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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37화 (38/69)

37화

이준은 책을 뒤적이다 짜증이 나 홱 집어 던졌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비법은커녕 말도 안 되는 내용들뿐이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더 기가 막힌 건 그동안 그가 했던 행동들 이 책에 그대로 적혀 있다는 거였다.

처음 1년 동안은 매달 이 주씩 물만 마시면서 버터야 했었다. 이후에 몇 년은 땅과 나무의 기운을 흡수해야 한다며 하루 종일 맨땅에 앉아 있거나, 나무에 올라가 몇 시간씩 머물렀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뿐 아니라 온갖 잡것들이 섞인 이상한 음료와 환을 먹다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오로지 최강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무더위와 살을 에는 한파에도 버티고 버텼건만, 딱히 힘이 더 강해지지도 않았고 특별한 능력이 더 생긴 것도 없다.

“애초에 비법이라는 게 없었던 거 아니야?”

노력해서 최고가 될 수 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강씨 집안에서만 종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직접 확인한 적은 없지만 강태욱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핑계를 대면서 조두명이 지금껏 음지에 숨어 한껏 몸을 낮추고 있는 이유!

그건 강태욱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내가 진짜 멍청한 짓을 했나 보네.”

누구는 24살에 종주가 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조두명을 버리고 강태욱과 친분이라도 쌓아 둘 걸 그랬다. 그랬다면 강태욱한테 접근하기 수월했을 테고 기회를 노렸다가 목줄을 끊어 버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설마 조두명이 저 책의 내용을 믿는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생각을 해야 해.”

이준은 짧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 색이 바랜 책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어떤 개자식이 저딴 걸 비법이랍시고 정성스럽게 적어 놨는지, 저걸 손에 쥐고 그를 좌지우지했던 조두명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대화를 해 봐야겠어.”

어쨌든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서도 조두명밖에 답이 없다. 협력자가 누군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아야 대책을 세우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이준은 내팽개친 책을 박박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지하실로 향했다.

조두명은 가면을 쓰지 않고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조두명을 빤히 응시했다.

“그동안 조용한 걸 보면 상처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나 봅니다.”

“…….”

“가면이 달랑 하나뿐인가? 내가 하나 사 줘요?”

“…….”

“이제 나랑 말도 안 할 겁니까? 아니면 귀에 이상이 생겼나? 내 목소리 안 들려요?”

“내 인내심에 감사해야 할 거다.”

“감사는 무슨. 내가 필요해서겠지.”

인정하기는 싫지만 편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의 실력으로 조두명을 상대하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을 거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그 싸움은 진 거나 다름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이긴다는 일념으로 싸움에 임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

본인 입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으니 할 말은 없겠지만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그가 아직 쓸모가 있다는 뜻이겠지.

이준은 입술을 삐딱하게 비틀었다.

“긴말 필요 없고 이제 다 까발려 봐요. 설마 저딴 개소리를 믿었을 리 없을 테고 처음부터 비법 따위 없었던 거죠?”

“경고는 이번뿐이다. 두 번 다시 경거망동하면 네놈 목을 뽑아 버릴 테다.”

조두명은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이준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조금만 늦게 정신을 차렸다면 청력을 잃을 수도 있었다. 평소 마향을 피워 두면 통증 조절이 됐는데 그날은 너무 심해 환까지 먹었다. 그로 인해 신경이 둔해진 탓에 재빨리 대처를 못 했다.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그냥 두세요.’

그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면 이준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끔 선을 넘어 죽여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이준을 감싼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두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 조용히 넘어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할게요. 그럼 이제 진지하게 대화 좀 해 볼까요?”

* * *

조두명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저 멍청한 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적당히 사탕발림을 해 둬야 할 것 같다.

대대로 강씨 집안에 대한 무족의 신임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각인된 것처럼 두텁다. 그는 노비 근성에 사로잡힌 무식한 종족의 사상을 기필코 깨부숴야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금껏 살아왔다.

“우연히 그 책을 접하게 됐고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보자고 생각했다. 내가 첫 번째 대상이었고 이후에 너를 포함 몇 명을 더 시도했었는데 다들 죽었다.”

“근데 난 왜 살아 있는 겁니까?”

“네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독에 중독된 내 피를 먹었기 때문일 거다. 내 피를 먹은 자는 너뿐이니까.”

첫 번째 실험 대상을 자신으로 한 건 일생일대의 실수다. 그로 인해 피부가 망가져 별의별 짓을 다 해 봤는데, 회복은커녕 점점 더 안 좋아져 진통제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돼 버렸다.

