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소이영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민유주는 어떻게 할 겁니까? 처음엔 죽일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생각이 바뀐 이유가 뭐야? 설마 진짜 팔찌에 대한 소문을 믿어요?”
“그동안 꽁꽁 숨겨 놓고 있었던 걸 보면 헛소문 같지는 않아. 아이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지만 듣기로는 출산을 한 후 여자의 피를 이용해서 무족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찾을 거라고 하더군.”
“그런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데?”
“알 거 없다.”
자꾸 이렇게 무시하면 재미없을 텐데. 이준은 어금니를 지그시 사리물었다.
아이를 낳고 여자가 단명하게 되는 무족의 저주.
치료 방법을 찾는다면 좋겠지만 그는 그딴 일엔 전혀 관심이 없다.
“팔찌 주인이 아이를 낳는 일은 없을 거다.”
“어째서?”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 민유주는 강태욱의 여자가 될 거야.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민유주를 이용해서 강태욱을 잡으면 돼.”
“민유주를 미끼로 사용하겠다?”
“민유주 가까이에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 적당한 때를 알려 줄 거다.”
도와준다는 자가 누굴까? 민유주와 같은 회사 사람인가? 아니면 지인?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아이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냐고 물어봐야 지금껏 그래 왔듯 알려 주지 않겠지.
지금까지 대화로 봐서 그가 종주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건데, 이제부터 어째야 하나.
이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넌 그 책을 생각 없이 읽었겠지만 난 우리 무족이 결국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반드시 복수도 하고 강씨가 아닌 우리가 추대하는 종주를 그 자리에 앉히는 날이 올 거다.”
“…….”
“일단 너는 인터뷰 기사가 나가는 걸 최대한 늦추고 민유주 상황을 지켜봐. 괜히 강태욱을 자극하는 짓은 하지 말고.”
“하기 싫은 인터뷰도 억지로 했는데. 후우,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합시다.”
이준은 벌떡 일어나 지하실을 벗어났다.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 냉장고에서 독한 술을 꺼내 들었다. 병째 들이켜다 냅다 집어 던졌다.
병이 박살 나고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시팔. 기분 더럽네.”
지금까지 헛고생한 것도 분통이 터지는데 천만 배우 이준을 겨우 들러리나 세우겠다 이건가?
결국 조두명은 대의라는 명목을 앞세워 개인적인 복수도 하고 원하는 걸 손에 쥐겠다는 건데, 이렇게 된 이상 계속 놀아날 수는 없지.
“민유주. 민유주를 미끼로 쓴다 이거지?”
이준은 입꼬리를 휘며 사악하게 웃었다.
* * *
어느새 이사를 한 지 몇 달이 지났다. 폭염과 열대야가 사라진 주변 곳곳은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동안 집을 알아볼까 계속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다.
출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편해진 것도 있지만 태욱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할 수 없이 행복해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토요일에 시간 안 돼?
“음, 토요일은.”
그동안 그녀도 바빴지만 은정이 2달 넘게 다시 파리로 출장을 가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로 바빠 통화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일할 때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나한테만 집중할 것.’
태욱은 그녀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서 본인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태욱의 체력은 감탄을 넘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잠자는 시간은 그녀의 반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피곤한 기색은커녕 늘 활력이 넘쳤다.
출근은 그녀보다 빠르고 약속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저녁은 같이 먹고, 주말도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안 된다고 하면 무작정 쳐들어갈 생각이었어.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나 어쩌면 1, 2년 정도 파리에서 지내게 될지도 몰라. 더 오래 있을 수도 있고.
“왜?”
-형준 씨가 파리로 발령이 나서 나도 신청했어. 다음 주에 결정 날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형준 씨도 같이 만나는 거 어때? 언제 또 시간이 될지 모르잖아.
“좋아.”
-우리 둘이 먼저 만나서 식사하고 형준 씨는 차만 같이 마시는 걸로 하자.
“알았어.”
은정과 통화는 오랜만이지만 문자는 몇 번 주고받았다. 데이트하는 사진을 보내 준 적이 있는데 남자 친구 얼굴은 보이지 않고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은정아. 행복하지?”
-그걸 말이라고. 나 할 말 많아. 너도 나한테 할 말 많지?
“응?”
-더 칸 강태욱 회장 인터뷰 네가 했다며? 그 기사를 네가 쓴 걸 사무실 직원이 말해 줘서 알았어. 그런 대단한 사건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아, 그거?”
