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43화 (44/69)

43화

“저 사람은 강태욱 회장이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 강태욱 회장으로 변장해서 저런 짓을 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왜 나한테 이런 걸…….”

“음, 유주 씨가 걱정돼서?”

좀 더 잔인한 강태욱의 모습을 보여 줬어야 했는데 너무 시시하게 끝났다. 유주는 모르겠지만 강태욱은 텔레비전 화면을 봤을 거다.

민유주를 떠올리고 미쳐 날뛸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넌 종주가 될 그릇이 아니다. 욕심을 부렸다가는 네 명을 재촉하게 될 거라는 걸 명심해.’

조두명은 애초에 그를 최고로 만들어 줄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그런 능력조차 없는 인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동안 허비했던 세월이 억울하고 분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니어야 그나마 덜 억울하지. 그렇다고 강태욱이 계속 종주 자리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유주 씨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강태욱 회장과 가까이 지내지 말아요.”

“…….”

“유주 씨.”

“네?”

“혼란스러운 건 알겠는데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강태욱과 민유주가 한집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만큼 강태욱이 민유주를 아낀다는 뜻이겠지.

조두명이 기다렸던 적당한 때가 다가온 것 같은데 가만히 있다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일단 조두명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만에 하나 틀어지면 민유주는 그의 마지막 보류가 되어야 한다.

“방금 본 강태욱 회장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 세상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

“무족이라는 존재인데 그동안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고 살아와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특별한 능력, 그녀가 알고 있는 건 무족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고 타인도 가능하다는 것뿐이다.

처음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여 깜짝 놀랐다. 카메라를 고정해 놨는지 태욱의 모습이 화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그러다 남자가 혼자 휙 날아가더니 귀 한쪽과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걸 봤다. 남자는 피를 토하다 죽은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건 태욱은 남자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태욱이 뭔가를 했다는 건가?

“나도 무족이에요. 그래서 유주 씨한테 꼭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강태욱 회장은 우리들 중 힘과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자입니다.”

“…….”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이용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예요. 할아버지인 전 회장도 강태욱이 죽였다고 들었어요.”

유주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지막으로 본 태욱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가 피를 토하다 죽었는데 놀란 기색은 전혀 없고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싸늘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먼저 약속을 받았어야 했는데. 방금 본 것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하는 말 전부 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

“강태욱 회장은 더더욱 안 됩니다. 유주 씨가 입을 열면 내가 죽을 수도 있어요.”

“네?”

“나 지금 유주 씨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약속할 수 있죠?”

충격으로 손이 덜덜 떨렸다. 화면을 통해 본 모습도 충격인데, 할아버지를 태욱이 죽였다고? 정말 그런 짓을 했을까?

유주는 두 손으로 주스 잔을 꼭 움켜잡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연거푸 한 뒤 이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만 꼭 확인을 할 게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대답부터 듣고 싶은데.”

“비밀 지킬게요.”

“유주 씨를 믿겠습니다. 이제 뭐든 물어봐요.”

“이 팔찌, 지난번에 했던 말 무슨 뜻이에요?”

태욱이 그녀한테 관심을 보인다면 팔찌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 말이 내내 걸렸는데 태욱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그 팔찌는 무족에게 희망 같은 거예요. 그래서 강태욱 회장이 유주 씨를 가까이 두는 겁니다.”

“…….”

“팔찌를 하고 나서 이상한 일 없었어요? 만약 느끼지 못했다면 강태욱 회장이 민유주 씨 모르게 처리했을 겁니다.”

끄라비에서 돌아온 기억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커다란 다람쥐와 펜션에서 봤던 회색 눈동자, 뱀과 우물.

시골집에서는 혼자였고 죽녹원과 펜션은 태욱이 함께 있었다.

‘악몽 꿨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요.’

구례에서 돌아와서도 한동안 신경이 쓰였지만 다시 가서 확인할 용기가 없어, 그녀가 헛것을 봤거나 상훈의 말처럼 꿈을 꾼 거겠지 생각했다.

태욱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도 그때 일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도대체 이 팔찌가 뭐기에.”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무족의 미래가 걸린 팔찌라는 것 정도만 말할게요.”

무족의 미래,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되고 대화를 할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유주는 목이 타서 물을 쭉 들이켰다.

“강태욱은 더 칸의 회장이자 무족의 종주입니다.”

“…….”

“우두머리란 뜻이죠. 무족은 오랫동안 그 팔찌의 주인을 기다렸어요. 그래서 종주인 강 회장이 유주 씨한테 관심을 갖는 겁니다.”

그럴 리가.

태욱은 단 한 번도 팔찌에 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한집에 살면서 같이 목욕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자는데, 늘 그녀가 하고 있는 팔찌에 관심이 전혀 없을 수가 있나?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녀한테 신경을 쓴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녀의 사소한 것까지 알고 싶어 하는 태욱의 성격이라면 한 번쯤 언급을 했을 법도 한데 전혀 없었다.

“이 팔찌 몇 번이나 빼려고 했는데 안 됐어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오직 주인만이 찰 수 있는 팔찌죠. 한 번 손에 채워지면 뺄 수 없어요.”

끄라비에서 그 할머니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유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팔을 스윽스윽 문질렀다.

“머리가 복잡하겠지만 정신 바싹 차려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강태욱 회장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요. 강 회장 가까이 있으면 유주 씨가 위험합니다. 팔찌의 주인이 된 건 불행이지만…….”

“불행이요?”

“분명한 건 행운은 아니라는 겁니다.”

코팅을 해서 고이 간직하고 있던 네잎클로버.

은정의 말처럼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준은 이 팔찌가 불행이란다. 태욱과 가까이 있으면 그녀가 위험하단다.

유주는 팔찌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죄송한데 그만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중으로 마무리할 게 있어서 7시까지 들어간다고 했거든요.”

“많이 놀랐나 보네. 나 이곳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요. 동생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조금 더 있다 가요.”

“제가 있어야 끝나는 일이라서요. 죄송해요.”

“대화를 더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근데 내가 만약 노트북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팔찌 이야기도 안 물어보려고 했어요?”

“그건 물어보려고 했어요.”

“그 말은 진짜 강태욱 회장한테 확인하지 않았다는 거네. 사실 유주 씨가 연기를 하나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놀랐어요.”

무족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내색을 하지 않은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이 그녀와 태욱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다음에는 식사해요.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같이 식사를 안 했네.”

“마감 끝내고 연락할게요.”

“난 언제든지 유주 씨가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울 겁니다. 유주 씨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내 말 꼭 기억해요.”

“이제 진짜 가 봐야겠어요.”

“먼저 가요. 난 동생 오면 식사하고 갈게요.”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유주는 건물을 나와 곧장 차에 올라탔다. 핸들을 꽉 움켜잡고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할아버지인 전 회장도 직접 죽였다고 들었어요.’

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직접 본 게 아니라는 건데 정말 태욱이 그런 짓을 했을까?

이준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은 들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종주인 강 회장이 유주 씨한테 관심을 갖는 겁니다.’

태욱의 말과 행동, 그 어떤 것도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만약 필요에 의해서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거라면, 진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태욱이 없는 일상, 단지 상상만 했는데도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듯이 아팠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닐 거야.”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유주는 심호흡을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