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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32화 (33/69)

32화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리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일단 살려 뒀다가 미끼로 사용하자고 하더군.”

“저쪽이 누군데?”

“넌 알 거 없다.”

조두명의 협력자가 누굴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쪽 의견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 단순히 협력자가 아닌 윗대가리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감과 동급이야? 아니면 그쪽이 위인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그 이상은 말해 줄 수 없다.”

“됐어. 나도 알고 싶지 않아. 근데 이건 무슨 차야? 내가 마셔도 되는 건가? 지난번에 고생한 후로 겁이 나서 말이야.”

“세 번째 있는 거 마시면 돼.”

“어느 걸 말하는 거야? 이거? 아니면 이거?”

“굳이 왜 여기서 차를 마시겠다는 거야?”

투덜대던 조두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녹색 병을 집어 들고 싱크대에 탁 내려놓는 순간 젓가락으로 조두명을 가격했다.

정확히 눈동자를 조준했건만 잽싸게 피하는 바람에 젓가락이 조두명의 귀에 깊숙이 박혔다.

“아악.”

이준은 귀를 감싸고 휘청하는 조두명의 턱을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가면이 벗겨져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도대체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조두명의 얼굴 반쪽은 완전히 망가져서 끔찍할 정도였다. 처음 봤을 때도 흉터가 심하기는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알면 남의 살로 짜깁기를 한 줄 알겠다. 눈 아래가 시커멓게 변할 걸 보면 썩고 있는 건지도.

“네놈이 감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입부터 조져 놔야겠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준은 조두명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얼굴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몸에 올라타 아예 뭉개 버릴 듯이 후려쳤다. 귀에 박힌 젓가락을 뽑아 다시 찌르려는 찰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힘을 쓸수록 몸이 점점 더 굳어 갔다.

“이거 왜 이래?”

“배은망덕한 놈. 네놈을 살리기 위해 아까운 내 피까지 먹였는데 감히 이딴 짓을 해?”

“온갖 잡것들이 섞인 더러운 피를 마시면서 내가 얼마나 역겨웠는지 알아?”

그동안 조두명은 이름도 모르는 약초를 섞어 즙을 내거나 환으로 만들어서 꾸준히 먹어 왔다. 더 강한 힘을 갖게 되는 비법이라고 하면서 주기에 마셨다가 처음 몇 번은 환각 증상도 나타나고 고열에 시달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내 피가 들어간 환을 먹지 않으면 네놈 피부도 이렇게 될 거다.”

“예전이라면 그 말을 믿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 그거 안 먹은 지 꽤 됐거든.”

환은 더 곤욕이었다. 먹고 나면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 때문에 하루 종일 지옥을 경험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땐 조두명의 피를 마시면 괜찮아졌다.

그 짓을 몇 년 동안 하다 먹는 척만 하고 변기에 버렸다.

“그걸 먹으면 힘이 강해진다고 한 거 다 개소리지? 진짜 비법은 꽁꽁 숨겨 놓고 나한테 그딴 걸 먹게 한 이유가 뭐야?”

“네놈은 설명해도 이해 못 할 거다.”

“더는 쓸모없다면 내가 먹여 주고 재워 줄 필요가 없지.”

이준은 심호흡을 하고 온몸에 힘을 뺐다. 힘을 빼자 몸을 압박하는 기운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 즉시 힘을 끌어모아 조두명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귀를 다쳐서인지 조두명은 그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엄청 대단한 힘을 가진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네. 갑자기 의문이 드는데 말이지. 그 비법이라는 거 정말 있기는 한 거야?”

“지난 시간이 아깝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면 살려 주겠다.”

“아이고 무서워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영감 목숨은 내 손안에 있어.”

“멍청한 놈.”

이준은 조두명의 공격을 겨우 피했다. 그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손힘이 어마어마해서 그 기운이 섬뜩할 정도로 느껴졌다.

이러다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젓가락을 잽싸게 집어 들어 찔렀던 귀에 한 번 더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아아악!”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른 조두명의 몸이 축 늘어졌다. 상처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이 정도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내가 어떻게 영감의 힘을 벗어났는지 말해 줄까?”

“…….”

“상대가 힘으로 압박할 때는 반대로 최대한 약해져야 한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어. 가르쳐 준 대로 했는데 마음에 들어?”

정신을 완전히 잃었는지 대꾸가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시시하게 끝나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혹시 모르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그나저나 책이 어디에 있으려나.”

