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태욱은 정원을 천천히 돌았다. 아직 유주는 퇴근을 하지 않았다. 통화는 짧게 한 번 했고 일이 많은지 문자를 보내면 한참 후에 답장을 보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막 꺼내 드는 찰나 구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말해.”
-유원, 본명은 유진원입니다. 가족은 없고 단역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단역 배우?”
-드라마에 두 번 정도 출연했고, 연극배우로도 잠깐 활동했는데 이름이 알려진 자는 아닙니다. 현재 하는 일은 없습니다. 드라마에 출연할 때 두 번 다 이준이 주연이었습니다.
“또 이준인가?”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2년 전 촬영 이후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는 거 같습니다.
소이영도 그렇고 의심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태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에 둥근달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이준 지금 어디 있어?”
-민유주 씨가 나간 뒤 식당에 1시간쯤 더 있다가 오피스텔로 가서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더 알아낸 건?”
-유원 씨가 약에 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검사 결과 특이한 건 없었습니다.
“확실해?”
-네. 박 비서가 검사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횡설수설하는 자태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다 그가 힘을 쓰지도 않았는데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근처에 누군가 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리 없고, 그가 아는 한 멀리서 그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내일 제가 다시 가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불손한 자들이 있다는 게 확인된 이상 비상 상황임을 알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아니야. 내내 조용하다 내가 타깃인 걸 알린 이유가 있을 거야. 일단 조용히 5팀까지만 움직여.”
-알겠습니다.
태욱은 전화를 끊은 뒤 미간을 좁히며 턱을 느리게 쓸었다. 왜 굳이 그를 그쪽으로 오게 해서 반란 세력이 있다는 걸 알렸을까.
집은 몇 년째 비어 있는 상태였고 마을과 동떨어져 있어 최근 방문한 자가 있는지 봤다는 사람이 없다.
“누굴까?”
두려움, 불안. 살면서 그딴 감정을 느낀 적이 없는데 지금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유주가 곁에 있다.
유주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최대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너무 늦네.”
출발할 때 연락을 준다고 하더니 벌써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종 늦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처럼 퇴근이 늦은 적은 없었다.
태욱은 안으로 들어가 차 키를 챙겨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회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10분쯤 지났을 때 유주가 승강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주의 차 바로 옆에 주차를 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차를 막 지나칠 때 유리창을 내리고 유주를 불렀다.
“민유주.”
“…….”
“유주야?”
“어? 태욱 씨, 언제 왔어요?”
“일단 타.”
놀란 표정이더니 주변을 휙 둘러보고 냉큼 조수석에 올라탔다. 태욱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늦은 시간이라 주차장에 차가 거의 없기는 해도 회사까지 찾아왔다고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연락 준다더니. 회사에 무슨 일 생긴 거야?”
“정신이 없어서 전화하는 걸 깜박했어요. 오늘 중으로 마무리할 일이 좀 많았거든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피곤해서인지 많이 지쳐 보였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추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이내 방실 웃더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운전하기 싫었는데 와 줘서 고마워요.”
“민유주, 무슨 일 있지?”
“음. 집에 가서 말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있어요. 나 내일 월차 냈어요.”
“월차?”
“바다가 엄청 보고 싶어서요. 아침 일찍 출발해서 태욱 씨 퇴근 전에 돌아올게요.”
“지금 당장 가자.”
신호가 바뀐 걸 확인하고 곧장 차를 유턴한 뒤 속도를 높였다. 유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가자고요? 태욱 씨 내일 회사 안 가도 돼요?”
“마침 특별한 스케줄도 없고 우리 유주가 보고 싶다는데 당연히 같이 가야지. 전에 갔던 별장 어때? 다른 곳도 괜찮고.”
“어디든 상관없기는 한데,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내일 하루 쉴까 했는데 잘됐네. 잠시만.”
태욱은 별장 관리인과 짧게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유주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시간이 늦었잖아요. 괜히 나 때문에 그분들 귀찮게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신호 가자마자 전화 받았으니 괜찮아. 자고 있었으면 안 받았을 거야.”
“그래도.”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한숨 자.”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이더니 유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했는지 얼마 가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태욱은 차를 갓길에 세우고 의자를 뒤로 눕혀 준 뒤 뒷좌석에 있는 담요를 가져와 유주에게 덮어 주었다.
“…….”
잠든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오늘 일정은 이준을 만나는 것밖에 없었고,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 지 꽤 오래 함께 있었다고 했다.
“이준.”
유주에 대한 마음이 확고해지기 전에도 이준의 존재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었다.
소이영의 죽음 이후 의심은 가는데 증거를 찾지 못했고, 오늘 있었던 일에 또 이준의 이름이 나왔다.
만약 이준이 반란 세력과 관련이 있다면. 태욱은 정면을 매섭게 노려보며 속도를 높였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 4시가 가까웠다.
유주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
불이 환하게 켜진 거실은 벽난로를 피워 놔서 훈훈했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려고 하자 유주가 눈을 반짝 떴다.
“깼어?”
“침대 말고 욕실. 같이 샤워해요.”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금방 잠에서 깼다고 하기엔 유주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 * *
유주는 온몸의 세포가 미쳐 날뛰는 것 같은 쾌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미 욕실에서 한바탕 전쟁 같은 사랑을 나눴는데 침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 나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어?”
태욱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강렬한 몸짓에 그녀야말로 미칠 것 같다. 마치 거대한 화염에 휩쓸려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유주야.”
“으으응.”
“사랑해.”
유주는 헐떡대던 숨을 뚝 멈췄다. 그동안 태욱은 그녀가 사랑한다고 하면 ‘알아.’라고 했을 뿐 직접 말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태욱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처음 들어서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모습으로 충분히 느꼈기에 서운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었으니까.
“서운했어?”
“아니요. 말 안 해도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방그레 웃자 태욱이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이렇게 예쁜 유주가 어떻게 나한테 왔을까.”
“…….”
“내 인생은 너를 만나기 전과 많이 달라졌어. 이젠 네가 없으면 안 돼.”
열기 띤 눈동자, 다정한 손길, 이마에 닿는 뜨거운 입술.
유주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어금니를 꽉 물었다.
태욱을 만난 건 그녀의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욕심부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꽉 잡고 싶었다.
“안아 줘요.”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감자 잠시 멈췄던 태욱이 희미하게 웃었다. 진지하게 대화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준의 기사는 딱히 수정할 게 없어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남 부장한테 넘겼다. 남 부장은 굉장히 흥분한 기색이던데, 그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고민 끝에 퇴근하는 남 부장에게 하루만 쉬겠다고 했다.
‘강 회장 가까이 있으면 유주 씨가 위험합니다. 분명한 건 행운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머리 터지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주차장으로 내려왔더니 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 일부러 잠든 척했을 뿐 계속 깨어 있었다.
‘같이 샤워해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 대화를 하게 되면 많은 게 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태욱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
어쩌면 태욱과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도 했었다.
“사랑해요.”
이 고백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오늘이 끝이 아니기를.
유주는 악착같이 태욱에게 매달렸다.
“유주야.”
평소에도 태욱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게 좋았다. 민유주, 유주야.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태욱이라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내 남자, 내 사랑, 내 전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걸. 이준이 원망스러웠다.
“사랑해. 유주야.”
점점 강렬해지는 그의 몸짓에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끝없이 몰아치는 쾌감에 푹 빠져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
폭주하던 태욱이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유주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헐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