야기가 나왔겠지. 알아서 한다는데 왜 그렇게 귀찮게 하는 건지, 어제 전화가 오는 걸 받지 않았다.
“진짜 팔찌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돈 것도 그렇고, 지금 원로들은 그게 가짜 소문이라고 알고 있다는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냈다는 거야?”
“가짜라는 소문이 퍼진 건 다행이기는 한데 느낌이 왠지…….”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이준을 찾는 거야.”
당장 코앞에 닥친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소문의 진원지와 의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태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봐. 민준혁 사장 만나면 최대한 알아보고.”
“그래야지. 민유주 씨는 별일 없지?”
“앞으로도 별일 없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아버지도 걱정 많이 하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태욱은 재명이 나간 뒤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준은 어디에 숨은 걸까.
이준이 주동자일 리 없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조두명이 믿는 자가 있는 게 확실한데 그게 누군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 * *
맞은편 오피스텔을 이준이 사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의 예상이 맞았다. 방 하나에 열쇠가 다섯 개나 달려 있다고 했다.
‘그 방 말고는 모두 비어 있고 여자로만 변장하고 다닌 게 아닌 거 같습니다.’
후우, 태욱은 답답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신 비서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아직 안산이야?”
-네, 방금 문자를 보내왔는데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답니다.
“또 어디?”
-장소는 말하지 않았고 일행과 함께 움직일 것 같습니다.
“일행이면 이상훈?”
-네.
원래 안산은 신입 직원이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이상훈과 동행한다고 했었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유주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태욱 씨, 미안한데 나 오늘 늦을 거 같아요.
“일이 많아?”
-상훈이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방금 연락이 왔어요. 일가친척도 없는데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요.
유주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태욱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