이준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일반 가정집 거실이라고 해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시선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조두명이 나온 곳으로 향했다.

곧장 성큼 다가가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 바위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휘익.”

실내를 살피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한쪽에 커다란 서랍장이 있고 넓은 공간을 반이나 차지하는 돌로 만든 평상만 있었다.

평상은 침대로 사용하기엔 넓어도 너무 넓었다.

“분명 이곳에 숨겨 놨을 거 같은데.”

서랍장엔 정체를 모르는 말린 뿌리, 열매, 이파리, 줄기, 가루가 담긴 통들만 가득 들어 있었다.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뭔가를 숨겨 놓을 만한 장소도 없고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문도 없었다.

밖에 뒀을 리는 없을 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가려다 평상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식하게 큰 평상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다 성질이 나서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이거였네.”

네모난 상자는 그동안 손을 대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녹이 슬고 열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를 잡아 뜯고 상자를 열자 오래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 * *

태욱은 아침 일찍 출근했다. 비서실에 구 실장과 재명이 같이 있었다. 별 말없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재명이 뒤따라 들어와서 투덜댔다.

“내가 투명 인간이야? 왜 알은 척도 안 해?”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야?”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을까 하고.”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어 안 되겠네.”

“민유주.”

태욱은 서류를 펼치다 말고 눈을 홱 치켜떴다. 다리를 거만하게 꼬고 앉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재명을 잠시 쳐다보다 담배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불을 붙인 뒤 돌아서서 후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내가 딱 두 종류의 인간을 질색하는데 하나는 눈치가 없는 인간, 또 하나는 본인이 눈치가 없다는 걸 모르는 인간.”

“난 둘 다 아니네.”

“지금부터 5분 줄게. 민유주를 언급한 이유, 설명이 디테일해야 할 거야. 아니면 진짜 한판 붙게 되겠지. 내가 대충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

목소리와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재명이 다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살 긁었다.

“반응이 너무 과하네”

“4분 42초 남았어.”

“한판 붙자는 말은 취소. 민유주 씨는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당장 나가라고 할 것 같아서 그냥 던진 거야. 아버지와 이야기했고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본사로 오는 건…….”

“종주로서 명령이야.”

“회사 문제에 치사하게 종주 카드는 왜 꺼내?”

“난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24살에 종주가 된 이후 그의 결정에 토를 달거나 설사 불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재명만 예외였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건 물론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올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무시하거나 귀찮은 내색을 해도 재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종주가 아닌 회장님께 정중히 부탁 좀 하자. 내 생각에도 아버지는 이제 좀 쉬시는 게 좋을 거 같기는 해.”

“그 이야기는 더 할 필요 없고. 민유주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말해.”

진짜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과 그 대상이 유주라는 게 알려지는 건 다른 문제다.

더구나 그들의 목적이 어쩌면 종주인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드는 상황이라, 유주와 관련된 작은 것 하나에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거 단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다.”

“난 회사 이야기를 하러 온 건데.”

“박재명.”

“아, 알았어.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지는 좀 됐어. 그 사람이 민유주 씨라는 건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됐고.”

“누구한테 들었는데?”

“우리 부서 회식 전날이니까 사흘 전, 쭈니에서 술 마시다가 중간에 화장실 가는 길이었어. 어떤 여자가 혼자 앉아서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 그때 들었어.”

태욱은 재명을 빤히 응시하다 담배를 끄고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계속해.”

“지나가다 얼핏 들은 거라 팔찌 주인 이름은 민유주다. 우리 쪽 여자는 아니다. 그게 다야.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터라 민유주 씨라고 확신하고 언급한 건 아닌데, 그 이름이 맞는 거야?”

팔찌를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그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종주가 되기 전부터 가짜 소동이 있었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자들뿐 아니라 팔찌의 주인으로 오해를 받은 여자가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그 여자 얼굴 다시 보면 기억할 수 있어?”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어. 체격이 좀 있는 편이었고 긴 머리였어. 검은색 셔츠를 입고 모자도 검은색. 그 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건 없어. 다시 돌아갔을 때 가고 없었어.”

“그때가 몇 시쯤이야?”

“시간은 정확히 모르겠고 쭈니에 8시쯤 갔다가 11시 다 돼서 나왔을 거야.”

그 여자가 유주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통화를 한 상대는 누굴까.

유주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는 건 분명한데,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즉시 확인을 했을 텐데.

태욱은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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