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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50화 (51/69)

50화

“…….”

“내 존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나 본데 누구야? 설마 영감 위에 누가 또 있어?”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이제 나가.”

“엄청 당황한 표정이네? 도대체 얼마나 더 숨기고 있는 거야?”

안 그래도 평소보다 약초를 독하게 피워 머리가 지근거리는데 저 단세포 인간까지 왜 보태는지 모르겠다.

두명은 성질이 나 테이블을 힘껏 걷어찼다. 대리석 테이블이 쩍 갈라졌다.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

“그동안 영감이 나한테 가져간 돈이 얼마인 줄 알아? 계속 이딴 식이면 서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셔야지. 영, 감, 님.”

무족은 반란에 참여한 자식이라고 해도 어떤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의 원대한 꿈에 동참하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고심 끝에 강지만 회장 사건 때 목숨을 잃은 핏줄을 찾아다녔다.

대부분 자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10대들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꿇어요.’

처음엔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미친놈인 줄 알았다. 선한 눈빛과 늘 해맑은 표정이라 과연 쓸모가 있을까 생각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수련이 끝난 후 아이의 성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투자한 돈이 아깝지 않겠다 싶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원하는 걸 이루려면 나한테 복종해요.’

그날 그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강태욱과 상대해도 부족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이젠 믿는 건 그자뿐이다.

“때가 되면 너도 만나게 될 거다.”

“그러니까 그때가 도대체 언제냐고?”

“강태욱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다. 그때까지는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야 해.”

지난번 실수로 입을 벙긋했다가 김우석이 노출됐다. 이준이 또 설레발쳤다가는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 될 수도 있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면 당장 강태욱의 목을 뽑아 버릴 것이지 왜……. 아, 혹시 박재명?”

“박재명은 강태욱을 상대할 능력도 안 되지만 배신할 자가 아니다.”

“그럼 누구? 몇 살인데?”

“…….”

“설마 나보다 어린놈은 아니지?”

이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상당한 실력자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면 진짜 어린놈인가?

에이, 설마.

“실력이 중요하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뭐야? 진짜 어린놈이야?”

“강태욱도 24살에 종주가 됐어.”

“지금 장난해?”

이준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오늘따라 향을 너무 독하게 피웠는지 머리가 지근거렸다. 익숙해졌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신경이 마비돼서 몸이 굳어지고 말았을 거다.

“곧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올 거다.”

“우리가 아니라 영감이 원하는 세상이겠지.”

“네가 얌전히만 있으면…….”

“또 떡밥 던지려고? 얌전히 돈이나 퍼 주고 시키는 일이나 하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 알아봐.”

“너로 인해 몇 명이 죽었는지 알아? 이러다 강태욱이 눈치라도 채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

“그게 왜 나 때문이야? 그들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영감이잖아.”

소이영도 김우석도 조두명이 죽였다. 그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조두명은 그가 말실수를 해서 정체가 드러날까 봐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극도로 꺼려 했다.

김우석도 그가 찾아가 흔든 걸 알고 죽인 거겠지. 어차피 도움이 될 인간이 아니니 죽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 단지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것만 대답해. 나를 보호하라고 한 자가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조두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준은 조두명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곧장 정원으로 나와서 숨을 깊게 들이켰다.

찬 바람을 쐤더니 지근거리던 머리가 서서히 괜찮아졌다.

“강태욱을 상대할 수 있는 자라.”

그자가 누굴까.

* * *

태욱은 닫힌 방문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벌써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난 며칠 유주를 혼자 둘 게 아니라 찾아갔어야 한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다.

‘왜 거짓말했어요? 또 속인 거 없어요?’

서로 비밀 없기로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유주가 불안해하지 않고 그의 곁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라니까.

“후우.”

종주로서 종족의 안위를 지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머뭇거리거나 망설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유주는 늘 예외다.

생수병 몇 개를 비웠는데도 또다시 목이 탔다. 자리에서 막 일어섰을 때쯤 핸드폰이 진동했다.

“…….”

