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김우석은 교활한 자다. 몇 번 지저분한 일을 처리해 줬을 때도 제 놈이 잘나서 도와주는 줄 알고 거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아들이 종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없었다면 그를 돕지 않았겠지.
여자를 매수해서 덫을 놓은 것도 언젠가 그에게 칼을 꽂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찍은 사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구 짓인지 뻔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들먹일 생각은 없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생각해 봤는데 내가 사람을 더 모아 보는 건 어때? 눈치를 보니 영감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거 같아서.”
“쪽수가 많다고 강태욱을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강태욱 머리털 한 가락도 못 건드릴 거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강태욱 힘 직접 본 적 있어? 원래 소문이라는 게 눈덩이처럼 부풀려지는 법이잖아.”
조두명은 단순 무식한 이준을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문득 오래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 당시 처참했던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물론 강하기는 하겠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이 지레 겁먹고 몸을 너무 사리는 것 같단 말이지.”
“오래전 영매관이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소문만 무성하고 본 적이 없는 팔찌와 금서를 찾기 위해서였지.”
“금서라면 혹시 영감이 갖고 있던 그 책?”
“그건 원본이 아니다. 영매관에 보관하기 전 누군가 필사를 한 거야. 그중 한 권만…….”
“책 이야기는 됐고, 결론은 성공 못 했다는 건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때 강태욱이 영매관에 있었다.”
지금은 최소한의 인원뿐이지만 당시엔 상주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종주의 손자가 머물고 있으니 경호팀도 적지 않았다.
“그날 저녁 강진만 회장이 영매관에 들를 예정이었어. 그곳에서 강태욱과 강 회장을 같이 죽일 계획으로 꽤 많은 인원이 갔었다. 최고의 실력자들이었지. 그런데 강태욱 때문에 실패했어. 그때 강태욱 나이가 14살이었다.”
“14살이 뭘 어떻게 했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는데 하나같이 목이 잘려 죽었다.”
더 놀라운 건 기왓장은 물론 주변 나무들이 뽑혀 날아갈 정도의 위력임에도 진 여사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박재명은 멀쩡했다는 거다.
성년이 되기 전 그런 능력이 나타난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돼. 그 나이에 그게 가능해?”
* * *
유주는 태욱의 말을 못 들은 척 차를 마셨다. 지난 며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언제나 결론은 하나였다.
태욱이 없는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백 번을 생각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나와 끝내겠다는 거야?”
“태욱 씨가 원하면 그렇게 할게요.”
“민유주! 도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요.”
결정을 하고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하루를 더 보냈다. 미적대다가는 오늘도 그냥 보낼 것 같아 결심을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5살 때 산에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를 도와준 오빠가 있어요.”
“오빠?”
순간 태욱의 눈빛이 선명한 이채를 띠며 번뜩였다. 설핏 푸른빛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아무도 없는 산속이라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 오빠가 낫게 해 줬어요. 내 심장에 손을 댔을 뿐인데 살았어요.”
“우리 종족을…….”
“어리기도 했고 그 오빠 말처럼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생명의 은인을 잊고 살았어요. 태욱 씨로 인해 세상엔 내가 모르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요.”
“혹시 그자를 다시 만났어?”
“네. 그런데 아직 오빠한테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요.”
“그놈이 누군데?”
유주는 태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래전 일이라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기억을 하든 못 하든 상관없다.
어쩌면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과거와 현재는 연장선인데 요즘 미래가 안 보이는 느낌이에요.”
“내가 있는데 왜?”
“…….”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그놈과 나 사이에서 흔들리는 거야?”
차라리 흔들리기라도 했으면, 뚝 끊어 낼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그녀를 필요에 의해 곁에 둔다고 해도,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동안의 기억이 몽땅 지워지지 않는 한 태욱이 곁에 없는 시간들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이 팔찌 태욱 씨한테 중요한 건가요?”
“그놈이 누군지 먼저 말해.”
“그 대답은 나중에 할게요.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란다면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숨기는 거 없이 솔직하게 말해 줘요.”
태욱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유주는 태욱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야. 그 팔찌는 무족의 저주를 풀 수 있는 희망 같은 거야.”
“저주라니, 무슨 말이에요?”
