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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46화 (47/69)

46화

“제가 그 정도 능력도 없이 의원님을 찾아왔겠습니까? 설사 제 계획이 잘못되더라도 의원님은 잃을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전 아닙니다. 목숨을 거는 일인데 그 정도 능력은 당연히 있죠.”

그동안 현금으로만 줬으니 조두명이 사라지면 증거는 없어진다.

그렇다고 섣불리 이준을 믿었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위험해지지 않을까?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영감 주변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아는 거 있습니까?”

“전혀 말을 안 했어. 내가 아는 건 자네뿐이야.”

“역시나 그렇군요. 전 민유주가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인터뷰 때문에 몇 번 만났는데 좋은 여자더군요.”

“…….”

“의원님이 저를 따로 도와주실 필요는 없고 조두명한테 돈만 보태지 않으면 됩니다. 절대 의원님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썩 믿음이 가는 건 아니지만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석은 더 고민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좋아. 자네를 믿어 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같은 배를 탔다는 의미로 악수 한 번 할까요?”

이준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손을 잡기는 했는데 두툼한 남자 손에 얼굴은 여자,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데이트 즐거웠습니다.”

이준이 나간 뒤 우석은 잠시 고민하다 골프 약속을 취소했다. 그가 손해를 볼 건 없을 것 같은데 뭔가 꺼림칙한 느낌은 들었다.

조두명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끊어 내면 그만인데 정말 이준이 민유주를 현수 손에 쥐여 줄까?

“두고 보면 알겠지.”

민유주가 현수의 아이를 낳기만 하면 설사 이준 아니라 다른 누가 종주가 된다고 해도 판세가 확 달라질 수 있다. 걱정인 건 현수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다.

권력, 명예, 승부욕은 전혀 없고 오로지 즐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놈이라 걱정이 태산이었다.

“팔찌 주인이 제 놈 게 되면 달라지겠지.”

테이블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우석은 화면에 뜬 ‘명’을 보는 순간 고민도 하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 * *

유주는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태욱을 쳐다보았다.

“비밀이에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문득 치료하는 거 말고 다른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태욱 씨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싶어 물어본 건데 말하기 곤란하면…….”

“곤란할 건 없지.”

“그럼 말해 줘요.”

그녀가 생긋 웃자 태욱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는 작은 상처만 치료할 수 있는 정도고, 성인이 되면 힘과 체력 모든 게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어느 정도로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음, 상상이 안 되는데. 모든 무족이 다 그래요?”

“개인마다 힘과 능력의 차이는 있어.”

유주는 태욱의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인이 되기 전 일정 기간 수련을 받게 되는데 그때 스스로 힘을 절제하고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본인의 능력을 이용해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고 있다고.

무족은 그들만의 법과 규칙이 있다는 말을 한 뒤 조용해서 돌아봤더니 태욱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내가 무족의 종주야.”

“아.”

“생각보다 놀란 표정은 아니네?”

“놀라기는 했는데, 태욱 씨가 더 칸의 회장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만큼은 아니에요.”

유주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바닷바람이 싸늘하지만 긴장을 해서인지 추운 줄도 모르겠다.

“태욱 씨, 나 부탁이 있어요.”

“부탁?”

“이 팔찌 끊어 줄 수 있어요?”

그녀가 손을 내밀자 태욱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이내 팔찌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 끄라비 갔을 때 충동적으로 산 건데, 아무리 해도 풀어지지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계속하고 있었어요.”

“…….”

“태욱 씨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요.”

“불가능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절대 뺄 수 없는, 무족의 희망과 같은 팔찌.

그래서 종주인 태욱이 그녀를 곁에 두는 거라고 했었다. 이준이 한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이 팔찌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요?”

“오늘따라 이상하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왜 내가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팔찌를 끊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불가능하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뭔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드는데…….”

“유주야.”

“알고 있는 게 뭔데요?”

그녀는 팔찌가 무족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희망이라고 하는지 궁금한 것보다 태욱의 진심이 알고 싶었다.

정말 이 팔찌 때문에 그녀를 곁에 두는 건지,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궁금했다.

“태욱 씨를 만난 게 팔찌를 하고 난 후였어요. 말도 안 된다는 거 아는데 혹시, 혹시 이 팔찌 때문에 태욱 씨가 나를……. 그런 거예요?”

“아니야.”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는데 왜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걸까.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태욱의 표정이 평소와 달라서일까?

그는 마치 그녀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처럼,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 상자에 손을 대기라도 한 듯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왠지 화가 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런 말 할 타이밍은 아닌 거 같은데. 우리 관계 오픈해요.”

“…….”

“나 이제 숨기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왜 마음이 변한 건데?”

“갑자기가 아니라 계속 생각했었어요. 태욱 씨가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요?”

“바라던 바야. 오픈하자.”

“진심이에요?”

“지금 말고 나중에. 시간이 조금 필요해.”

절망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유주는 허탈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시간. 그렇구나.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 * *

태욱은 문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별장으로 돌아가서 유주는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돌아가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금 당장 혼자라도 올라갈래요.’

은근히 고집이 세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출발했다. 휴게소까지 오는 동안 대화를 시도했지만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 화장실에 들어가는 걸 봤고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구 실장한테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는 도중 재명에게 문자가 계속 들어왔다.

업무에 관련된 거라 무시할 수가 없어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 문자를 주고받은 건 고작 몇 분 되지도 않는데 그사이 사달이 났다.

[나 상훈이 차 타고 가요.]

하아, 황당하면서도 화가 나 핸들을 탁 내리쳤다.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후우, 아니야. 박 비서가 발견했다는 게 뭐야?”

-초소형 카메라입니다.

“카메라?”

-액자에 숨겨져 있는 걸 찾았습니다. 누군가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회사까지 2시간 정도 걸릴 거야. 가서 이야기해.”

전화를 끊고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카메라가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유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욱 씨, 치료하는 거 말고 다른 능력도 있어요?’

설마 유주가 그 장면을 본 건가?

봤다고 하기엔 팔찌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솔직하게 말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유주가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다쳤을 때의 기억이 돌아왔나?”

그동안 유주는 팔찌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만약 그날 남자가 팔찌를 언급했고 그때의 기억이 돌아온 거라면, 생각이 그쪽으로 미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태욱은 액셀을 힘껏 밟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주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젠장.”

하필 반란 세력이 있다는 게 확실해진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오픈하자고 하는지.

원하는 바지만 유주를 드러내서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이상훈한테 연락은 언제 한 거야?”

별장에서 같이 나와 곧장 출발했고 유주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 연락을 했든 이상훈이 서울에 있었다면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혹시 가까운 곳에 있었나?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이준만큼이나 거슬리는 존재지만 유주가 팔찌의 주인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손을 쓰지 않았다.

예민한 자라면 유주와 가까이 있으니 가장 먼저 눈치챌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예전엔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대학 때 은정과 친해지면서 조금씩 변했어요. 그리고 입사해서 상훈이…….’

전부터 유주가 이상훈을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온 걸 보니 혹시 사심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후배 이상의 감정은 전혀 없다는 유주를 믿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태욱은 구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상훈 핸드폰 번호 지금 문자로 보내.”

-이상훈이라면.

“유주와 같이 근무하는 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들어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다 말고 뚝 끊겼다. 다시 전화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유주 핸드폰은 꺼져 있고 이상훈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태욱은 짜증이 나 속도를 더 높이고 정면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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