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갑자기 계속 집에 있었느냐고 물어봐서 순간 당황했었다. 게다가 마치 약국을 갔다 온 걸 아는 것처럼 아프냐고 해서 깜짝 놀랐다.
‘우리 사이에 비밀은 안 돼.’
태욱은 그녀에 대해서 사소한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싶다고 했었다. 그녀도 태욱과 같은 마음이라 서로 비밀 없기로 손가락까지 걸고 굳게 약속했다.
“어차피 임신은 아니니까.”
외출했다고 말은 했고, 약국을 간 건 숨기는 게 아니라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cctv를 보고 나간 걸 알았나?”
집 주변에 cctv가 열 개가 넘는다. 왜 이렇게 많이 달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집에 아주 귀한 게 있어서라고 했었다.
귀한 게 뭔지 몇 번을 물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새삼 궁금하네.”
유주는 어깨를 으쓱하고 차를 준비했다.
* * *
약속 장소에 도착했더니 태욱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서…….”
당연히 개인 룸인 줄 알았는데 직원의 안내를 받고 가 보니 창가였다. 유주는 신경이 쓰여 엉거주춤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자리가 풍경이 제일 멋있어.”
“알아보는 사람들 있을 텐데 룸으로 들어가면 안 돼요?”
예전과는 모든 게 달라졌다. 인터뷰 기사와 상관없이 더 칸 회장의 존재가 드러난 순간부터 한동안 태욱의 기사로 도배가 됐을 정도였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젠 민유주가 내 여자라는 걸 알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갑자기 왜 이래요?”
더 칸의 대단한 배경이 아니더라도 태욱의 독보적인 외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했었다. 밖에서 식사할 땐 따로 들어가 개인 룸에서 만났고, 집은 주차장을 이용해서 사람을 마주칠 일은 없었다.
언제까지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대한 알려지는 건 늦추고 싶다고 했고, 태욱도 동의했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기사 안 봤나 보네.”
“무슨 기사요?”
유주는 태욱이 건네준 핸드폰을 받아 들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더 칸 강태욱 회장의 피앙세. 그녀는 누구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 제목을 클릭한 순간 한동안 숨도 쉬지 못했다. 차에 타기 전 태욱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는 사진이 맨 위에 있었다. 다행히 뒷모습이기는 한데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 같았다.
“집에 가야겠어요.”
결국 식사는 하지 못하고 식당을 나왔다. 호텔 룸으로 올라가서 식사하자고 하는 걸 싫다고 했다. 유주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여자라고 알려지는 게 그렇게 싫어?”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니면 뭔데?”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반응하는 태욱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 커피숍 앞에서 여자랑 같이 있는 거 봤음.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더 칸 회장이었음. 그때 같이 있던 여자 뒷모습과 비슷한 것 같은데.]
[강태욱 회장 인터뷰했던 그 여자 아닌가? 거기 직원들 내가 좀 아는데 그 여자랑 비슷한 거 같다.]
[와우, 진짜라면 대박이다. 근데 더 칸 회장이 설마.]
댓글은 읽다 말았지만 그녀라는 게 알려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녀의 신상이 적나라하게 밝혀지겠지. 그렇게 되면 지금은 ‘설마’지만 이후엔 ‘감히’ 그 이상의 가시 같은 말들이 쏟아질 게 뻔하겠지.
그런 일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민유주.”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집으로 오는 동안 남 부장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상훈에게도 계속 전화가 와서 핸드폰을 아예 꺼 버렸다.
집에 도착해서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태욱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언제든 알려질 일이고 나만 보라고 했잖아. 나 또한 너만 보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언제까지 숨길 수 없다는 거 알아요. 단지 조금이라도 평범하게…….”
“내 곁에 있으면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건 모순이지.”
알고 있다. 아는데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됐을 뿐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태욱을 향한 마음은 끝도 없이 깊어지는데, 불안한 마음도 함께 자랐다.
“태욱 씨를 사랑해요.”
“알아.”
“근데 나 겁쟁인가 봐요. 기사를 보는 순간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잠깐 혼자 있고 싶어요.”
“유주야.”
“생각 좀 정리하고 나올게요.”
유주는 태욱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를 잡거나 방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후우. 못났다. 민유주.”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낯선 감정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태욱을 향해 흘렀다.
