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42화 (43/69)

42화

주차장에 도착해서 출발하기 전 태욱에게 이준을 만나러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용건만 간단히.]

건물을 빠져나와 신호에 걸려 답장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어제 갑자기 병원을 가는 바람에 태욱과 대화는 하지 못했다.

처방해 준 약은 달랑 알약 하나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곧장 먹었는데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오늘은 향이 진한 차를 마셔도 아무렇지 않았다.

“냄새에 예민해진 건 해결이 된 거 같고.”

그녀가 태욱과 함께 병원에 갔다는 게 알려질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문득 계속 이렇게 숨기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네 건강과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녀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남들 시선을 의식하며 비밀 연애를 고집할 수는 없다. 그동안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준 태욱한테 미안해서라도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민유주, 용기를 내.”

유주는 숨을 깊게 들이켜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늦지 않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주차장도 넓고 3층까지 식당, 4층과 5층은 커피숍, 건물 위에 소 두 마리가 활짝 웃으며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모형이 있었다.

“음, 맛있는 냄새.”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 승강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5층은 개별 룸으로만 되어 있고 예약제로 운영한다고 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룸으로 들어갔다. 이준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네요.”

“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차가 좀 막혔어요.”

“약속 시간 어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유주 씨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유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살폈다. 스무 명 넘게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하늘색 블라인드는 모두 내려져 있고 한쪽 벽에 커다란 일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출렁이는 바다와 하늘이 붉게 물든 장면이 장관이었다.

“매니저가 아는 곳이라 몇 번 와 봤는데 이곳 사장님 아들이 유명한 사진작가래요.”

“아. 네. 혹시 기사 내용 중에 수정할 게 있나요?”

“매니저가 깔끔하게 잘 썼다고 칭찬했어요. 나도 같은 생각이고.”

“지난번에 추가할 게 있다고…….”

“너무 서두른다. 일단 차부터 주문해요. 난 키위주스, 유주 씨는요?”

“같은 걸로 할게요.”

이준이 주스와 쿠키, 케이크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이준이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있어서 그녀는 조용히 일출 사진만 응시했다.

잠시 후 직원이 주스 두 잔과 접시 세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갔다.

유주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오늘 유주 씨가 안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나온 걸 보면 내가 한 말을 강태욱 회장한테 안 한 거죠?”

“회장님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유주 씨 강심장이에요?”

“네?”

“오늘 많이 놀랄 거 같아서. 청심환 가져왔는데 먹을래요?”

“아, 괜찮아요.”

도대체 얼마나 놀랄 일이 있다고 청심환까지 가져왔단 말인가.

굳이 기사 내용을 추가하지 않아도 되고 팔찌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그다지 믿음이 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감상해 볼까요?”

유주는 씨익 웃으며 노트북을 펼치는 이준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준이 노트북을 같이 볼 수 있게 조금 떨어진 거리에 놓았다.

화면에는 넓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돌아앉아 있어서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곧 엄청난 광경을 보게 될 겁니다.”

* * *

태욱은 금 원장의 연락을 받고 곧장 출발했다. 원장실엔 금 원장 혼자 있었다.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지난번 입원했을 때 검사에서는 열이 높은 것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자궁 크기가 보통 사람에 비해 작다고 했는데, 그게 유주의 건강과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자궁벽이 얇은데다 난소 기능도 현저히 낮아서 박 과장 말로는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다른 문제가 없는 게 확실합니까?”

“네,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은 없습니다.”

어제 자궁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금 원장은 크게 낙심한 표정이지만 그는 유주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지난번 검사에는 없었는데 민유주 씨 혈액에 우리 종족의 세포가 아주 소량 발견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워낙 소량이기도 하고 평범한 사람한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안 되는 게 확실합니까?”

“네. 그보다 민유주 씨가 심하게 다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몇 달 사이 변한 걸 보면 그때 혹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산부인과 검사를 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가 딱 자르자 금 원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희 종족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팔찌 효능을 믿고 싶은 사람은 접니다. 하지만 유주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 없다는 내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만 아는 걸로 하죠.”

“회장님.”

“박 과장한테 입조심시키고 여사님한테도 함구하세요.”

태욱은 마지못해 대답하는 금 원장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막 차를 출발하려는 찰나 문자가 들어왔다.

“…….”

달랑 주소와 팔찌라고만 쓰여 있었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문자를 빤히 쳐다보다 내비에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주소뿐이라면 직접 가지 않았겠지만 팔찌를 언급한 게 마음에 걸렸다.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꽤 떨어진 낡은 주택이었다.

태욱은 차에서 내려 곧장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넓은 거실에 남자 혼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나한테 문자를 보낸 게 그쪽인가?”

“…….”

“누구냐?”

대답이 없어 천천히 다가갔다. 몇 걸음을 걷다 말고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 멈춰 섰다.

“종주, 이제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겠습니다.”

집 안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남자가 하는 말은 아니다. 태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텔레비전 옆에 있는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인 듯했다.

“종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다른 희생자는 없을 겁니다. 끝까지 버틴다면 비참한 최후를…….”

성큼 걸어가 스피커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제야 조용해졌다.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꿈쩍도 않고 앉아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

텔레비전 화면에 침대에 누워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는 검은 천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고 팔다리가 가죽 줄에 묶여 있었다. 한쪽 손목에 얼핏 팔찌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피아노 소리가 점점 커지고 화면에 커다란 손만 나타나 여자의 가슴을 움켜잡고 주물러 댔다.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튕겼다.

단숨에 주먹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박살 냈다.

“감히 이따위 짓을 한다는 건 죽음을 각오한 거겠지.”

여자가 유주가 아닌 걸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뜨자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남자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태욱은 거실 구석에 널브러진 남자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

모자가 벗겨져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입은 투명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테이프를 잡아떼자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이내 입맛을 다시며 흐흐흐,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 여자…… 끝내줬어.”

당장 목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고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동안 일어났던 사건의 배후는커녕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반란의 무리가 있다는 게 확실해진 이상 남자의 입을 열게 해야 한다. 죽이는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나한테 해 줄 말이 많아야 할 거다.”

“그 여자……흐흐흐, 내 거야. 내 거.”

“혀를 뽑아 버릴 수는 없고.”

남자의 귀가 뚝 떨어져 나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계속 헛소리만 해 댔다.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처음부터 이상한 느낌은 들었는데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눈에 초점이 없고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손가락 두 개가 더 잘려 나가도 실실 웃으며 그 여자, 내 거란 말만 반복했다.

“난 널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살고 싶으면…….”

갑자기 남자가 목을 움켜잡더니 붉은 피를 왈칵 토해 냈다.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를 토하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가까이 다가가 남자의 심장에 손을 댔다. 심장 박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남자가 죽었다. 그동안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고 있던 자가 증거를 남겼을 리 없겠지만 이번엔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은 뒤로 물러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구 실장, 지금 당장 이쪽으로 와.”

* * *

이준은 노트북을 덮고 유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표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둘 중 하나겠지. 믿지 않거나 이미 알고 있거나.

“지금 유주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혀 볼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