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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53화 (54/69)

53화

구 실장은 덜렁거리는 왼쪽 팔을 움켜잡고 이를 악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렇게 넓은 공간이 지하에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가면을 쓴 남자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빠른 움직임과 마른 몸에 비해 악력이 상당했다.

“제법이기는 한데 넌 내 상대가 못 된다.”

뭔가 이상하다. 다짜고짜 공격을 해서 처음엔 방어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힘이 빠지고 움직임이 둔해졌다.

시야까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정당당하게 이길 자신이 없으니 술수를 쓴 거겠지.”

“마향을 피우기는 했지. 난 면역이 됐지만 넌 힘들 거다.”

마향은 향이 거의 없는 독초다. 적당히 쓰면 통증을 사라지게 하지만 오래 맡으면 환각 증상과 신경을 굳어지게 만든다고 들었다.

“난 네가 누구인지 안다. 강지만의 똘마니였다가 지금은 강태욱의 똘마니 구동주.”

비서를 똘마니라고 하는 무식한 놈이라니.

구 실장은 벽에 기대 있다 몸을 바로 세웠다. 가면 때문에 상대의 얼굴은 보지 못했고 상처가 금방 아무는 걸 보면 회복력이 상당히 빠른 자다.

목소리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이준하고 무슨 사이냐?”

“내가 누구인지보다 그게 더 궁금한가 보네.”

“얼굴을 가리고 지하에 숨어 있는 걸 보면 떳떳한 자는 아니겠지.”

“너 같은 똘마니는 내 거대한 계획을 이해 못 할 테니 마음대로 생각해라.”

“거대한 계획?”

“너도 동참할 생각 있으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네 실력 정도면 내가 만든 세상에서…….”

“헛소리 집어치워.”

“여전히 미련하기는. 쯧.”

지금까지 살면서 강태욱 회장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낀 상대는 없었다. 그런데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남자의 말투와 행동이 전에 없이 온몸을 긴장시켰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단 네 목숨이 끊어지기 전이어야겠지.”

남자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기세가 엄청나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구 실장은 정신을 집중시켰다. 피는 멈췄고 통증은 견딜 만했다. 팔은 간신히 뼈를 맞추기는 했지만 힘이 잘 들어가지가 않았다. 시간을 더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선제 공격을 시작했다. 남자는 뒷짐을 진 채 그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쯧, 싸움은 의욕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마치 가르치는 듯한 말투에 자존심이 상할 틈도 없었다. 빈틈을 잡아야 한다. 주먹을 휘두르자 남자가 몸을 유연하게 뒤로 꺾었다가 잽싸게 바로 세웠다.

지금이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순간 지체 없이 손톱을 남자의 배에 강하게 찔러 박았다. 손가락이 반쯤 박혀 있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제법이기는 한데 다시 말하지만 넌 내 상대가 못 돼.”

남자의 손이 그의 어깨에 칼날처럼 쑤시고 들어와 박혔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악문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잠시 머뭇하는 사이 남자의 다른 손이 그의 얼굴을 잡아 뜯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바닥은 시뻘건 피로 범벅이었다.

“곧 죽을 거니까 나처럼 흉측한 얼굴로 사는 일은 없겠네.”

퍽, 가슴을 타격당한 구 실장은 저만치 날아가 벽에 쿵 부딪쳤다. 치유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남자가 다가와 주먹을 내리꽂았다. 간신히 피하기는 했지만 엄청난 통증과 눈으로 피가 들어가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네.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

구 실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남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바닥에 쓰러져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사이 남자의 다리 하나를 잡고 가차 없이 비틀었다.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힘이 부족했다. 으드득, 치유력을 발휘해 뒤틀린 뼈를 맞춘 남자가 그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널 죽음의 사지로 내몬 건 강태욱이다. 그러니 날 원망하지 마라.”

계속 피하기만 하다 힘껏 뻗은 주먹에 남자의 가면이 박살이 나고 드디어 얼굴이 드러났다. 한쪽 얼굴이 엉망으로 망가졌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는 있었다.

“조두명 실장?”

“죽기 전에 내 얼굴을 보는 영광을 줬으니 고마워나 해라.”

조두명이 그의 목을 틀어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악력이 상당해서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 같더니 상상도 못 했다. 조두명이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내리치다 한쪽 팔을 뽑아 버릴 듯이 비틀었다.

어마어마한 통증과 함께 피부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렀다. 힘을 너무 소진해서 치유력을 발휘할 여력이 없었다.

