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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52화 (53/69)

52화

태욱은 오전 내내 사무실에 있었다. 점심 식사는 출장에서 돌아온 재명과 함께 먹었다.

‘더 들은 건 없고 그게 다야. 조만간 민 사장을 다시 만나 알아봐야지.’

가끔 이준이 연락도 없이 사라졌던 적이 있다는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 만난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누군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노크 소리와 함께 구 실장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회장님. 김우석이 죽기 며칠 전 아침 일찍 집으로 여자가 방문했다고 합니다.”

“여자?”

“이른 시간이라 저희 쪽에서 못 본 거 같습니다.”

김우석은 처음 팔찌를 언급한 것 외에 지금까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골프를 치거나 차수연 식당을 간 것 외에 외부 활동이 거의 없는데다 아들과의 왕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누군지 확인했어?”

“집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모자를 쓰고 있어서 cctv에 얼굴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택시 번호도 확인이 안 됩니다. 사망 날짜와 차이가 있어서 연관이 없을 거 같기는 한데, 체격이 좀 있는 편인데다 검은색 모자에 긴 머리인 게 신경이 쓰입니다.”

“그게 왜?”

“전에 쭈니에서 박재명 사장님이 봤다는 여자 말입니다.”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cctv를 본 박 비서는 체격이 남자 같다고, 지인 중에 가끔 여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잠깐만.”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문득 언젠가 유주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연기는 진짜 흠잡을 수 없는 배우인 거 같아요. 전에 드라마에서 이란성 쌍둥이 역할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오빠와 여동생 1인 2역을 했거든요. 와, 진짜 여자인 줄 알겠더라고요.’

그때 쭈니에서 여자의 모습은 cctv에 찍힌 게 없었다. 만약 이준이 쭈니에 들어온 후 여자로 변장을 했다가 나가기 전에 다시 바꿨다면 cctv에 찍히지 않을 수 있겠지.

“1인 2역.”

“네?”

“이준이 출연한 드라마에서 쌍둥이 여자 역할을 한 적이 있다고 했었어.”

인터뷰를 했던 시기, 소이영의 죽음.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다그칠 수는 없어 지켜보고만 있었다.

“신경 쓰이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어제 이준이 파주에 들렀다 오피스텔로 돌아갔는데 새벽쯤 파주 집에 10분 정도 불이 켜졌다가 꺼졌답니다.”

“집에 누가 있다는 거야?”

“그동안 도우미 말고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다녀가는 도우미는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고 다른 출입문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이 켜졌다 꺼졌다라.

“이준 지금 어디 있어?”

“오피스텔에서 민준혁 사장을 만난 후 원주로 가고 있습니다. 광고 촬영이 있답니다.”

“지금 구 실장이 파주 집 가서 확인해.”

“알겠습니다.”

태욱은 구 실장이 나간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파주 집도 그렇고 만약 그동안 이준이 여자로 변장해서 자유롭게 외출을 했다면 동선을 제대로 파악 못 했을 수도 있다.

“이준, 최현성.”

두 사람의 나이 차이로 봐서 최현성이 말한 ‘그자’가 이준일 가능성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이준의 배후에도 그자가 있는 게 아닐까.

“후우.”

종주의 권한은 무기나 다름없다. 혹여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엉뚱한 희생을 초래해서는 안 되기에 그동안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것도 없지 않았다.

태욱은 답답해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 뺐다.

* * *

구 실장은 파주에 있는 이준의 집 거실 한가운데 서서 미간을 좁혔다. 1층은 넓은 거실에 방 두 개와 욕실이 있고, 냉장고에 생수만 들어 있는 걸 보면 주방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했다.

2층까지 샅샅이 살펴봐도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고 집 안 어디에도 여자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태욱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자마자 신 비서한테 전화가 들어왔다.

-실장님, 파주 갔다면서요? 회장님이 오피스텔을 확인하라고 해서 왔는데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어요.

“매니저 집은?”

-매니저 집은 개판 오 분 전이라 말하기도 싫고. 거기는 어때요?

“여기도 깔끔해.”

-지하실도 살펴봤어요?

“지하실은 없어.”

-그래요? 불이 잠깐 켜졌다고 해서 지하실에 우렁각시라도 숨겨 놨나 했더니 아닌가 보네.

“지금 그런 농담할 때야?”

구 실장은 가끔 신 비서가 생각 없이 말을 할 때마다 영 못마땅했다. 업무 처리 능력은 빈틈이 없는데 항상 입이 문제였다.

-답답해서 그냥 한 소리예요. 난 회사로 들어갈 건데 실장님은요?

“나도 곧 출발할 거야.”

-회사에서 봐요. 그리고 실장님은 버럭 하는 성질 좀 죽여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구 실장은 어이가 없어 핸드폰을 노려보다 주머니에 넣었다.

팔찌의 봉인이 풀리고 민유주가 나타난 순간부터 신경이 예민해진 건 인정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몇 달 동안도 마음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했었다.