“나는 그렇다 치고. 영감이 첫 번째였으면 제일 먼저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난 독성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먹었고 이후엔 용량을 점점 늘렸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저딴 걸 시도해 봤다는 건데,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내가 최강자가 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네 말대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었을 뿐 큰 기대를 하고 시도한 건 아니다.”

“본인 몸에 무슨 짓을 하든 알 바 아니지만 나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대의를 위해서 작은 희생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준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지만 그는 뭐라도 해야 했다. 어릴 때 약초를 찾아다니는 부친을 따라 산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언젠가 내가 우리 무족을 구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그때가 오면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는 자는 없을 거야.’

부친은 무족의 여자가 아이를 낳고 죽지 않게 되는 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불행히도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약을 복용했던 사람들은 사산을 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로 인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며 살아야 했었다.

“대의고 나발이고 솔직히 말해 봐요. 얼굴 그렇게 된 거 약 때문이죠? 혹시나 하고 시도했다가 부작용이 생겨서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실험한 거잖아. 아닙니까?”

“그런 것도 없지 않지만 나중에 우리 종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대 의학으로 불가능한 치료제, 그걸 꼭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지.”

“그럼 약장사나 할 것이지 왜 사람을 꼬드겨서 실험 대상으로 삼아? 그런 짓을 했다는 걸 다른 누군가가 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말했다시피 모든 일엔 희생이 따르는 법이고 나 혼자 시도한 거라서 아무도 모른다. 구하기 힘든 약초라 그만둔 지 오래됐어.”

조두명은 이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배우가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애쓴 덕에 돈은 많이 벌지 몰라도 이준은 큰 그릇은 못 된다. 이용 가치가 있어 곁에 두고 있을 뿐 오래전에 기대를 접었다.

“그러니까 너도 자중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강태욱을…….”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강태욱을 왜 그렇게 죽이고 싶어 하는 겁니까? 영감은 종주 자리에 욕심이 없다고 했잖아.”

“우리 집안에서 강씨 핏줄한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조부를 포함해서 셋이다. 반란을 주도한 것도 아니고 적극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들었다. 내 조부는 단지 반란의 무리 중 한 명과 친했다는 이유였어.”

“저런. 강씨가 잘못했네.”

“조부가 죽임을 당할 때 아버지도 죽을 뻔했었는데 김 의원의 집안에서…….”

“김 의원? 그자가 누군데?”

조두명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지금까지 그와 관련이 있는 자들의 개인적인 모임이나 왕래를 철저하게 막아 왔다. 자칫 말이 새어 나가 강태욱이나 주변에서 작은 낌새라도 알아챈다면 지금까지 인내한 시간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테니까.

통증을 약으로 견디면서도 병원을 가지 않은 이유도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의원이라고 하는 걸 보면 높으신 양반인 거 같은데 설마 그자를 다음 종주에 앉힐 생각은 아니죠?”

“입 함부로 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

“협박을 참 예쁘게도 하네. 걱정 붙들어 매고 솔직하게 말해 봐요.”

“김 의원은 종주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야. 물론 너도 그렇고.”

“내가 왜 아닌데?”

“그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종주는 가장 강한 자여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마라. 너 또한 우리와 뜻을 같이했으니 그 이상의 대가를 받게 될 거다.”

지금 그딴 걸 위로랍시고 하는 건지. 이준은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지금도 딱히 부족한 건 없지만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반드시 그날이 올 거라고 믿고 또 믿었는데 이제 와서 콩고물이나 먹고 떨어지라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지금은 조두명과 척을 질 수 없으니 일단은 참아야겠지.

“며칠 전에 강태욱이 이곳에 왔었습니다. 소이영은 어떻게 처리한 겁니까? 뒤탈 없게 확실히 마무리한 거 맞아요?”

“산 깊은 곳에 묻었으니 절대 찾을 수 없을 거다. 다른 말은 없었고?”

“민유주가 팔찌의 주인인 걸 알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눈치였어요. 잘 넘어가기는 했는데.”

그날을 생각하니 다시 짜증이 확 일었다.

불쑥 찾아와 놓고 어찌나 당당하던지.

앉아 있는 자태와 눈빛, 표정이 여유가 넘치는 건 물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태욱은 재수 없게도 모든 걸 다 가졌다. 강태욱이 갖고 있는 전부를 가져올 수 없다면, 몇 개라도 아니 단 하나라도 반드시 뺏어 오고야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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