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34화 (35/69)

34화

“결국 그렇게 결정하셨군요.”

“불만이 있는 말투로 들리는데.”

“아닙니다. 단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차라리 본가로 모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대대로 종주가 거주하는 본가는 보안뿐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지만 유주 회사에서 너무 멀다.

그래서 본가가 아닌 그가 가끔 머물던 주택으로 유주를 데려올 생각이다.

“구 실장.”

“네, 회장님.”

“앞으로 더 긴장해야 할 거야. 주변에 이상한 낌새가 없는지 각별히 신경 쓰고 작은 거 하나라도 절대 놓치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봐.”

태욱은 노트북 화면을 끄고 턱을 느리게 쓸었다. 몇 번의 사건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배후를 모를 수가 있을까.

짐작 가는 자나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언급이 된 건 김우석뿐인데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는 보고는 아직까지 없다.

‘돌아가신 회장님도 전혀 눈치를 못 채셨던 거 같아. 만약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면 나한테 말씀을 안 하셨을 리가 없어.’

그때 사건이 일어났던 날 할아버지가 외출하기 전 박상민 사장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고 했다는데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뒤통수를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자꾸 그날이 떠올랐다.

“후우.”

서류를 막 펼쳤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무 말이 없고 작은 숨소리만 들리다 뚝 끊겼다.

태욱은 미간을 좁히며 까맣게 변한 화면을 빤히 쳐다보았다. 며칠 전에도 소이영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받자마자 끊겼었다.

전화를 했다가 통화할 상황이 아니어서 끊은 줄 알고 다시 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석에서 편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한참 신호가 가도 받지를 않아 끊으려고 할 때쯤 어린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소이영 씨 핸드폰 아닙니까?”

-이모 전화 맞아요.

“소이영 씨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

-이모, 없어요. 이모가 계속, 계속 보육원에……. 흑, 안 와요.

“혹시 주변에 다른 어른 없니?”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인주가 또 전화를 했나 보네요. 저는 보육원 원장입니다.

“강태욱입니다. 소이영 씨한테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소이영이 자주 가는 보육원이 있고 매달 기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이는 예뻐하지만 결혼 생각은 없다고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보육원에서 봉사 활동도 하고 적게나마 도움을 주고 있다고.

-이영 씨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좀 된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차도 주차장에 있고 제가 가게 열쇠를 갖고 있어서 들어가 봤는데, 가방도 그대로 있고 핸드폰이 구석에 떨어져 있었어요. 혹시 몰라 핸드폰만 갖고 왔습니다. 메모는 남겨 뒀고요.

“그동안 전화 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퇴근할 때 가게 전화를 핸드폰으로 돌려놓는다고 들었는데 안 해 놨나 봐요. 혹시 몰라서 실종 신고는 했고 부재중 전화는 성 매니저와 준이라는 분뿐입니다. 제가 받기는 그래서…….

태욱은 몇 마디 더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주말 외에는 가게를 쉰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핸드폰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가방까지 놓고 사라졌다니, 게다가 벌써 나타나지 않은 지 꽤 됐다고 했다.

그냥 넘기기엔 뭔가 찜찜해서 비서실로 나갔다.

“구 실장, 지금 부산에 좀 다녀와야겠어.”

* * *

“후우.”

태욱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실록이 우거진 낮은 산 아래 높은 담벼락이 꽤 길게 이어졌고, cctv가 곳곳에 달려 있었다.

‘가게 cctv는 고장 났고 차 블랙박스는 칩이 없습니다. 경찰에서 조사를 하기는 했는데 단서를 찾은 건 없답니다. 직원 한 명은 두 달 전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고, 세 명은 다른 번호로 가게 문을 닫게 됐다는 문자만 받았답니다.’

한 명이 문자를 보관하고 있어 확인했는데 없는 번호라고 했다.

보육원을 찾아가 이영의 핸드폰을 확인한 구 실장이 보내 준 문자 중에 거슬리는 게 있었다.

[쭌, 혹시 팔찌 주인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

[나 여자한테 관심 없는 거 알면서.]

[그럼 다행이고. 근데 네가 말한 그 여자 말이야. 우리 잠깐 통화할까?]

유주가 이준을 만난 건 팔찌의 주인이 된 후다. 진 여사는 팔찌의 기운이 온전히 스며들기 전이라면 예민한 자들은 느낄 수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유주가 만나는 사람들을 예의 주시했는데 딱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자는 없었다.

“이준이 언급한 여자.”

