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굳이 할아버지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제 판을 바꿀 때가 됐으니까. 그때 네놈도 죽였어야 했는데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어.”
“주제를 모르고 날뛰다 어떻게 됐는지 잊은 거냐?”
“혼자만 잘났다고 착각하지 마. 설사 네가 특별한 존재라고 해도 결국 강지만처럼 될 테니까.”
꼼짝도 않고 입만 나불대던 조두명이 히죽히죽 웃었다.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가 신경을 마비시켰던 힘을 벗어나 발을 쾅쾅 굴렀다.
“매일 밤 너를 죽이는 상상을 하면서 견뎠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넌 강씨 핏줄의 마지막 종주가 될 거다.”
태욱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힘을 방출했다. 쿠우웅, 동굴이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친, 같이 죽자는 거냐?”
“그럴 리가.”
조두명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결계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천정에서 흙이 쏟아지고 뭉텅뭉텅 떨어진 돌이 바닥에 화살처럼 꽂혔다.
“유주를 공격한 배후가 너냐?”
“죽이려다 생각을 바꿨지. 곧 너와 함께 나란히 지옥으로 떨어질 거다.”
조두명은 흙과 돌을 쳐 내면서도 결계를 뚫으려고 발악을 했다. 어림도 없지. 태욱은 입술을 차갑게 비틀었다. 결계를 치려고 하는 걸 힘을 봉인시켰다.
“마지막 질문. 이준이 내 상대가 못 된다는 걸 네가 모를 리 없을 테고.”
“이준 그 멍청한 놈은 소모품일 뿐이다.”
“너에게 동조한 자가 누구냐?”
“내가 말을 해 줄 거 같아?”
“덜 고통스럽게 죽을 마지막 기회를 버리네.”
“정정당당하게 싸울 것이지 비겁하게. 이, 이거 왜 이래?”
조두명의 손이 스스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태욱은 닥치는 대로 본인의 피부를 잡아 뜯다 목을 움켜쥐는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구 실장을 안아 들었다.
조두명의 머리 위로 커다란 돌덩이가 내리꽂혔다. 머리가 반쯤 깨진 상태에서도 목에서 손을 떼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내가 반드시 네놈의 목을……. 평생을 기다린 일인데 이렇게 끝날 수는 없……. 윽!”
조두명을 뒤로하고 입구로 향했다. 흙과 돌멩이가 쏟아져 내려도 결계 안은 멀쩡했다.
태욱은 문 앞에 서서 조두명을 돌아보았다. 상처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인지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안 돼. 안 돼. 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조두명이 제 목을 뽑아 버렸다. 태욱은 뽑힌 목을 움켜잡고 털썩 주저앉는 조두명을 싸늘하게 응시하다 돌아섰다.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 * *
태욱은 구 실장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금 원장과 짧게 통화한 후 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민유주 씨는 회사로 돌아갔다가 방금 전 직원과 회식 장소로 향했습니다.
“이준은?”
-오피스텔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했답니다.
“오피스텔 주변에 경호팀 배치시켜. 만약 내가 가기 전에 밖으로 나오면 잡아.”
-알겠습니다. 실장님은 별일 없는 건가요?
태욱은 구 실장을 힐끔 돌아보고 정면을 응시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는 건 지금 괜찮지 않다는…….
“나중에 직접 확인해.”
종료 버튼을 누르고 진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조두명이라고 기억하십니까?”
-조두명이라면 강지만 회장님 비서실장이었던 그분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억합니다. 근데 갑자기 조 실장은 왜…….
“제가 갈 시간은 안 되고 내일 회사로 오셔야겠습니다.”
-오전 중으로 가겠습니다.
눈도 내리고 차가 막혀 병원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차를 주차하고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구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정신이 들었나 보네.”
“나약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슨 냄새가 나는 거 같던데, 그것 때문일 수도 있을 거야.”
“전 자각을 못 했는데 조두명이 마향이라고 했습니다.”
“마향은 구하기 힘든 독초인데.”
“조두명 부친이 약초 캐는 사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구 실장은 태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태욱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조두명을 무너뜨렸다.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새삼 놀랐다.
“조두명이 하는 소리 들었습니다. 같이 근무했을 때 회장님이 엄청 신임했던 자인데 그런 인간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작정하고 주변을 속인 거겠지. 조두명 주변에 이준 말고 분명 다른 자들이 있을 거야.”
