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41화 (42/69)

41화

“가서 확인해 볼 게 있어.”

“급한 거 아니면 잠깐만 있다 가면 안 돼요? 10분, 5분이라도.”

“오늘 좀 이상하네.”

태욱이 식탁에 앉아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끄라비에서 노점상 할머니한테 산 팔찌.

이준의 말을 믿는 건 절대 아닌데 이젠 의식도 되지 않는 팔찌가 요 며칠 자꾸 신경이 쓰였다.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찻잔을 들었다. 잔을 입에 막 대려는 찰나 속에서 뭔가 욱하고 올라와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냄새가 강해서. 윽.”

참으려고 해도 헛구역이 나와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태욱이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안 되겠다. 당장 병원 가자.”

“이러다 금방 괜찮아져요.”

“이런 적이 또 있었어?”

“몇 번 있었는데…….”

“할 말이 있는 거 같더니 혹시 임신한 거야?”

태욱의 목소리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유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임신 안 했어요.”

“확실해?”

“혹시 하고 며칠 전 테스터기로 검사해 봤어요.”

“병원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어찌할 사이도 없이 끌려가다시피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차가 곧장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잔뜩 굳은 표정인 태욱을 보니 뭔가 신경을 훅 긁고 지나갔다.

태욱을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녀는 계획 없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동안 태욱의 행동으로 봐서 그녀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혹시 임신한 거야?’

살짝 떨리던 목소리, 더할 수 없이 날카로운 눈빛.

계획에 없는 아이가 생겼을까 봐 걱정하는 태욱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반응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임신했을까 봐 겁나서 이러는 거예요?”

“아니라고 했으니 아닌 거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지금 불안한 거죠? 왜요? 연애 상대로만 생각했는데 발목 잡히게 될까 봐…….”

“민유주.”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태욱 씨 지금 행동 상당히 기분 나빠요.”

강태욱의 여자, 민유주의 남자.

두 사람의 관계가 평생 이어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안다. 그녀한테 행운 같은 존재임을 알기에 불투명한 미래 따위 생각하지 말고, 함께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 다짐했었다.

그동안 넘치도록 사랑받았고 단 한 번도 태욱을 향한 믿음이 흔들린 적은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태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고 기분이 나빴다.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내가 걱정하는 건 유주 너야.”

“…….”

“아까 식사하면서 잠깐 통화한 사람이 병원 원장님이야. 마침 병원을 가야 하는 상황이고, 나 때문에 네가 냄새에 예민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

“검사받아 보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면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런 말을 왜 지금 하는 건지.

유주는 가만히 듣고 있다 성급하게 화를 낸 게 부끄러워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단 한 순간도 우리 관계를 가볍게 생각한 적 없고,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 네 건강과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잠시 불끈했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가능한 두 사람의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하는 그녀와 달리 태욱은 요즘 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 사람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미안해요. 내가 말을 심하게 했어요.”

“속 괜찮아졌으면 병원은 내일 갈까?”

“아니요. 그냥 가요. 다시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내가 말이 지나쳤어요.”

“지나친 거 맞아.”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요. 사과 받아 주는 거예요?”

“생각해 보고.”

“그냥 쿨하게 넘어가 주면 안 돼요?”

그녀가 두 손을 꼭 잡고 눈치를 살피자 태욱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

“고마워요. 근데 병원이 어디예요?”

“전에 유주 네가 쓰러졌을 때 입원했던 그 건물 뒤편에 우리 종족을 위한 병원이 따로 있어.”

유주는 문득 그녀가 쓰러져서 입원했던 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잠시 생각하다 기억을 못 할 수도 있겠지 가볍게 넘겼다.

“간 김에 다른 검사도 같이 받자. 건강 검진 받을 때 됐다고 했잖아.”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죠.”

“가능할 거야.”

그때 병실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그녀가 입원했던 병실 뒤편에 커다란 건물이 두 개나 있었다. 차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세 번째 건물로 들어갔다.

