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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51화 (52/69)

51화

태욱은 담배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쳤다.

어제 유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태욱 씨만 있으면 돼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아 불임의 원인을 그에게 돌렸다. 그와는 달리 만약 유주가 아이를 원한다면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제 하나만 해결하면.”

반란 세력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야 팔찌와 무족의 저주 같은 운명을 알게 된 유주한테 그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말까지 할 수는 없었다.

“후우.”

담배를 끄고 자리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고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사에 있을 때 유주가 전화를 한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없고 문자보다는 전화가 빠를 거 같아서요. 점심 먹었어요?

“아직.”

-같이 먹을래요?

“좋지. 먹고 싶은 거 있어?”

-문자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와요.

전화를 끊고 잠시 후 문자가 들어왔다.

“더 칸 호텔 4201호?”

의외의 장소에 빙그레 웃고 있는데 문자 하나가 더 들어왔다.

[이상한 상상 하지 말고 와요.]

귀여워 죽겠네.

새벽에도 뜨겁게 안았는데 문자를 보는 순간 허리 아래가 묵직해졌다.

예쁜 내 여자 민유주.

유주를 만나기 전엔 본가든 어디든 그저 일을 하거나 잠을 자는 장소일 뿐이었다. 함께 지내고부터 내 여자가 있는 곳, 둘만 공유하는 특별한 장소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비단 집뿐만이 아니라 이젠 사소한 것까지 유주로 인해 모든 게 특별해졌다.

“그놈이 누군지 확인을 못 했네.”

5살 때 유주의 목숨을 구해 준 무족이 있다고 했었다. 많은 대화를 하면서 정작 궁금한 걸 듣지 못했다.

태욱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먼저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가운만 입고 기다린 지 5분도 안 돼서 유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에 먼저 출근해서 몰랐는데 가는 허리가 유독 돋보이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 볼록 솟은 가슴, 잘록한 허리, 무릎 아래로 드러난 가는 종아리.

꿀꺽 삼켜 버리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는지 유주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샤워했어요?”

“기다렸다가 같이할 걸 그랬나?”

“내가 이상한 상상 하지 말라고 했죠? 둘 다 거리가 멀지 않고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정말 식사만 할 생각이었어?”

“어쨌든 식사가 먼저예요. 음식 곧 올 거니까 태욱 씨는 안에 들어가 있어요.”

“키스 안 해 줄 거야?”

“키스로 멈추지 않을 거잖아요. 됐다고 할 때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돼요.”

얼굴 보자마자 등을 떠밀어 하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벨 소리가 들리고 한참 지나서야 유주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이제 나와도 돼요.”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몇 분이나 됐다고. 옷 갈아입고 나와요.”

태욱은 문을 닫고 사라지는 유주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잠시 고민하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왔다.

유주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

도착해서 생수를 마셨을 땐 없었는데 음식과 함께 식탁 중앙에 커다란 붉은 장미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꽃 예쁘죠?”

“네가 더 예뻐.”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다 유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유주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장미 사이로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살짝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더니 크기만 다른 똑같은 모양의 반지였다.

“식사하고 나서 말하려고 했는데. 이왕 찾았으니까 흠흠, 태욱 씨 우리 결혼할래요?”

“…….”

“싫어요?”

싫을 리가.

단지 유주가 먼저 꽃과 반지를 준비해서 프러포즈를 할 줄 몰라 놀랐을 뿐이다.

“당장 하자는 게 아니고. 읍.”

태욱은 유주의 입술을 깊게 물어 삼켰다. 안 그래도 예뻐 죽겠는데 자꾸 예쁜 짓을 하면 어쩌라는 건지.

가는 허리를 바싹 끌어안고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키스가 점점 뜨겁고 농밀해지자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유주가 살며시 그를 밀어냈다.

“대답부터 해야죠.”

“당연한 걸 뭘 물어?”

“확실하게 대답해요. 예스예요. 노예요?”

“천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아. 예스.”

유주가 장미꽃보다 더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유주한테 반지를 먼저 받게 될 줄이야.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네.

“비싼 건 아니지만 태욱 씨를 향한 내 사랑이 가득 담긴 반지예요.”

“프러포즈는 내가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빨리 내 남자로 도장 찍어 놓고 싶어서요.”

“난 이미 네 남자야.”

