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왜 전화를 안 받아?”
유주는 상훈의 차에 타자마자 ‘질문 사절’이라고 한 뒤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별장에 도착해서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상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태욱과 더 대화는 하기 싫고 생각나는 사람이 상훈밖에 없었다.
마침 원주에 있다고 하기에 혹시 휴게소로 와 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모르는 번호라서요. 답답하면 문자 보내겠죠. 이제 입에 자물쇠 푼 거예요?”
“아니.”
“원주에서 1시간 넘게 달려온 사람한테…….”
“거절하지 않고 와 줘서 고마워.”
“선배 부탁을 내가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
“넌 왜 그렇게 착한 거야?”
“선배한테만 그래요. 알면서.”
유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훈에게 문자를 보내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지만 태욱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었다.
‘오픈하자. 지금 말고 나중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단순히 즐기는 관계였다면 이렇게까지 절망스럽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기를 바랐는데 그동안 태욱의 모든 행동이 위선이었다는 확신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뿅 사라지고 싶었다.
휴게소 화장실에서 나와 상훈의 차가 주차하는 걸 보고 바로 올라탔다. 태욱에게 문자만 보내고 핸드폰을 꺼 버렸다.
“상훈아.”
“뭐든 말해요. 선배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줄게요.”
“선배 말고 대리님.”
“난 선배라고 부르는 게 좋은데.”
“그냥 하는 소리야. 물어볼 게 있는데 넌 연애 안 해?”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보면…….”
상훈이 힐끔 눈치를 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회사에서 둘이 자주 붙어 다니다 보니 한동안 주변에서 사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상훈이 선배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
“사실은 나 만나는 사람 있어요.”
“정말? 와, 전혀 내색도 없더니.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속인 게 아니라 말을 안 한 거죠. 선배처럼.”
“뭐?”
“선배 만나는 사람 있잖아요. 선배가 말을 안 해서 모른 척한 거지 나 그 정도로 눈치 없지 않아요.”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했고 그녀가 보기에도 그랬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이 있다니 깜짝 놀랐다가 왠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혹시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선배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근데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문자도 자주 하고 전화는 꼭 밖에 나가서 받고 퇴근 시간만 되면 얼굴이 활짝 펴고. 그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몰라요?”
“나는 그렇게 티를 냈는데 너는…….”
“우리는 자주 못 봐요. 워낙 바쁜 사람이라 어느 땐 한 달에 한 번도 못 볼 때가 많아요. 연락도 자주 못 하는 편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야?”
“선배도 누군지 말할 거예요?”
유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태욱의 존재를 말하는 건 망설여졌다. 두 사람 관계를 더는 숨기지 말고 오픈해야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오늘 갑자기 툭 던지듯 말할 생각은 없었다.
진짜 팔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커져 태욱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 꺼낸 카드였다. 그런데 시간이 필요하단다.
입 안이 소태를 삼킨 것처럼 쓰디썼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많이 유명해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거든요.”
“반짝반짝? 인기 스타야? 배우? 가수?”
“선배가 오픈하면 나도 할게요.”
“…….”
“우리 상대를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가볍게 대화할까요?”
“아니, 그냥 조용히 가자.”
“음,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테고 혹시 다퉜어요?”
“그냥. 나 혼자 화가 난 거야.”
유주는 팔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더 칸의 회장인 태욱이 대뜸 그녀한테 연애를 하자고 한 것부터 이상한 거였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시작했다.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으니까.
“왜 화가 났는데요?”
“그 사람이 속인 게 있거든.”
“속인 게 아니라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거 아닐까요?”
“그게 그거지.”
“속인 거와 사정이 있어서 말을 못 한 건 다르다고 보는데. 난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상대한테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 안 해요.”
“그게 만약 이해할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은 거라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선배가 그 정도로 말을 한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데. 일단 그 사람이 내 곁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볼 것 같아요.”
태욱이 곁에 없는 상황, 생각만 해도 심장이 욱신욱신 쑤셨다. 모든 게 거짓이었다고 해도 태욱을 향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푹 빠진 것 같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태욱은 여전히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다.
유주는 팔찌를 꽉 움켜잡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퍼뜩 떠올랐다.
‘진짜 팔찌를 하고 있었네.’
‘돈이 되는 건 팔찌가 아니라 민유주 너야.’
‘이유는 네 주인이 될 자가 알려 줄 거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산책로.
