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조두명이 발각돼서 헛소리라도 했다면 그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다. 이준은 황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계속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더니 큰길로 접어들어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오늘 회식이라고 했잖아.
“회식이고 나발이고 영감이 죽은 거 같아.”
-…….
“영감! 조두명이 죽었다고.”
소리를 꽥 지르자 한동안 핸드폰에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속이 시커멓게 타는데 마치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처럼 느껴져 말이 곱게 나가지가 않았다.
“조두명과 내 관계 몰라? 아니면 씨팔, 네 일 아니라고…….”
-진정해.
“진정? 조두명이 발각됐으면 나도 연관됐다는 걸 당연히 알 텐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러게 내가 경거망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야,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최대한 빨리 빠져나갈 테니까 아지트에서 만나.
전화가 뚝 끊겼다. 기가 막혀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지금 회식 따위가 문제인가 말이다. 걱정하면서 당장 튀어오겠다고 할 줄 알았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도움을 줄 정도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와 달리 원대한 꿈도 포부도 없는 녀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하는 건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휴식처 같은 놈이기는 한데 가끔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면도 없지 않았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거겠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면 더더욱 조심해야 하는 게 맞고.’
‘실력만큼 중요한 게 현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이야. 싸움은 결국 머리 좋은 놈이 이기게 되어 있거든.’
조두명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계획을 전부 이해하는 것처럼 말할 때도 있고, 그와의 대결에서 이겨 본 적도 없는 놈이 말은 청산유수였다.
“도대체 조두명 주변에 누가 있는 거야?”
이렇게 뒈져 버릴 거면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 줄 것이지.
겨우 알아낸 게 김우석뿐이다. 누구를 만나고 다녔는지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강태욱을 상대할 수 있는 자.”
그자가 누군지 알아냈어야 했는데! 이준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 * *
유주는 가방을 품에 안고 살금살금 나오다 문을 여는 순간 상훈과 딱 마주쳤다.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가 상훈을 밀치고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대리님, 도망가는 거예요?”
“쉿! 도망가는 게 아니고 머리가 아파서 먼저 가려고.”
“그게 도망가는 거죠.”
“붙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도망이야? 나 원래 회식 자리 싫어하는 거 알잖아. 다들 무슨 술고래도 아니고. 어우. 질린다 질려.”
저녁도 배부르게 먹었는데 그 많은 술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빈 병이 셀 수도 없었다. 신입도 들어왔고 올해 마지막 회식은 전원 참석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기는 왔는데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 먼저 갈 테니까 너도 눈치 봐서 빠져.”
“나도 가 봐야 해요.”
“핸드폰 들고 나가더니 무슨 일 있는 거야?”
“형이 골치 아픈 일이 생겼나 봐요. 가서 달래 줘야 할 거 같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너도 피곤할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마.”
“역시 내 걱정해 주는 사람은 대리님밖에 없네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가면서 이야기해요.”
유주는 상훈이 잡아끌어서 승강기에 올라탔다. 상훈은 외투를 두고 와서 티셔츠만 입고 있었다.
“너 이대로 갈 거야? 그러다 감기 걸려.”
“들어가면 못 나올 거 같아서요. 나가서 바로 택시 타면 돼요. 선배도 차 회사에 두고 왔다고 했죠?”
“아는 언니가 근처에 있다고 데리러 오기로 했어.”
나오기 전에 신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혼자 가도 되는데 통화를 오래 할 수 없는 상황인데다 싫다고 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알겠다고 했다.
“선배 주변 사람들 내가 거의 아는데 아는 언니 누구요?”
“너만 아는 형 있는 줄 알아? 나도 네가 모르는 예쁜 언니 있어. 어우, 춥다.”
승강기에서 내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 바람이 훅 몰아쳤다. 유주는 외투를 여미며 주변을 살폈다. 길 건너에 하얀색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눈이 그쳐서 다행이네. 난 조금 기다려야 하니까 너 먼저 가.”
“가는 거 보고 갈게요.”
“택시도 한 대밖에 없는데 얼른 가.”
어서 가라는데도 상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왜 뭐? 나한테 할 말 있어?”
“선배가 변하지 않았을 때가 좋았는데.”
“얘가 오늘 왜 이래? 너 취했니?”
“차라리 취하도록 마실 걸 그랬나 봐요. 기다렸다가 가는 거 보고 가려고 했는데 먼저 갈게요.”
택시를 향해 걸어가던 상훈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는 형이 골치 아픈 일이 있다더니 걱정이 많이 되는지, 전에 없이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상훈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 잘될 거야. 기운 내.”
유주는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상훈이 활짝 웃었다.