“일단 이준부터…….”
“당분간 구 실장은 쉬어. 얼굴과 팔은 치료를 더 받아야 해.”
“저는 괜찮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하다 못해 날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굴이 비대칭이야.”
“제 얼굴이요?”
구 실장은 황급히 얼굴을 만졌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인지 한쪽 볼이 쑥 들어간 느낌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매일 봐야 하는 나는 안 괜찮아.”
그 정도로 이상한가 싶어 룸 미러로 얼굴을 확인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는 좀 그렇지만 한가하게 병원 치료나 받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되도록 회장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을 테니…….”
“구 실장이 실수할 사람 아니라는 거 알아.”
열쇠를 박살 내고 계단을 내려와서 꽤 긴 복도를 걸었다. 안쪽에 있는 문은 쉽게 열었는데 상황을 모르니 긴장을 한데다 갑자기 공격을 당해서 냄새를 자각할 틈도 없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약해진 상태에서 내 힘을 받아 며칠 힘들 거야. 치료받고 당분간 쉬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제가 회장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로는 힘들어.”
태욱을 믿지만 강지만 회장도 당했다. 마향이 아니더라도 조두명의 실력이 보통이 아닌 건 확실했다.
비서실장은 단순히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태욱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실력도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못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했다.
“저는 늘 강지만 회장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건 구 실장 잘못이 아니야.”
“…….”
“이준은 내가 알아서 해. 구 실장은 당분간 쉬었다가 신 비서와 함께 유주를 지켜. 그게 나를 위하는 길이야.”
“회장님.”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종주로서 명령이야.”
구 실장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괜찮았던 몸이 뜨거워졌다 차갑게 식기를 반복했다. 열이 올랐다 내리는 건 그렇다 치고 온몸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통증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하시고 혹시라도…….”
“잔소리는 생략해.”
태욱은 마지못해서 차에서 내린 구 실장이 그대로 서 있어서 먼저 건물을 빠져나왔다.
굵은 눈송이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 * *
이준은 운전을 하면서 힐끔 룸 미러를 쳐다보았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까지 완벽했다. 이 정도면 전문가 실력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어 흡족했다.
“하필 이런 날 회식이라니.”
눈 쌓인 주변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원주까지 헛걸음한 것도 짜증 나고 술이나 한잔할까 밖으로 나왔다가 파주로 향했다.
“멍청한 영감탱이.”
자신만만한 걸 보면 강태욱을 상대할 실력자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몇 번을 물어도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그 긴 세월을 동굴 속에 처박혀 산 게 억울하지도 않나,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오늘은 기필코 조두명과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대문으로 못 들어가겠네.”
애초에 파주로 올 거였으면 변장을 안 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비밀 통로를 이용해야겠다.
강태욱이 조용한 걸 보면 민유주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 같은데, 요 근래 누군가 따라붙는 느낌을 몇 번 받은 터라 차를 돌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이준은 사유지라 출입을 금지한다는 팻말을 지나쳐 집 반대편 쪽에 차를 세웠다. 옷을 단단히 여미고 내려서 핸드폰의 플래시를 켠 뒤 눈 쌓인 길을 올라갔다.
“으, 추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했다. 바위를 돌아가서 틈 사이로 손을 넣어 버튼을 눌렀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바위가 움직이고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드러났다.
계단을 내려가 스위치 두 개를 동시에 켜자 바위 문이 닫히고 좁은 통로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조두명만 이용하는 곳이라 그는 몇 번 와 보지도 않았다.
“으악. 이거 왜 이래?”
벽에 있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자마자 흙과 돌이 쏟아져 나왔다. 이준은 깜짝 놀라 성큼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도대체 내 집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짜증이 훅 올라와 도로 나가려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조두명은 절대 이곳을 망가트릴 인간이 아니다. 설사 실수로 무슨 짓을 했다고 해도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닌데 설마 당한 건가?
“…….”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조두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이준은 쏟아져 나온 흙더미를 맹렬히 노려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어렴풋이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당했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제발 좀 받아라.”
몇 번을 해도 받지를 않아 속이 바싹 탔다. 잠시 후 말문이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멀리서 지켜보려고 잠깐 차를 세웠는데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감았다 떠 봐도 확실히 삐딱했다.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