태욱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빤히 응시했다. 재명이 전화를 한 의도가 뻔해서 무시할까 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주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어야 할 거야.”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는 사람한테 좀 부드럽게 말할 수 없어?

재명은 본사로 온 후 나름 예의를 갖추는 편인데, 그와 단둘이 있거나 통화를 할 때는 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크게 불만은 없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온통 유주 생각뿐이라 재명의 투정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다.

“용건만 간단히. 부산 일정 추가한 거 때문에 전화한 거라면.”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야.

“업무 보고는 아까 구 실장한테 받았어.”

-회장님께 보고하라고 내가 친절하게 팩스까지 다 보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일정 때문도 아니고 따로 보고할 게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시간에 전화를 왜 했단 말인가.

태욱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식탁에 앉았다.

-이준 여자가 있는 거 같아.

“여자?”

-저녁 식사하러 간 곳에서 우연히 민준혁 사장을 만났거든. 둘이 따로 술 마시다 방금 전에 헤어졌어.

이준의 소속사인 민 엔터테인먼트 사장 민준혁은 무족이 아니다. 그와는 안면이 없는데 재명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재명에게 따로 이준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했을 때 친분은 있지만 민 사장이 소속 배우 이야기를 거의 안 하는 편이라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었다.

-일본에 있을 때 숙소에서 여자가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있나 봐. 누가 뒷모습 찍은 걸 sns에 올렸다는데 민 사장은 이상한 사이일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어.

“이상한 사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면 크게 상관은 없는데.

“상대가 누군데?”

-그걸 몰라서 골치 아파하는 거 같았어.

그동안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가까이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지 않고, 그는 이준의 성적 취향엔 관심 따위 없다.

태욱은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빤히 응시했다. 통화를 하면서도 온 신경은 유주를 향해 있었다.

-자세히는 말을 안 하는데 가끔 이준이 연락을 끊고…….

“나중에 이야기해.”

그때 방문이 열리고 드디어 유주가 나왔다. 태욱은 급하게 전화를 끊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주방으로 다가왔다.

“배고파요. 밥은 싫고 간단히 먹을 만한 거 있어요?”

“샌드위치 먹을래?”

“커피는 내가 준비할게요.”

“앉아 있어. 내가 할게.”

유주는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고 냉장고로 향하는 태욱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의자에 앉았다. 금방 샌드위치와 커피가 식탁에 놓였다.

“태욱 씨는 안 먹어요?”

“난 커피면 돼.”

“그럼 나도 커피만 마실래요.”

그녀가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자 태욱이 냉장고에서 하나를 더 꺼내 와 앉았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몰랐다.

무족, 팔찌, 출산 후 죽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태욱의 입장까지 머리 터지게 생각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욱과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

계속 시간을 끌어 봐야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장에서 팔찌 이야기할 때 뭔가 숨기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모르기를 바랐어.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유주는 만지작거리던 샌드위치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태욱을 빤히 쳐다보았다. 태욱도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이 없는지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우리 관계를 오픈하자고 했을 때 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너한테 말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또 뭐가 더 있는 걸까. 표정이 심각한 걸 보면 설마 더 놀랄 일이 있는 건가.

마음을 굳게 먹고 나왔건만 저도 모르게 긴장이 돼 두 손을 꼭 잡았다.

“병원 갔던 날 나도 검사를 받았어. 다른 이상은 없는데 내가 아이를 낳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더군.”

“…….”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네가 아이를 원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말을 못 하고 있었어.”

그래서 아이를 원하는지 물었던 거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비꼬았던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태욱을 닮은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계획 없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생각은 확고하지만 상상하면서 설렜던 적이 있었다.

“아이는 내가 너한테 줄 수 없는 단 하나야.”

“만약 내가 아이를 원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널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 나만 봐 달라고 설득이든 애원이든 뭐든 했겠지.”

“내가 태욱 씨 사랑한다는 거 믿어요?”

“믿어.”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한테 줄 수 없는 단 하나만 빼고 모든 걸 줄 수 있다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유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욱에게 다가갔다. 태욱을 꼭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태욱 씨만 있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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