“우리 종족의 여자들은 아이를 낳으면 일찍 죽어. 내 모친도 나를 낳고 죽었지. 오래전부터 그 팔찌의 주인은 아이를 낳아도 죽지 않는다고 전해져 왔어.”
“…….”
“팔찌 주인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종족의 불행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지.”
아이를 낳으면 죽는다는 무족의 저주.
그 불행을 해결할 수 있는 혹은 그렇게 믿고 있다는 팔찌.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녀는 몰라도 된다고, 혹은 모르기를 바라서 말하지 않은 거겠지.
혼자 생각하는 내내 태욱을 이해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런 충격적인 비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
저녁 햇살이 은은하게 스며드는 넓은 거실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태욱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그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저주, 불행, 팔찌.
그 말만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왜 처음부터 말해 주지 않았어요?”
“충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난 아이를 원치 않아.”
“…….”
“너만 있으면 돼.”
평소라면 가슴 설레는 말이겠지만 전혀 와닿지 않았다. 태욱은 무족의 종주다.
만약 그녀가 팔찌의 주인이 아니라면 연애를 하자고 했을까?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심일까?
죽녹원에서 만난 것부터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그녀한테 인터뷰를 한 것도 계획적이었을지도.
“무족도 아닌 내가 왜 팔찌의 주인이 된 거예요?”
“그건 모르겠어.”
“아이를 낳아도 죽지 않는 건 확실해요?”
“말했다시피 난 아이를 원하지 않아.”
“확실한 건…… 아니군요.”
문득 며칠 전 태욱이 그녀가 임신했을까 봐 날카롭게 반응했던 날이 떠올랐다. 확실히 증명된 게 아니니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예민하게 반응했던 건가?
그날의 모습까지 거짓이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그만 이야기해요.”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태욱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아챘다. 뿌리쳐도 꽉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아이를 원해?”
“내가 뭐라고 더 칸의 회장, 무족의 종주의 아이를 감히 원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까지 뾰족하게 반응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 곱게 나가지가 않았다. 태욱은 그녀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다.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말을 못 했다고 해도 별장에서 물었을 땐 숨기지 말았어야 했다.
“이름도 간판도 없는 식당, 나 다쳤을 때 기억 돌아왔어요. 그 남자가 팔찌를 하고 있는 나를 데려가려고…….”
그때를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챈 태욱이 품으로 안으려고 하는 걸 거칠게 밀어냈다.
“그곳에 태욱 씨가 왔다는 거 알아요. 왜 거짓말했어요? 그 남자 눈동자가 회색이었어요. 구례에서 봤던 그……. 펜션에서 태욱 씨 정말 못 본 거 맞아요? 나한테 또 속인 거 없어요?”
“너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 남자는 ‘돈이 되는 건 팔찌가 아니라 민유주 그녀’라고 했었다. 태욱과 대화하는 동안 어쩌면 그동안 팔찌의 주인을 원하는 무족이 비단 그 남자뿐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태욱이 그녀를 지켜 주겠다는 말을 한 거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행복에 겨워 하하 호호 하고 있는 동안 태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잠깐 혼자 있게 해 줘요.”
“하나만 약속해. 화를 내도 되고 뭐든 해도 되는데 집은 나가지 마.”
“방에 있을 테니까 이제 그만 놔줘요.”
그제야 꼭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 유주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살면서 큰 욕심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평범하게 사는 것.
바란 건 그것뿐이었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 * *
조두명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이준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지금 나 겁주려고 급하게 꾸며 낸 이야기 아니야?”
“오래전부터 종족들 사이에 특별한 존재가 나타날 거라는 말이 전해져 오기는 했었어.”
“특별한 존재?”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능력을 가진 자.”
“그게 강태욱이라는 거야?”
“글쎄. 강진만 회장 사건 때도…….”
“됐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계획이 있기는 해?”
서두른다고 될 일이었으면 진작 행동으로 옮겼을 거다. 강진만 회장 사건 이후로 선뜻 동참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긴 시간 인내하며 이를 갈며 기다렸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해.”
“도끼 자루 다 썩겠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로 기껏 입 아프게 옛날이야기까지 해 줬더니 저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조두명은 혀를 쯧 찼다.
“마지막 경고야. 두 번 다시 함부로 행동하지 마. 또다시 주제 파악 못 하고 설쳐 대면 아무리 너를 보호하라고…….”
“누가 나를 보호하라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