“어?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이다.”

유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 원장이 다가와 먼저 알은 척을 했다.

“두 분이 같이 오시는 줄 몰랐습니다.”

엉겁결에 인사만 하고 두 사람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대화를 하는 동안 유주는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태욱이 다가왔다.

“오늘 할 수 있는 검사만 하기로 했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원장님도 태욱 씨와 같은 무족이에요?”

“이곳은 일반인들 출입은 금지되어 있고 직원들 모두 우리 종족이야.”

“혹시 우리 관계를…….”

“물어보지 않아서 별말 안 했어. 질문은 나중에 하고 일단 원장님 따라갔다 와.”

태욱은 유주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함께 들어갔던 금 원장은 금방 나왔다.

“검사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임신 가능성도…….”

“아닐 겁니다. 아니어야 하고요. 그보다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고요?”

“제 방으로 가시죠.”

금 원장과 함께 원장실로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며칠 전 보고에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더니 식사를 하는 도중 전화가 걸려 왔다.

‘방금 전 두 분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동안 출산 후 사망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 왔다. 경구약 개발은 물론 혈액 투석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몇 명의 산모가 효과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기대를 했건만, 갑작스러운 출혈로 사망했다고 했다.

“두 분 모두 3년이 넘었고 지금까지 별다른 징후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고 계신 거 압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뛰어난 신체적 지능적 능력은 있지만 최고의 의료진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도 출산 후 사망을 막을 수가 없다.

정말 방법이 없단 말인가.

태욱은 묵직한 신음을 토해 냈다.

“회장님, 이제 팔찌 주인만이 저희의 희망입니다. 좀 점에 진 여사님과 통화했는데…….”

“유주를 시험 대상으로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유주가 임신을 한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었다. 금 원장 전화를 받은 직후라 순간 당황해서 유주가 무슨 생각을 할지 미처 살필 겨를도 없었다.

‘연애 상대로만 생각했는데 발목 잡히게 될까 봐…….’

단 한 순간도 유주를 가볍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럴 리가.

이젠 유주가 곁에 없다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고, 팔찌의 효능이 확실하지 않은데 모험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저희와 평범한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확률은 1%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유주도 무족이 아닙니다.”

“무족은 아니지만 팔찌 주인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희 종족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염려하시는 마음은 충분히……. 죄송합니다.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거 같습니다.”

핸드폰을 확인한 금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주 때문입니까?”

“산모 때문에 대기 중인 박 과장한테 진료를 보게 했는데 상황이 안 된다면 다른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오늘은 약 처방만 해 주세요. 검사는 나중에 다시 하는 걸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금 원장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동시에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꺼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온 거 있어?”

-소이영 씨가 발견된 장소까지 가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소이영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태욱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처음 신고를 했던 사람도 죽었다. 가족도 없고 평범한 사람인데 원래 지병이 있었다고 했다.

“올라와서 내일 다시 이야기해.”

통화를 끝낸 태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마치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서서히 그를 압박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토록 막막했던 적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금 원장이 들어왔다.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 * *

유주는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준에게 연락이 와서 나가야 하는데 영 내키지가 않았다.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갈 거야.”

상훈이 만지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고 의자를 가까이 끌어와 앉았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같이 가 줄까요?”

“서류만 받아 오면 되는 거라서 혼자 가도 돼.”

“나도 약속이 있기는 한데 아직 한참 남아서. 장소가 어디인데요?”

“비밀이야.”

대꾸하기도 귀찮고 더 있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상훈이 뒤따라 나와 승강기 버튼을 눌러 주었다.

“오늘 한가한가 봐?”

“이따 형 만나서 고기 먹기로 했어요.”

“좋겠다. 많이 먹어.”

“선배는 다시 들어올 거예요?”

“생각해 보고. 내일 보자.”

승강기에 올라타자 상훈이 두 손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유주는 피식 웃으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