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주는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처럼 느긋하게 저녁을 먹으려고 퇴근하면서 장을 봐 왔다.
스파게티 재료만 남겨 놓고 정리를 한 뒤 냄비에 물을 올렸다. 야채를 다듬고 해물을 씻는 동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미친 척하고 3배를 부를 걸 그랬나?”
연봉이 2배나 올랐다. 시기도 아닐뿐더러 워낙 파격적이라 사인을 하던 손이 덜덜 떨리던 걸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왔다.
태욱에게 이 좋은 소식을 빨리 알려 주고 싶은데 오늘은 바쁜지 연락도 없었다. 전화를 해 볼까, 문자를 보내 볼까 하다 참았다.
“기다리는 동안 일단 시원하게 한잔해야겠다.”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맥주 캔 하나를 꺼내서 식탁에 앉았다. 맥주를 따다 말고 태욱을 떠올렸다.
‘내 인생에 여자는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함께 있으면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고 오로지 태욱만 바라보게 된다.
온통 주변이 그의 존재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
가끔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이러다 만약…….
“또, 또 쓸데없는 생각 한다.”
그동안 그녀를 외면했던 행운이 한꺼번에 왕창 쏟아져 들어온 것 같아 문득문득 두려울 때도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주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 내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크으, 좋다.”
물이 아직 끓을 기미가 안 보여 턱을 괴고 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문득 팔찌가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만이 찰 수 있는 팔찌.”
한 번 손에 차면 뺄 수 없다고 했었다. 이젠 몸의 일부처럼 느껴져 평소엔 아무 생각이 없다가 한 번씩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태욱 씨한테 물어볼까?”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 팔찌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풀 수 있을지도.
“예쁘기는 한데 말이지.”
유주는 보석 위에 손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때 찌릿한 느낌과 함께 불현듯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팔찌를 하고 있네.’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뗐다. 뭐지? 분명 낯선 목소리인데 왠지 처음 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 머리를 부여잡고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도 더 이상 생각나는 건 없고 머리만 아파 오기 시작했다.
“후우.”
유주는 두통이 점점 심해져 생각을 멈추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팔찌를 빤히 쳐다보다 다시 손가락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
바싹 긴장했는데 한참을 대고 있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다쳤을 때 들은 건가?”
태욱도 그날 그녀가 왜 그 정도로 다쳤는지 모른다고 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한데,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태욱이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알아낸 게 없는 거겠지.
“살아 있으면 된 거야.”
다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는 태욱 덕분에 살았다. 태욱을 생각하니 복잡한 생각은 싹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물이 팔팔 끓는 소리가 들려 스파게티 면을 넣으려고 할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유주는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현관으로 향했다.
“상훈인가?”
딱히 찾아올 사람도 없고 상훈에게 부탁한 서류가 있는데 오늘 준다고 했었다. 퇴근할 때 자리에 없어 급하지 않으니 내일 줘도 된다고 문자를 보내 놨는데 확인을 안 하고 가져왔나 싶어 문을 벌컥 열었다.
“상훈.”
예상과 달리 태욱이 서 있었다. 그동안 집 앞까지 데려다만 줬지 올라온 적은 없었다. 깜짝 놀라 멀뚱히 서 있자 태욱의 짙은 눈썹이 홱 추켜 올라갔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어서 실망했어?”
“바쁜 거 아니었어요?”
“들어오라고 안 할 거야?”
“아, 집이 좁은데.”
“내가 앉을 자리는 있겠지.”
유주는 성큼 들어서는 태욱을 피해 주춤 옆으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온 태욱은 주변을 휙 둘러보고 종이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재킷을 벗어서 의자에 걸쳐 놓은 뒤 넥타이까지 풀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연락이 없어서 못 만나는 줄 알고 책을 회사에 두고 왔는데.”
“그래서 반갑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오늘도 못 볼 줄 알았다. 뜻밖의 방문에 반갑기는 한데 장소가 신경이 쓰였다.
며칠 전 저녁을 먹고 태욱의 오피스텔에 갔었다. 안방 크기가 그녀의 집보다 더 넓었다. 혼자 살 땐 좁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건만 태욱이 있으니 공간이 확 작아진 느낌이었다.
“당연히……반갑죠.”
“대답이 너무 늦네.”
