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카메라에 대해서 더 알아낸 거 없어?”
“흔하게 살 수 있는 제품이라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게다가 주변 누구도 그곳에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엔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을 수 있겠지 기대했는데, 누가 설치를 했는지 그 남자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준 돌아왔다고 했지?”
“네, 일본에서 어제 돌아왔습니다. 지금 오피스텔에 있다고 합니다.”
“요즘 파주는 안 가나 보네.”
태욱이 이준을 계속 신경 쓰는 게 그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질투일까.
후자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감히 물어보지는 못하겠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박 비서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최현성이라는 분이 회장님을 뵙게 해 달라고 몇 시간 째 로비에 있습니다. 제가 내려가서 안 된다고 했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무실을 막 나가려고 하는데 태욱이 불러 세웠다.
“올라오라고 해.”
“회장님께서 직접…….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약속 없이 태욱을 만날 수 있던 사람은 본부장이었던 박재명 사장밖에 없었다. 본사로 온 뒤로는 비서실로 연락을 하는 편인데 여전히 가끔 예고 없이 들이닥칠 때도 있다.
구 실장은 밖으로 나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박 비서를 쳐다보았다.
“박 비서, 이런 일은 나한테 먼저 보고를 했어야지! 신원 확인했어?”
“네, 우리 쪽입니다. 27살, 하남에 있는 체육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올해 결혼했고 현재 아내가 임신 4개월째입니다. 그 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가서 데리고 와.”
잠시 후 서글서글한 인상에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박 비서와 함께 들어왔다. 20대라고 하기엔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였다.
“비서실장 구동주입니다. 회장님을 뵙겠다고 한 이유를 짧게 설명해 주시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말을 해 봤자 먹힐 것 같지가 않았다. 태욱을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 노크를 하고 안으로 안내했다.
“구 실장은 나가고 최현성 씨, 편하게 앉아요.”
태욱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막무가내로 찾아온 사람을 그가 상대할 필요는 없지만 뭐든 하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았다.
유주는 이상훈의 차를 타고 떠난 뒤 핸드폰까지 차단했다. 그와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답한데다 반란 세력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해 머리가 지근거렸다.
“서서 이야기할 건가?”
“회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갑자기 무릎을 꿇은 최현성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욱은 턱을 느리게 쓸었다.
“무슨 죽을죄?”
“전 맹세코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절대 그쪽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최현성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모친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죽었고 부친도 돌보지 않아 친척 집에서 자랐다고.
좋은 환경은 아니었는지 13살 때 집을 나왔다고 했다.
“…….”
무족은 아이를 위한 돌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부친이 어려운 상황이거나 다른 누군가가 맡게 되면 양육비를 지원해 준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도 따로 있다.
문제는 관리를 하고 있음에도 돈만 받고 제대로 케어해 주지 않는 못된 자들이 있다는 거다.
“14년 전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게는 은인 같은 분입니다. 공부도 할 수 있게 해 줬고 운동도 꾸준히…….”
“용건만 간단히.”
머리가 지근거려 잠시 시간을 냈을 뿐 남의 하소연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인내심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전 정말 회장님을…….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짜 몰랐습니다.”
후우, 태욱은 벌떡 일어나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길게 뿜어낸 뒤 천천히 돌아서서 최현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죽을죄라는 게 혹시 내 목숨과 관련된 일인가?”
* * *
태욱은 거칠게 차를 몰았다. 최현성이 나가고 구 실장과 대화를 하는 도중 핸드폰으로 유주한테 문자가 왔다.
[나 지금 퇴근해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했더니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구 실장한테 짧게 지시만 한 뒤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얼굴을 본 적은 없습니다. 처음에 갑자기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어떤 방이었습니다. 그때도 목소리만 들었습니다.’
도와주겠다는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돈을 줘서 얼굴 없는 천사인 줄 알았다고 했다.