거부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젠 오직 태욱뿐이다.
유주는 문에 기대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태욱의 잘못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해야겠지?”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못난 꼴을 보인 것 같아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녀가 태욱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유주는 심호흡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태욱은 주방에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저녁 준비.”
“내가 할게요.”
“육수가 있어서 국수만 삶으면 돼. 앉아 있어.”
평일 오전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와서 집안일과 반찬을 해 주고 가신다. 출근하고 난 후에 와서 아주머니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유주는 태욱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예민하게 반응한 거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유주야.”
“나 못났죠?”
태욱이 돌아서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짐작했으면서 막상 닥치니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한 여자가 못났을 리가 없잖아.”
“매일매일 너무 행복한데 왜 이렇게 두려운지 모르겠어요.”
“자신감을 가져. 난 항상 네 편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 거야.”
든든한 내 편, 태욱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그런 존재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혼자 꿋꿋하게 잘 버텨 왔는데 이젠 태욱이 없다면, 그런 상상조차 할 수도 없게 됐다.
“욕심쟁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지켜 줘야 할 존재 말고 태욱 씨 여자로만 인정받고 싶어요.”
“이미 넌 내 여자고 당당해도 돼. 지킨다고 한 건 네가 내 여자니까 당연한 거야.”
내 여자,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유주는 까치발을 하고 태욱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내가 태욱 씨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회사 생활하는 데 불편해질 거 같아 더 조심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없다는 건 알아요.”
“기사는 내리라고 지시는 했는데 장담은 못 해. 누가 여러 곳에 제보를 한 거 같아.”
“알았어요.”
“배 많이 고파?”
“많이는 아니고. 어멋.”
갑자기 태욱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유주는 엉겁결에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사는 조금 이따가 하는 걸로.”
“물 끓는 거 같은데.”
“불 끄면 돼.”
태욱이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잽싸게 불을 끈 뒤 씨익 웃었다. 말려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 그녀가 먼저 태욱의 입술에 키스했다.
점점 깊어지고 농밀해지는 키스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은 건 두 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 * *
태욱은 외부 일정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와 업무에 집중했다. 급한 결재 서류를 처리하고 잠시 쉬려는 찰나 유주한테 문자가 왔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별말 없더니 무슨 일이야?”
-지난번 갔던 하남에 있는 식당 다시 가야 해요. 많이 늦지는 않을 거예요.
“혼자 가는 거야?”
-상훈이랑 같이 갈 거예요. 버섯 재배하는 곳 촬영해야 해서 혼자는 무리예요.
일 때문인 건 알지만 후배라는 남자와 동행을 하는 건 영 못마땅하다. 함께 지낸 후 유주가 자고 오는 일정이 잡힌 건 딱 한 번뿐이었다.
하필 그날 이상훈도 멀지 않은 곳에 일정이 잡혀 함께 움직일 거라는 말을 듣고 평일임에도 그가 따라나섰다.
‘같이 가면 좋기는 한데 태욱 씨 바쁘지 않아요?’
유주의 안전을 위해 지켜보는 자가 있고, 아무리 두 사람이 숙소를 따로 잡는다고 해도 당일치기도 거슬리는데 보고만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주는 무슨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그게 늘 불만이었다.
원하면 뭐든 다 해 줄 수 있는데 그에게 도움받는 걸 여전히 부담스러워했다.
-전화 끊은 거예요?
“아니.”
-아무 말이 없어서 끊은 줄 알았네.
“목소리 들으니까 보고 싶다.”
-몇 시간만 참아요. 나 지금 출발해야 해서 끊을게요.
“유주야.”
-지금 막 옥상에 옆 부서 직원이 올라왔어요. 이따 봐요.
전화가 뚝 끊겼다. 태욱은 까맣게 변한 화면을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없기는 한데.”
그동안 유주의 뜻을 따라 준 건 배후를 찾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이젠 그의 여자라는 걸 알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사가 나가면 유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지 했건만 여전히 걱정이 많은 것 같아 도로 내렸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구 실장이 들어왔다.
“회장님,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소이영 씨가 죽었답니다. 등산객이 산에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손가락이 나와 있는 걸 보고 발견했다고 합니다.”
“소이영 씨가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