“모처럼 몸을 좀 풀어 볼까 하고 상대해 줬더니 강태욱의 똘마니답기는 하구나. 하지만 싸움을 할 땐 상대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법.”

“…….”

“넌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 없었어. 내게 뭔가를 알아내려는 의도였겠지만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그가 입사했을 때 조두명은 강지만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다. 2년 가까이 함께 근무했었다. 조두명이 퇴사한 후 강지만 회장의 사건이 터졌고 이후엔 만난 적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

“네가 그때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아주 잘 지냈을지 모르지.”

구 실장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어느 날을 떠올렸다.

‘구 비서, 내가 큰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함께해 볼 생각 없어?’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조두명이 뜬금없이 저런 제안을 했을 때 평소 존경하는 강지만 회장과 함께 일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했을 때라 거절했다.

그 일이 있고 2달쯤 지나서 조두명은 회사를 퇴사했다.

“너처럼 노비 근성이 있는 멍청한 애들 때문에 우리 종족이 발전이 없는 거야.”

구 실장은 숨을 쉴 수 없는데다 조두명의 손이 심장 가까이 파고들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힘을 쓸 수가 없어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딱히 후회되는 일은 없지만 아쉬운 건 있었다.

‘구 비서가 있어서 든든해. 나중에 우리 태욱이도 잘 부탁하네.’

강지만 회장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날 혼자 외출한다고 했을 때 따라갔어야 했는데, 연락을 받고 찾아갔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잘 가라. 구동주. 네 심장은 내가 잘 뽑아서 강태욱에게 보내 주마.”

구 실장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불가능했다. 조두명의 손이 점점 심장을 파고들었다.

“물러나라.”

그때 믿을 수 없게도 태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태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미동도 없이 바닥에 누워 있는 구 실장을 응시했다. 가슴에서 피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고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상태가 심각해 보여 지체 없이 다가가려고 하자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가 앞을 막아섰다.

“조두명.”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조두명은 그가 영매관에 있을 때 외에는 얼굴을 볼 일이 없어 기억에 남는 인물은 아니다. 본가에서 지낼 때도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일단 구 실장부터 살펴봐야겠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네가 곤란한 건 내 알 바가 아니지.”

태욱은 눈을 부릅떴다. 조두명이 저만치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움직일 수 없게 신경을 마비시키고 구 실장에게 다가갔다.

상처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회장님.”

“말하지 마.”

심장 위에 손을 대고 치유력을 발휘했다. 뒤에서 조두명이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어차피 죽을 놈한테 선심 쓰는 척 쇼하기는. 강씨 핏줄이 얼마나 잔인한 족속인지 내가…….”

당장 조두명의 숨통을 끊어 버려도 시원찮지만 구 실장의 상태가 심각해서 무시했다.

피가 멈추고 벌어진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가 워낙 심해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듯했다.

“구 실장, 내 말 들려?”

“네. 회장님.”

“10초만 견뎌.”

구 실장이라면 그의 힘을 견딜 수 있을 거다. 태욱은 정신을 집중시키고 손바닥에 힘을 실었다.

짧은 순간 구 실장의 몸이 경기를 하듯 뒤틀리다 그가 손을 떼자 이내 축 늘어졌다.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구동주를 살리다니, 강씨 핏줄이 대단하기는 하네.”

태욱은 천천히 일어나서 조두명을 향해 돌아섰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뒤 깊게 빨아들이자 역겨운 피비린내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네가 반란 세력의 주동자냐?”

“난 정당한 복수를 하는 거다.”

“복수?”

“우리 집안에서 3명이나 강씨한테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내가 강지만 회장을 죽였다.”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때 사건에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살려 달라고 비는 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자까지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았다.

그 당시 걸리는 게 있기는 했었다. 오로지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뿐이어서 주동자가 누군지 확인을 못 했다.

주변인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박상민 사장이 반대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더 이상 피를 보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오랜만에 연락을 했더니 꽤 반가워하더군. 그날 강 회장은 약을 탄 술을 마셨고 난 술 대신 물만 마셨지.”

“…….”

“역시 강 회장이더군. 그 자리에 동지들이 서른 명 넘게 있었는데 쉽지 않았어. 내가 자리를 뜨기 전 죽어 가면서도 손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헛소리를 했었지.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라나 뭐라나.”

“네 말이 사실이라면 할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으셨네.”

태욱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연기를 후우, 뿜어내며 조두명을 차갑게 응시했다.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강씨 핏줄이라는 이유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너희 집안을 기필코 끊어 내고 새로운 종주, 새로운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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