이후에 주고받은 문자는 더 없고 짧게 통화를 하고 끊은 것 같았다. 문자 내용도 신경이 쓰이고 이영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이 이준이라 직접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은 담배를 끄고 대문 앞에 섰다. 벨을 누르기 전에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

대문을 열고 곧장 계단을 올라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현관까지 몇 걸음을 남겨 놓았을 때쯤 문이 열리고 이준이 나타났다.

막 샤워를 했는지 짧은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었다.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회장님과 비슷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요.”

이준은 놀란 기색도 없고 목소리도 차분했다. 태욱은 넓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엔 나무 한 그루 없고 직사각형으로 지어진 검은색 이층집뿐이었다.

“놀라게 했다면 사과하지.”

“놀라기는 했지만 영광입니다. 들어오시죠.”

이준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넓은 거실은 인테리어도 심플하고 필요한 가구 몇 개뿐이었다. 검은 유리창은 밖에서는 실내가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서는 창밖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준비하던 중이었습니다. 잠깐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됩니다.”

“차는 됐어.”

“제집에 오셨는데 그럴 수는 없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이준이 차 두 잔을 준비해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화면을 통해서만 봤지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이곳은 조용히 쉬는 공간이라 제가 주인인 걸 아는 사람은 매니저뿐입니다. 딱 한 사람이 더 있기는 한데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알려고 한다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이준 29살, 모델이자 배우.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이준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왔는데 긴장한 기색도 없고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스케줄을 조정했을 텐데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소이영 씨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어.”

“제 주변에 소이영이 두 명입니다. 한 명은 소속사에 근무하는 직원이고 또 한 명은 부산에…….”

“부산 쪽.”

“아, 제 팬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누나 동생 하는 사이입니다. 지난번 서울에 왔을 때 만나고 잘 도착했다는 연락 이후 통화한 적은 없습니다. 근데 누나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연락이 안 돼서. 집에도 안 들어오고 가게도 며칠째 문이 닫혀 있다더군.”

“여행을 갔나 보네요. 가끔 누나 혼자 여행 갑니다. 해외여행도 그렇고 전에 제가 제주도에서 촬영할 때 혼자 와서 며칠 머물다 간 적도 있습니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상황 설명을 더 한다고 해도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누나 걱정을 많이 하시나 봅니다. 저를 찾아오신 게 누나 때문입니까?”

“다른 것도 물어볼 겸 겸사겸사.”

“다른 거라면…….”

“팔찌 주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 거 같아서.”

“확실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누나가 이상하게 말을 전달했나 보네요. 사실은 제가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특이한 팔찌를……. 잠시만요. 이런, 양반은 못 되겠네. 잠깐 통화 좀 하겠습니다.”

이준이 그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표정도 목소리도 엄청 반가워하는 것 같아 누가 알면 애인과 통화하는 줄 알겠다.

“음, 내일은 강원도를 가야 해서 이번 주는 안 될 거 같은데. 스케줄 확인해 보고 연락할게요. 아무리 바빠도 시간 낼 테니까 걱정 말아요.”

유주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통화는 금방 끝났다. 태욱은 뭔가 아쉬운 듯 까맣게 변한 핸드폰을 응시하는 이준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특이한 팔찌를 했다는 힐링 출판사 직원 민유주 씨입니다. 제가 보석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처음 보는 거였습니다.”

“…….”

“소문을 들어서 누나와 대화하다 팔찌 주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고만 했습니다. 민유주 씨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팔찌 주인을 빨리 찾아야 할 것 같아 기대를 하고 왔는데, 일단 확인을 해 봐야겠네.”

표정이나 말투로 봐서 유주가 팔찌의 주인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팔찌의 기운을 느낄 정도로 예민한 자가 아니거나 배우이니 연기를 하는 건지도.

태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준을 응시했다.

“민유주 씨는 무족이 아닙니다. 제가 누나한테 괜한 말을 해서 민유주 씨를 곤란하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한 적이 있나?”

“없습니다. 사실 전 허무맹랑한 팔찌에 대한 소문을 믿지 않습니다. 팔찌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가짜라는 소리도 들리던데 진짜라고 해도 관심 없습니다.”

“대부분 관심이 많던데 의외네.”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저 같은 사람도 있겠죠.”

“난 이 일로 또다시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아.”

“저도 종족의 일원으로서 같은 생각입니다. 그만 나가 봐야 할 거 같은데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실례가 많았군.”

태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썩 믿음이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소이영이나 팔찌에 대해 아는 대로 전부 말하라고 다그칠 수는 없었다.

차를 출발하고 골목을 내려가면서 백미러로 이준을 쳐다보았다. 잠시 서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유주와 통화하던 목소리가 떠올라 꾹꾹 누르고 있던 불쾌감이 훅 솟구쳤다.

“인터뷰 기사를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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