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오늘 일도 많은데다 회식까지 했잖아요. 먼저 씻고 싶어서 그랬지 거절한 거 아니에요.”
“그냥 한 말이야. 술 많이 마셨어?”
“두 잔 반. 태욱 씨는 바쁜 일 잘 해결됐어요?”
태욱이 수건을 벗기고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평소에도 함께 목욕을 하면 씻겨 주고 닦아주고 머리를 말려준 뒤 침대까지 안아서 데려다주곤 했었다.
“왜 말을 안 해요? 잘 안 됐어요?”
“한동안 골치 아플 거 같아.”
“어떡해요?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요?”
“있지.”
“뭔데요?”
“나 많이 사랑해 주는 거.”
유주는 피식 웃으며 태욱의 입술에 입을 쪽, 쪽 맞췄다. 수건을 바닥에 던진 태욱이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빗어 내렸다.
“앞으로 신 비서가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또 그런다. 신 비서님 좋은 분인 거 알지만 운전을 아예 맡기는 건 불편해요. 가만,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혹시 팔찌…….”
“네가 아니라 나야.”
유주는 너무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태욱이 그녀한테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 씨, 괜찮은 거예요?”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만일을 대비해서 신 비서가 곁에 있는 게 좋겠어. 부담된다면 운전은 네가 하고 근처에서 지켜보라고 할게.”
“태욱 씨 생각이 그렇다면 일단 운전은 내가 하는 걸로 할게요.”
“당분간 일정은 신 비서와 공유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누군지 알고 있는 거예요?”
태욱은 유주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 볼을 어루만졌다. 유주에게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준의 오피스텔이 텅 비어 있었다.
무려 열 명이 넘는 경호팀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cctv도 이준을 연상시킬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준.”
“이준…… 배우가 왜요?”
유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태욱은 날카롭게 유주를 살폈다.
“혹시 이준에 대해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 있어?”
“…….”
“있군.”
“지난번 만났을 때 본인이 무족이라고 말했어요.”
“또?”
“비밀 지키겠다고 약속을 해서 말을 안 했는데 사실은 이준 씨가 팔찌 이야기를 했었어요. 내가 팔찌 주인이 아니라면 태욱 씨가 곁에 두지 않았을 거라고. 믿지 않았는데 별장 갔을 때 태욱 씨 행동이 오해를 불러왔고요.”
태욱은 유주의 어깨를 잡고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가 종주인 것도 이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단다.
“팔찌에 대해서 자세히 말은 안 했고 무족의 희망, 나한테 불행이라는 말만 했어요.”
“그게 다야?”
“할아버지를 태욱 씨가 죽였다고,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어요. 물론 난 태욱 씨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믿어요.”
“내가 24살 때 반란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으셨어. 우리 종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야. 그때 내가 놓친 자가 있다는 걸 오늘 알았어.”
“혹시 할아버지를 죽인 자를 만난 거예요? 태욱 씨 괜찮아요?”
유주는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살피더니 다친 곳이 있는지 손으로 몸을 더듬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그의 안에 유주의 존재가 너무 커 버려서 가끔은 겁이 날 정도였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그였는데, 이렇게 작고 귀여운 여자가 그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어. 내 말 믿어도 돼.”
“태욱 씨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거 믿어요. 오늘 신 비서님도 그랬어요. 그 누구도 태욱 씨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믿는데 걱정은 돼요.”
“너만 안전하면 아무 문제 없어. 걱정할 거 같아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 일은 알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말해 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나도 알고 있는 게 맞아요.”
태욱은 유주를 품에 꼭 껴안았다. 일단 이준을 찾는 게 급선무다. 아무리 변장을 한다고 해도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겠지.
아무 걱정 없이 유주와 행복하고 싶은데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다.
“태욱 씨, 이리 와요.”
유주가 무릎에서 내려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침대에 눕게 하더니 몸을 바싹 붙이고 그의 얼굴을 감쌌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다칠 일 없고 설사 다친다고 해도 치료하면 돼.”
“통증은 느낀다면서요. 태욱 씨가 아픈 거 싫어요.”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사랑해요.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런 능력은 없고. 눈 감아요. 안아 줄게요.”