태욱의 기사가 실린 책은 그동안 회사에서 출간한 책 중 역대급으로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인터넷 조회 수도 어마어마했다.
타 언론사에서 더 칸의 회장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어 연락이 엄청 온다는데 태욱은 전혀 응하지 않고 있다.
-그뿐이야? 대리 승진한 것도 그렇고 이사했다는 것도 오늘에야 알려 주고.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걸로 하고 오랜만에 그 곱창집 갈까?
“좋지.”
-오케이. 토요일 날 보자.
유주는 전화를 끊고 활짝 열어 놓은 베란다로 향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난 연애 생각이 없지만 넌 꼭 좋은 사람 만나. 진짜 좋은 남자 만나서 찐한 연애도 하고…….’
은정에게 미안하지만 태욱의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다.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지만 친한 친구라고 해도 조심스러웠다.
“그나저나 이준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그동안 몇 번이나 전화를 했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장이 없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파일을 핸드폰으로 보냈더니 ‘일단 보류’라는 문자가 온 게 다였다.
“기사를 안 낼 생각인가?”
확인을 하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러다 이번 달도 기사가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요즘 이준이 주연한 주말 드라마가 인기 폭발 수준이라 이럴 때 기사가 나가면 좋을 텐데.
유주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올려놓고 차의 병뚜껑을 여는 순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냄새가 진하지?”
좋아해서 자주 마셨던 건데 오늘따라 향이 너무 진하고 역하게 느껴졌다. 뚜껑을 도로 닫고 향이 거의 없는 다른 차를 집어 들었다.
“내 코가 예민해졌나?”
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는데 괜찮은 것 같더니 요즘 다시 심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땐 잘 먹던 음식도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입덧하는 것도 아니고.”
입덧? 무심코 중얼거리다 심장이 철렁했다. 황급히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유주는 차를 몰고 약국 앞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둘 다 조심을 하고 있어서 생각을 못 하고 있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믿지만 확인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임신테스터기를 사서 돌아와 곧장 욕실로 향했다.
“후우.”
결과를 확인한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혹시 몰라 두 번이나 해 봤는데 임신이 아니었다.
사용한 테스터기를 휴지로 꽁꽁 싸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거실로 나왔다. 그때 소파 위에 있는 핸드폰이 울렸다. 잽싸게 달려가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끝났어요?”
-가고 있어. 뭐 해?
“일하고 있다가 차 마시려고 준비하던 중이에요.”
-20분이면 도착해. 같이 마셔.
“알았어요. 조심해서 와요.”
유주는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했다. 혹시 임신일까 봐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밖으로 나와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태욱을 사랑하지만 아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이라.”
태욱을 닮은 아이라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울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계획 없이 무책임한 행동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태욱도 조심하는 걸 보면 그녀와 같은 생각이겠지.
“이제 10분 남았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할 줄은 몰랐다. 그와 함께 보내는 뜨거운 시간도 좋지만 그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마냥 좋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늘 혼자 있는 기분이었어.’
할아버지가 계셨어도 어릴 때 같이 살지는 않았다고 했다. 태욱도 외롭게 자란 것 같아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정원을 몇 바퀴 돌았을 때쯤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주는 방실방실 웃으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왔어요?”
태욱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출장을 갈 때를 제외하면 매일 보는데도 안 보면 보고 싶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태욱과 몇 날 며칠 외출도 하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들어가요.”
“퇴근하고 계속 집에 있었어?”
“그럼요. 아, 좀 전에 잠깐 나갔다 왔어요.”
“왜?”
“음료수 사러요.”
심장 떨어지게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지. 괜히 뜨끔했다.
“나한테 사 오라고 전화하지 그랬어.”
“혼자 있으니까 심심하기도 하고. 저녁은 뭐 먹었어요?”
“밥. 상대 쪽에서 예약했는데 맛은 별로였어.”
“부족하면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까요?”
“그 정도는 아니고.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나 아파 보여요?”
“피곤해 보여서 물어본 거야. 우리 내일은 밖에서 식사할까?”
“좋아요.”
“씻고 나올게.”
태욱은 방으로 들어가고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넓은 집에 혼자 있다 태욱이 돌아오면 꽉 찬 느낌이었다.
이젠 정말 태욱이 없는 시간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피곤해 보이나?”
이번 주는 거의 사무실에만 있어서 피곤하다는 느낌은 없는데 이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