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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45화 (46/69)

45화 |김키|

태욱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았다.

“일출 보고 싶었는데.”

“지금 나가면 볼 수 있을 거야.”

방금 전까지 손가락도 까닥하기 힘들었는데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씻고 나가면 추울 테니까 잠깐 기다려.”

태욱이 그녀의 볼에 쪽 입을 맞추고 침대에서 내려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잠시 후 바지만 입고 다가와서 처음 보는 옷을 시트 위에 내려놓았다. 속옷까지 있었다.

“옷을 몇 벌 준비해 놨어. 겉옷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입어.”

문득 태욱의 집 드레스 룸이 떠올랐다. 짐이 옮겨진 날 둘러봤더니 한쪽 드레스 룸이 그녀의 옷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고마워요.”

“입혀 줄까?”

“내가 입을게요. 태욱 씨도 얼른 옷 입어요.”

빠르게 옷을 입고 드레스 룸으로 가 태욱과 같은 패딩을 꺼내 들었다. 태욱이 가져가서 옷을 활짝 펼쳤다.

유주는 방긋 웃으며 옷을 입고 지퍼를 올려 주는 태욱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됐다. 가자.”

“태욱 씨는 참 다정한 거 같아요.”

“너한테만 그래.”

민유주한테만 다정한 사람, 민유주만 사랑하는 남자.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일출 안 볼 거야?”

“빨리 나가요.”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제법 싸늘하고 주변은 어둑했다. 손을 꼭 마주 잡고 정원 끝에 서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와, 조금만 늦었으면 못 봤겠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수평선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맛집을 찾아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일출을 볼 기회는 없었다. 딱 한 번 은정과 제주도에 갔을 때 목 빠지게 기다렸는데 이틀 내내 날이 흐려 제대로 보지 못했다.

붉은 기운이 점점 진해지더니 태양이 빠끔 모습을 드러냈다.

유주는 심장이 벅차올라 가슴을 꾹 눌렀다.

“키스하고 싶은데.”

“안 돼요.”

단호하게 말하자 태욱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품으로 당겨 안았다.

“태양한테 질투하는 날이 올 줄이야.”

절대 눈을 떼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시선이 저절로 태욱에게 향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만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순간이든 네가 나만 봤으면 좋겠어.”

오로지 당신뿐이었고 당신만 보고 있었어요.

태욱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절망적인 진실이라고 해도 사실을 말해 줬으면 좋겠다. 진실과 상관없이 태욱을 만나 뜨겁게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었다.

5살 때 그녀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

비록 이후의 시간이 평탄하지 않았지만 태욱이 없었다면 그녀는 민유주가 되지 못했겠지.

유주는 방그레 웃으며 태욱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반쯤 올라온 태양이 지평선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출렁이는 바다, 점점 밝아 오는 하늘.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벅찬 감동에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뭐 하고 싶어? 피곤하면 한숨 잘래?”

“일단 씻고 우리 아침 먹으러 가요. 지난번 식사했던 곳 맞은편 식당 어때요?”

“황태 해장국?”

“네. 7시에 오픈한다고 쓰여 있는 거 봤어요.”

“아주머니가 준비해 놨을 텐데. 그래. 가자.”

두 사람은 각자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태욱이 같이 씻자고 하는 걸 고민하는 척하다 거실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식사를 하고 아직 문을 연 커피숍이 없어 근처 편의점에서 따듯한 커피를 사 바닷가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유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 * *

김우석은 황당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꼴을 다 보겠다. 이 시간에 갑자기 전화를 한 것도 기가 막힌데,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에 따로 약속 시간을 잡을 줄 알았다.

집 앞에 왔다고 해서 마지못해 문을 열어 주었더니 몰골을 보는 순간 기가 차 한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사이였던가?”

“이제부터 알면 되죠.”

“유명 배우인 건 알겠는데 이 시간에 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 차림으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차라리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 변장을 할 것이지, 젊은 여자가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처음엔 모자를 벗었는데도 몰라봤다.

몇 년 전 모 드라마에서 이준이 쌍둥이 여동생 역할까지 1인 2역을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별 관심이 없어 대충 읽고 말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진짜 여자라도 믿겠다 싶었다.

“할 말이라는 게 뭔가?”

“밤새 놀았더니 목이 타서. 물 한 잔 주세요.”

“집에 나 혼자야. 초대를 한 것도 아니고 이른 새벽에 찾아온 불청객한테 손님 접대까지 해야 해?”