그날 그곳에서 만난 남자는 팔찌에 관심을 보였었다. 유주는 두통이 점점 심해져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등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선배, 왜 그래요?”
“머리, 머리가…….”
“잠시만요.”
상훈이 급하게 차를 갓길에 멈추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갑자기 왜. 무슨 일이에요?”
상훈의 말이 웅웅 울렸다. 펜션에서 헛것을 본 게 아니다. 그녀를 끌고 가려고 했던 그 남자의 눈동자도 회색이었다.
‘누구냐?’
아, 이건 태욱의 목소리다. 그곳에 태욱이 있었어!
이후에 필름이 뚝 끊긴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유주는 축 늘어져서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시간이 지나자 두통이 서서히 사라졌다.
“선배, 괜찮아요?”
“상훈아.”
“왜요? 어떻게 해 줄까요? 물, 물 마실래요?”
“이 손 좀 놔 줄래?”
“아,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바싹 다가와 있던 상훈이 황급히 그녀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표정을 보니 진짜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너 손이 굉장히 뜨거운데 열 있는 거 아니야?”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해 놓고 지금 그게 문제예요?”
“손이 너무 뜨거우니까 그렇지.”
“나 원래 뜨거운……. 후우, 무슨 일 생기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미안. 이제 괜찮아. 운전 내가 할까?”
“운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상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유주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진짜 괜찮은 거죠?”
“괜찮으니까 속도 좀 낼래?”
“싫어요. 안전 운전 할 거예요.”
“나 회사까지 가야 해.”
“월차 냈다면서 회사는 왜요?”
“차가 회사에 있어. 미안한데 나 눈 좀 붙일게.”
“말 안 시킬 테니까 편하게 자요.”
“땡큐.”
눈을 감고 다시 그날을 떠올렸다. 그 남자가 원한 건 팔찌를 하고 있는 그녀였다. 이후의 상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태욱이 그곳에 있었고 그 남자를 본 건 확실하다.
더 칸의 회장, 무족의 종주.
태욱은 그동안 그녀를 얼마나 많이 속인 걸까.
* * *
구 실장은 요즘 계속 심기가 불편한 태욱을 지켜보면서 숨 쉬는 것조차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박 사장은?”
“내일 12시쯤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부산 일정에 은행 쪽도 포함시키고 박 사장한테 연락해서 그쪽으로 가라고 해.”
“부산은 회장님께서…….”
“골치 아픈 사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틀 정도 쉬었다 오라고 해.”
박재명 사장은 베트남에 있는 전자 회사에 문제가 생겨 급하게 떠났다. 그쪽 일을 마무리하고 곧장 미국으로 가서 3박 4일을 보낸 뒤 이틀 전에 일본에 도착했다.
원래 미국과 일본 출장은 태욱이 갔어야 했는데 재명에게 다녀오라고 지시했다. 그때도 전화로 엄청 투덜댔었다.
함께 출장 중인 금 비서 말로는 빡빡한 일정 탓에 신경이 매우 예민해 있다고 하던데, 이런 상황에서 박재명 사장한테 부산까지 들렀다 오라고 하면 길길이 날뛸 게 뻔했다.
“왜 대답이 없어?”
“알겠습니다.”
“신 비서한테 연락 온 건 없어?”
“2시 이후에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오늘도 회사에만 있는 거 같습니다.”
“끌고 나올 수도 없고.”
구 실장은 차라리 그 방법을 쓰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꾹 삼켰다.
태욱은 터지기 일보 직전인 시한폭탄 같았다. 살짝만 건드려도 펑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랑싸움을 했는지 민유주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단다.
‘퇴근을 안 해요.’
회사에서 외출은 물론 퇴근도 하지 않다가 주말 내내 신입 직원 원룸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주말에 찾아갈 줄 알았던 태욱은 출근을 했고 화요일인 오늘까지 지켜보라는 것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반란 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텐데, 하필 이럴 때 민유주까지 태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건 뭔지.
“회장님, 민유주 씨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결재 서류에 거침없이 사인을 하던 태욱의 손이 뚝 멈췄다. 이내 사인을 마치고 서류를 탁 덮었다.
구 실장은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 같아 심장이 바싹 쪼그라들었다.
“별일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는 태욱이 전에 없이 ‘건드리면 죽는다’는 아우라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엔 민유주에 대한 태욱의 관심과 보호가 여자가 아닌 다른 의미인 줄 알았다. 그런데 흠뻑 빠져서 이젠 민유주가 태욱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