“알아요. 태욱 씨는 내 거, 난 태욱 씨 거. 내 반지는 태욱 씨가 해 줘요.”

태욱은 유주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그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그에게 왔을까.

오롯이 내 것인 존재가 있다는 게 이렇게 가슴 벅찰 줄은 몰랐다.

팔찌 주인인 걸 알았을 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이제 식사해요.”

“배 많이 고파?”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알겠는데 나 오늘 시간 많아요. 태욱 씨는 몇 시까지 들어가야 해요?”

“3시에 미팅이 있기는 한데 중요한 일은 아니야.”

“그동안 월세 안 낸 거, 자동찻값 주려고 모은 거까지 탈탈 털었어요. 둘 중 한 사람은 정신 차리고 일해야죠.”

태욱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유주가 그의 손을 잡고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식사보다 다른 걸 하고 싶지만 시키는 대로 얌전히 앉았다.

“태욱 씨, 고마워요. 내 목숨도 구해 주고 날 사랑해 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나한테 와 줘서.”

“그때 산에서…….”

“아, 분위기 깨고 싶지 않은데 물어봐야겠어. 어렸을 때 널 구해 준 그놈이 누구야?”

“내 생명의 은인한테 왜 자꾸 그놈이라고 해요?”

“상대가 우리 종족이 아니면 가벼운 상처 정도만 치료할 수 있어. 심한 상처도 가능하기는 한데, 그 정도 힘과 능력이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아. 누군지 궁금하기도 하고 널 구해 준 자니까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유주 주변에 얼쩡거리는 놈은 그게 누구든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생명의 은인을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할 수는 없고 일단 알고는 있어야지.

“산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였고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어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봤어? 그쪽에서 찾아온 거야?”

“우연히 만났는데 처음엔 몰랐어요. 그러다 나중에 생명의 은인인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자가 누군데?”

“그때 오빠 나이가 14살이었어요.”

태욱은 눈썹을 쓰윽 끌어 올렸다. 성인이 되기 전 그런 능력은 불가능하고 그가 아는 한 단 한 명뿐이다.

언젠가 영매관이 습격을 당했을 때 처참한 광경을 보고 피가 끓어올라 힘을 뿜어낸 적이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다행히 그 자리에 있던 진 여사와 재명은 무사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살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네가 특별하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 일찍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걸 늘 경계했다. 그를 영매관에서 자라게 한 것도 종족의 관심을 되도록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종주는 종족을 지키는 자리지만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고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었다.

“14살이었던 게 확실해?”

“네. 처음 하는 거라 힘 조절이 안 된다고 했어요.”

“…….”

“뱀에 물려서 독을 희석해야 한다고 오빠 피도 마시게 했어요.”

영매관 사건 이후 함부로 힘과 능력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딱 한 번 어떤 아이를……. 산, 처음, 힘 조절, 독, 피, 14살.

잊고 있었는데 불현듯 그때의 광경이 스위치가 켜지듯 퍼뜩 떠올랐다.

“설마 그때 그 아이가…….”

“나예요. 은샛별.”

전에 유주를 조사했을 때 그 이름은 없었다. 보육원이 없어져서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산을 자주 갔었어.”

한 번 힘을 방출해서인지 가끔 몸의 기운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수련을 받기 전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무작정 산을 올랐다.

그날도 해가 뜨기 전부터 산을 뛰어다니다 아이를 발견했다. 죽어 가는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네가 정말 그때 그 아이야?”

“네. 입양 후에 민유주로 이름을 바꿨어요.”

평범한 어린아이한테 독성이 강한 그의 피를 마시게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상처는 치료했지만 독이 온몸에 퍼져 고민 끝에 아주 소량을 마시게 했었다.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내 마음에 걸려 며칠 지난 후에 보육원을 찾아갔다. 멀리서 아이가 뛰어노는 걸 지켜본 뒤 잊고 살았다.

“그 꼬맹이가 유주 너라니, 믿을 수가 없네.”

“그때 태욱 씨가 없었다면 난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유주가 다가와 그의 무릎에 앉아서 목에 팔을 감고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내겐 태욱 씨뿐이에요. 사랑해요.”

“그놈이라고 한 말 취소해야겠네.”

“우리 식사는 나중에 할까요?”

“아주 좋은 생각이야.”

태욱은 유주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한참 지나서야 방을 나왔다. 룸서비스를 다시 주문하고 미팅은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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