“지금이 새벽인가?”

“뭐야?”

“잠을 못 주무셨나 까칠하시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죠. 실례 좀 하겠습니다.”

예의를 물 말아 처먹은 놈이네. 누가 알면 제 놈 집인 줄 알겠다.

김우석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켜는 이준을 쳐다보며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생수 한 병을 비우고 하나를 더 꺼내 다가온 이준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의원님, 아, 전 의원님이라고 해야 하나?”

“집 앞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오라고 했는데 골프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해. 용건만 말해.”

“조두명 씨 아시죠? 다 알고 왔으니까 거짓말은 하지 마시고.”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난 모르는 사람이야.”

“이렇게 나오면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우석은 어금니를 지그시 사리물었다. 조두명을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연락을 하고 지낸 건 몇 년 되지 않는다.

‘의원님 같은 분을 종주나 원로들이 무시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처음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 그러다 조두명이 알아서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반드시 강씨 핏줄을 끊어 낼 겁니다.’

안 그래도 종주를 비롯한 원로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터라 잘됐다 싶어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그와의 관계는 절대 함구하기로 단단히 약속을 받았다.

“제가 왜 강태욱 회장이 아닌 의원님을 찾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동안 조두명 그 영감이 의원님과 저를 기만했기 때문입니다.”

“기만?”

“혹시 의원님이나 의원님 아들 김현수 씨를 종주로 만들어 줄 것처럼 하지 않았습니까?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런 뉘앙스를 꽤 풍겼을 겁니다. 저한테도 그랬거든요.”

“내 아들 현수는 이 일과 전혀 상관이 없어.”

“말 빙빙 돌리는 거 싫어합니다. 이제 그만 툭 터놓고 대화하시죠.”

우석은 의심의 눈초리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조두명에 대해서 아는 건 이준의 집에서 거주한다는 것과 도움을 주는 자가 몇 명 더 있다는 것뿐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개인적인 연락을 철저히 막고 있어 알려 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그렇게까지 조심한다면 그와의 약속도 지킬 거라고 확신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위험한 일에 발 담글 생각 없어.”

“몇 년 동안 돈을 엄청 보탰던데, 그 정도면 이미 푹 담그고 계신 거죠.”

“도대체 날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뭐야?”

“팔찌 주인이 민유주인 건 아실 테고. 그 여자 제 손안에 있습니다.”

“웃기는 소리. 이미 강 회장이…….”

“곧 강태욱 회장을 떠날 겁니다. 영감은 이용만 하고 죽일 생각인 거 같던데 의원님이 그 여자를 원한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석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는 지금까지 조두명이 하는 일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고 돈만 보태 주었다. 그러다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현수와 맺어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더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고작 팔찌 주인 때문에 대사를 망칠 수는 없습니다.’

강태욱이 나서면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보탠 돈이 얼마인데!

서운하다는 티를 냈더니 더 큰 꿈을 꾸라며 은근히 현수를 종주로 추대할 것처럼 말했었다.

“자네 손안에 있다면서 굳이 날 도와주겠다는 의도가 뭐야?”

“나한테는 필요 없는 존재라서요. 전 남자를 좋아합니다. 우리 서로 각자의 취향은 존중해 줍시다.”

“취향?”

“의원님이 여자 둘하고 질퍽하게 노는 걸 좋아한다는 거 압니다. 요즘도 그런 취향인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 찍은 사진이 있더군요. 구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사진이…… 있다고?”

“그 사진 누가 찍었을 거 같습니까?”

“너 정체가 뭐야?”

“인기 배우 이준?”

씨익 웃는 모습을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스캔들이 터졌을 때가 딱 세 번째였다.

겨우 수습을 하기는 했는데 하필 선거 직전이라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때 분명 조두명이 사진을 모두 회수했다고 했었는데 설마 남아 있는 게 있었나?

“설마 내가 조두명의 꼼수에 놀아난 건가?”

“빙고. 그 사진 영감이 갖고 있었거든요.”

개새끼. 우석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동안 철저하게 그를 이용해 먹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어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랐다.

“제가 의원님과 아드님을 돕겠습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난 조두명과 달라요.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겁니다. 민유주가 강 회장한테 벗어나는 순간 낚아채서 아들한테 보내요.”

팔찌 주인과 내 아들 현수,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게 없겠지.

우석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조두명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손에 쥐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 조두명을 처리할 자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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