‘석 달 전에 저를 도와준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그분이 제게 더는 우리 종족이 강씨 집안의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는 강씨 핏줄에서 종주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면서 함께하자고 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왜 그를 찾아올 결심을 했는지 물었다. 아이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처럼 엄마 아빠 없이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고.
“누굴까?”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자, 긴 시간 도움을 주면서 의지하게 한 뒤 반란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자.
최현성은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쯤 구 실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회장님, 방금 전 기사가 났는데 김우석이 죽었습니다.
“갑자기 왜?”
-도우미가 발견했다는데 사인은 심장 마비랍니다. 일단 자세히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짧게 더 통화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김우석을 지켜봤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지난달 건강 검진을 받았을 때 구 실장이 확인했다고 했다. 별 이상은 없다고 했는데 심장 마비라니.
“혹시 그자의 소행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자이기에 이토록 꽁꽁 숨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눈에 띄는 액션을 취하면 이토록 답답하지는 않을 텐데, 계속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후우.”
태욱은 긴 한숨을 토해 내고 차에서 내려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유주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은 척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면서 이렇게 인내심이 간당간당했던 적은 없었다. 회사로 찾아갈 수는 있었다. 유주가 그의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믿음, 반란 세력을 하루빨리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참았다.
그마저도 이젠 한계에 도달해서 오늘은 기필코 회사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민유주.”
불러도 대답도 없다. 태욱은 유주를 빤히 응시하다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제야 노트북을 덮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차 줄까요?”
“아니.”
“퇴근 시간쯤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만약 10분만 늦게 문자를 보냈다면 내가 회사로 찾아갔을 거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무슨 생각?”
“우리 관계에 대한 많은 생각이요. 우리가 따로 사는 것도…….”
“이 집에서 나가겠다는 거야?”
유주는 평온해 보였다. 마치 고요한 호수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문자를 받고 무작정 달려오면서 유주가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정으로 그를 대할지 상상한 것 중 이런 모습은 없었다.
“그건 안 돼.”
* * *
조두명은 약초를 피워 놓고 차를 준비해서 식탁에 앉았다. 습관처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를 수시로 마셔도 이 잔을 사용하는 건 하루에 딱 한 번뿐이다.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똑같이 만든 두 개의 잔을 보여 주며 수줍게 웃던 여인이 떠오르자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단지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인데, 바라는 건 그의 작은 마음 한 자락이면 충분하다던 순진한 여자.
긴 시간 한결같은 여인을 생각하면 심장이 묵직하게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감정이지.”
두명은 감정의 파문을 재빨리 밀어내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쿵쿵,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김우석 영감 짓이지?”
대꾸를 하지 않자 이준이 식탁을 쾅, 내리쳤다. 식탁이 박살 나고 깨진 찻잔의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귓구멍이 막혔나 내 말 안 들려?”
언제까지 저 싸가지 없는 놈을 놔둬야 하는 걸까? 저놈 하나 죽인다고 계획에 차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살려 두라는 건지.
“뭘 보고 있는 거야? 이거 아끼는 찻잔이야?”
깨진 찻잔을 발로 툭툭 치는 걸 보는 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동시에 이준의 몸이 저만치 날아가 벽에 쿵 부딪히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내 발딱 일어서더니 피식피식 웃었다.
“영감. 혹시 애인 있어?”
“…….”
“애인이 사 준 찻잔을 내가 박살 낸 거면 엄청 미안한데. 알았어. 일단 진정하고 우리 대화로 합시다.”
두명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홱 돌아서서 소파로 가 앉았다. 이준이 득달같이 달려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김우석 왜 죽였어?”
“배신의 대가는 죽음뿐이다.”
“배신?”
“너 또한 다르지 않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젠 툭하면 협박이네.”
멍청한 이준이 김우석을 찾아갔다고 했다.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 지금까지 돈을 주는 날짜를 어긴 적이 없는데 이틀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겨우 연락이 닿아 만났다. 처음엔 요즘 형편이 좋지 않다면서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더니 결국 이실직고했다.
‘이준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이제 나도 여력이 안 돼서 그만해야 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