“응원 고마워요, 선배. 메리 크리스마스.”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택시가 떠나는 걸 지켜본 뒤 유주는 횡단보도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건너가려고 했는데 차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유턴을 한 차가 다가와 멈추자마자 얼른 올라탔다.
“신 비서님. 저 때문에 고생해서 죄송해요.”
“마침 근처에 있었고 힘든 일도 아닌데 주머니까지 두둑해져서 괜찮습니다. 출발하겠습니다.”
아무리 주머니가 두둑해져도 이 시간에 귀찮을 법도 한데, 신 비서는 표정도 목소리도 밝았다.
“신 비서님, 저녁 드셨어요?”
“고추 떡볶이 먹었어요. 떡볶이를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먹어요.”
“나도 떡볶이 좋아하는데. 어디서 드셨어요?”
“회사 근처에서요. 그 집 떡볶이는 머리가 팽 돌 정도로 매운데 먹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나도 가 봐야겠다. 어디 있는 곳인지 알려 주세요.”
“이따 문자로 보낼게요.”
“감사합니다.”
유주는 방긋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거리는 온통 작은 불빛들로 화려했다.
“신 비서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 전에 저한테 편하게 말씀하셨으면 좋겠어요.”
“제 말투가 불편하신가요?”
지난번 통화할 때도 너무 깍듯해서 민망했었다. 상사도 아닌 그녀를 태욱처럼 대하는 것 같아 영 불편했다.
“언니 동생처럼 편하게 지내고 싶은데 안 될까요?”
“제가 어떻게……. 말도 안 됩니다.”
“거절하시면 유치한 방법을 쓸지 몰라요. 음, 태욱 씨한테 신 비서님 싫다고 할 거예요. 혹시 오늘 같은 일이 또 있을 때 다른 사람 보내는 것도 싫다고, 이유는 신 비서님 때문이라고 할 거예요.”
“지금 저 협박하시는 겁니까?”
“통할까요?”
그녀가 눈을 깜박깜박하면서 쳐다보자 신 비서는 황당하다는 표정이면서도 웃음을 참는 게 역력했다.
어쩌면 태욱의 여자라고 대우를 해 줬더니 까분다고 생각할지도.
“안 통하는구나.”
“제가 누구한테 협박당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유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모르는 태욱에 대해 알려면 신 비서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째야 하나.
굳이 다른 사람을 통할 필요는 없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언니가 있으면 엄청 든든하고 좋을 텐데, 신 비서님은 저 같은 동생 필요 없으시죠? 이해해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하고 가까워져 봤자…….”
“알았어요. 그럼 둘이 있을 때만 편하게 말할게요. 대신 회장님께는 절대 비밀입니다.”
“진짜죠? 그럼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네. 아니 응.”
“아싸.”
유주는 생글생글 웃으며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신 비서 입에 넣어 주었다. 초콜릿을 입에 문 신 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방긋 웃었다.
“태욱 씨, 회사에서는 어때요?”
* * *
“으읍. 자, 잠깐만요.”
유주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키스를 퍼붓는 태욱 때문에 숨이 막혀 도리질을 했다. 밀어내려고 해도 벽과 태욱 사이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일단 씻고 10분, 10분만 기다려요.”
“안 씻어도 돼.”
“음식이 짰는지 목이 말라요.”
“잠깐 기다려.”
태욱이 주방으로 향하는 걸 보고 잽싸게 방으로 달렸다. 황급히 욕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오늘 일정도 바빴고 음식 냄새도 배었을 텐데 그대로 있다가는 태욱에게 홀라당 넘어갈 게 뻔했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가운만 입고 나왔더니 태욱은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흠흠, 물은요?”
불만이 많은 표정으로 대답 없이 고개만 까닥했다. 협탁 위에 머그 컵 세 잔이 놓여 있었다.
“무슨 물을 세 잔씩이나.”
“또 핑계 댈 거 같아서.”
“핑계가 아니라 진짜 목말랐어요.”
“가운 벗고 이리 와.”
“머리 말려야 하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머리를 말리지 않고 나왔다. 태욱의 짙은 눈썹이 쓰윽 추켜 올라갔다.
“머리를 조금 자를까 생각 중이에요.”
“안 돼.”
“왜요?”
“내 것에 손대지 마.”
민유주는 강태욱의 것.
가끔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태욱을 볼 때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았었다.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고 머리도 내 마음대로 못 하게 하면 안 되지.
“그럼 평생 머리를 자르지 말라는……. 무슨 일 있어요?”
투덜대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겨우 10분 조금 넘게 기다렸다고 화가 났을 리는 없고,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는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묘했다.
“무슨 일 있죠?”
“있어.”
걱정이 돼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벗으려다 말고 후다닥 태욱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태욱이 번쩍 안아서 무릎에 앉혔다.
“무슨 일인데요?”
“네가 날 거절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