유주는 태욱에게 팔베개를 해 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다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태욱이 걱정할까 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억이 돌아온 후 불안하기는 했었다.
그래서 외부 활동은 절대 혼자 나가지 않았고 퇴근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혹시 이준 배우도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런 거 같아.”
“그런 줄도 모르고.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요.”
“더 할 말은 없어?”
“생각나는 건 다 말했어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 같은데 혹시 연락 오면 태욱 씨한테 말할게요.”
노트북에서 본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무족은 무족만의 법과 규칙이 있고 종주의 권한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 못 할 수준까지 가능하다고 했었다.
종주인 태욱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지금 나 재우려는 거야?”
“잠이 보약이래요.”
“내 보약은 잠이 아닌데.”
태욱이 그녀의 입술을 깊게 물어 삼키고 혀로 입 안을 진득하게 핥았다. 집에서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었는데 태욱이 원하는 건 다른 것 같았다.
몸이 바로 눕혀지고 커다란 몸이 내리눌렀다.
“다시 말하지만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조심 또 조심할게요.”
“그럼 이제 보약을 먹어 볼까?”
가운을 확 젖힌 태욱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응시했다. 눈빛만큼이나 그녀를 만지는 손과 입술도 뜨거웠다.
유주는 눈을 감고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언제나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혹시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서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알아요.”
이후에 시간은 언제나처럼 폭풍처럼 몰아치는 쾌감의 연속이었다.
태욱은 끝도 없이 파고들었다. 마침내 그가 멈췄을 때 유주는 축 늘어졌다.
* * *
상훈은 침대에 엎드려 잠든 이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식탁에 빈 양주 병만 있는 걸 보면 안주도 없이 마신 것 같았다.
“어지간히 속이 탔나 보네.”
대화가 불가능한 것 같아 시트를 덮어 주고 작은 방으로 향했다. 창가에 있던 커다란 유리 상자 안에 화분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제 이것도 필요 없겠네.”
지극 정성으로 돌봐서 줄기와 이파리를 말린 후 조두명에게 건넨 지 10년이 넘었다. 어느 날 부친이 그를 시설에 맡기고 사라진 후 남은 건 독기뿐이었다.
결국 적응 못 하고 뛰쳐나왔다.
‘불쌍한 것. 내가 널 도와주겠다.’
조두명을 만난 건 하늘이 내려 준 기회였다. 납작 엎드려서 시키는 건 뭐든 다 했고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조두명이 하나를 알려 주면 둘, 셋, 넷을 익히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상훈은 입술을 비틀며 화분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듯 쳐다보았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꿇어요.’
긴 세월 납작 엎드려 살았으니 이제 조두명 당신이 꿇어야 할 때가 됐다고, 그토록 원하는 세상 내가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꿇으라고.
잘한다 하니까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 조두명의 코를 그날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너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다. 반드시 성공할 거야.’
그의 능력을 확인한 조두명은 감격에 겨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약을 건넸다.
“이제 내 것을 찾을 때가 온 건가?”
오랜 시간 강씨가 차지했던 그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부친의 복수를 넘어 종주가 되는 건 물론 세상을 지배하게 될 그 날이 머지않았다.
“흥분되네.”
상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서랍을 열고 이파리와 줄기를 말려 모아 둔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키워 왔던 화초도 모조리 꺾어 버렸다.
“언제 왔어?”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문가에 서 있었다.
“뭐야? 손도 못 대게 하던 화초를 왜 그 모양으로 만들어놨어?”
“이제 필요가 없어졌어.”
“지금 화초가 문제가 아니지. 나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할 거 같아.”
“그렇게 해.”
“근데 너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그럼 같이 울까?”
“아니, 위로가 필요해.”
이준이 다가와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상훈은 잠지 기다렸다가 이준을 밀어냈다.
“나약한 소리 하지 마.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야.”
“우리?”
너 또한 언제가 버려야 할 존재, 하지만 아직은 쓸모 있는 내 강아지.
상훈은 방긋 웃었다.
“할 말이 있어. 씻고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