“혹시 화났어요?”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데 왠지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배라는 남자 집에 자주 와?”
“상훈이요? 자주는 아니고 용건이 있을 때만요.”
“무슨 용건?”
“전해 줄 게 있거나 차 수리를 맡기면…….”
“왜 말을 하다 말아?”
“상훈이는 나 많이 도와주는 후배예요. 집에 왔다는 건 문 앞까지 만이고 안으로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건 마음에 드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다. 세상에, 더 칸의 회장님께서 질투를 하다니.
심장이 간질거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유주는 빤히 쳐다보는 태욱의 시선을 피해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 먹었어요? 스파게티 할 건데 안 먹었으면 같이 먹어요.”
“초밥 사 왔어.”
“그럼 스파게티는 다음에 먹어야겠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재료를 대충 정리한 뒤 식탁 앞에 섰다. 종이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 놓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초밥과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튀김, 야채 샐러드와 반찬, 국물까지 작은 식탁이 꽉 찼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점심을 안 먹었어.”
“이 시간까지요? 배고프겠다. 얼른 앉아요.”
“손 먼저 씻고.”
“욕실은 저쪽이에요.”
유주는 태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늘도 못 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 그녀의 공간에 태욱과 함께 있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잠시 후 태욱이 욕실에서 나왔다.
“수압이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잠깐 그럴 때가 있기는 한데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요.”
가끔 물이 약하게 나올 때가 있기는 하지만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다. 유주는 의자에 앉아서 태욱이 다가오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외모는 오늘따라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모습까지 멋진 사람. 보고 있으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혼자 술 마시고 있었어?”
“캔 하나만 마시려고 했어요.”
“더 없어?”
“잠시만요.”
유주는 냉큼 일어섰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돌아서다 술을 마셔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멈칫했다.
물어볼 틈도 없이 태욱이 그녀가 마시던 캔을 가져가 들이켰다.
“대리 부르면 돼.”
“혹시 다른 사람 생각을 읽는 능력도 있어요?”
“안타깝게도 그런 능력은 없어. 걱정하는 거 같아서 한 말이야.”
태욱이 그녀가 들고 있는 맥주를 가져가 따서 도로 건넸다.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아 캔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건배해요.”
“축하할 일이 있나 보네.”
“나 연봉 2배 올랐어요.”
“3배가 아니고?”
“그건 말이 안 되고요. 그 정도까지도 생각 안 했는데 사장님이 먼저 금액을 말씀하셔서 놀랐어요. 건배 안 할 거예요?”
“좋아하는데 축하해 줘야지.”
짠, 부딪히고 맥주를 길게 한 모금 마신 뒤 캔을 내려놓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유주는 사람들의 반응을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이건 비밀인데 나 어쩌면 대리로 승진할지 몰라요. 사장님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신다고 했거든요.”
“인터뷰 한 번 하고 연봉 인상에 승진까지. 나쁘지 않네.”
“이게 다 태욱 씨 덕분이에요. 살다 보니 나한테 이런 행운이 올 줄이야. 식사 다했으면 우리 커피 마실래요? 원두 아니고 믹스. 허브차도 있어요.”
“커피.”
그녀가 재빨리 식탁을 정리하고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태욱은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방을 살펴보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 소파가 없는 데다 방석으로 내놓을 만한 게 없어 신경이 쓰였다.
“왜 거기 앉아요? 식탁으로 와요.”
“커피는 여기서 마시자.”
하는 수 없이 커피 두 잔을 준비해서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둘 다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다 보니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진짜 길다.”
“뭐가?”
“다리요. 그때도 키가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가 언제인데?”
“네? 아, 처음 만났을 때요.”
별말이 없는 걸 보면 태욱은 죽녹원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일을 기억 못 하거나 그 꼬맹이가 그녀인 줄 모르는 거겠지.
말을 할까 고민했었는데 당분간 혼자만 알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태욱의 곁에 오래오래 있고 싶다. 자꾸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마음과 함께 욕심도 커져 걱정이었다.
“어멋. 깜짝 놀랐잖아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 갑자기 몸이 홱 끌려가 태욱의 무릎에 앉혀져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음, 오빠 생각이요.”
“오빠?”
그녀의 볼을 다정하게 쓸어 넘기던 태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