“지하실이라.”

cctv를 처리하고 난 뒤 건물 주변부터 살펴봤는데, 밖은 물론 집 안 어디에도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없었다.

구 실장은 베란다 쪽을 다시 확인하고 1층 방을 빤히 쳐다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텅 비어 있고 액자 하나만 달랑 걸려 있었다.

* * *

태욱은 답답해서 옥상에 잠시 올라갔다가 사무실로 내려왔다. 비서실에 신 비서와 재명이 함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민 사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 근처로 오겠다고 한 걸 보면 술김에 이준 이야기를 해서 신경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민준혁이 이준에 대해서 다 아는 건 아닐 거다.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재명에게 부탁을 했지만 애초에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일단 만나 보고 연락해. 민 사장 만나러 간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야?”

“혹시 진성 어른 전화 받았나 해서.”

“안 왔는데 왜?”

“그동안 아버지한테도 여러 번 전화했다고 들었는데 이젠 나를 귀찮게 하시네. 도대체 종주는 결혼을 언제…….”

“내 결혼 문제를 왜 너한테 전화를 해?”

“내 말이.”

전화로 꽤 시달렸는지 재명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원로들 사이에서 그의 결혼 문제가 화두에 오른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그는 조용히 일갈했다. 신경 끄시라고.

“상황이 복잡한 건 나도 아는데 적당한 시기에 오픈을 해야 하지 않겠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아버지도 자꾸 전화가 오니까 나한테 알아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

“이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기 전에는 안 돼.”

유주한테 프러포즈도 받았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지금 시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오픈할 수는 없다. 안 그래도 팔찌 주인을 노리는 자들이 더 있는 게 아닌지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더 보탤 수는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지난번에는 비상 권한 어쩌고 해서 다들 긴장하게 하더니 왜 조용한 거야? 지금이야말로…….”

“그때는 의심이었고 지금은 확실해졌으니까. 시끄럽게 해서 더 꽁꽁 숨어 버리면 시간만 늦어질 거야.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는 게 나아.”

“네 판단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신 비서님. 수고.”

신 비서님? 태욱은 닫힌 문을 빤히 응시하다 신 비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재명은 구 실장보다 어린 신 비서한테 꼬박 신 비서‘님’이라고 했었다.

게다가 그가 없을 때 가끔 비서실에 들를 때가 있는데 신 비서가 있을 때만 도시락을 주문해 주거나 먹을 것을 챙겨 준다고 들었다.

“회장님,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야. 이준 오피스텔에 간 건 어떻게 됐어?”

“오피스텔에 여자 물건은 없었습니다. 매니저 집도 딱히 이상한 건 없답니다.”

“구 실장은?”

“통화했는데 파주 집도 찾은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근데 오실 때가 지났는데. 좀 전에 전화를 했더니 실장님 핸드폰이 꺼져 있었습니다.”

태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돌아섰다. 구 실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핸드폰을 꺼 놓거나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간에 상관없이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항상 받았다.

“구 실장 핸드폰이 꺼져 있다고?”

“저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 봐야겠어.”

“아닙니다. 김 비서는 2 비서실에 있고 박 비서도 곧 들어올 테니 제가 가 보겠습니다.”

“난 파주로 가고 신 비서는 유주한테 가.”

“민유주 씨는 다른 사람을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오늘 회식이라고 했어. 유주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신 비서가 집까지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태욱은 신 비서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각자 차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구 실장의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고 유주는 신호가 가고 한참 후에 전화를 받았다.

“아직 식당이야?”

-1시간 미뤄져서 이제 막 음식 사진만 찍었어요.

“오늘 회식은?”

-사장님이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해서 늦게라도 참석해야 해요.

“신 비서가 회식 장소로 갈 거야. 끝나면 연락해서 그 차 타고 집으로 가.”

-회사에 들렀다 가야 해서 차 놓고 갈 거예요. 술은 되도록 안 마실 거고 택시 타면 돼요.

“마침 신 비서가 그쪽 근처에서 볼일이 있다고 해서 이미 말해 놨어.”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싫다고 해도 보낼 거죠? 알았어요. 이따 집에서 봐요.

평소라면 부담된다고 거절했을 텐데 많이 바쁜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신 비서였다.

-회장님, 식당 앞에 도착했습니다.

“회식 끝나면 연락하라고 했어. 신 비서가 직접 집에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방금 연락이 왔는데 이준이 원주에서 일정이 변경돼 올라오고 있답니다. 아직 목적지는 확인이 안 된 상태입니다.

“곧 도착하니까 파주로 향하면 연락하라고 해.”

전화를 끊고 속도를 더 높였다. 이준의 집하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 구 실장의 차가 있는 게 보였다. 이준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곧장 대문을 뛰어넘었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쿵 하는 울림이 들렸다.

태욱은 문이 열려 있는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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