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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31화 (32/69)

31화

우르르 쾅쾅, 저녁부터 시작한 비가 점점 거세지더니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울렸다. 번개가 칠 때마다 불 꺼진 건물의 윤곽이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준은 정원 한가운데 서서 무덤 같은 집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한계까지 끌어올린 힘이 진정이 되지 않아 숨소리가 거칠었다. 벌써 1시간 가까이 세찬 비를 맞았건만 몸이 식기는커녕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직 때가 아니다.’

도대체 그때가 언제 온다는 건지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 주든가.

매번 물어볼 때마다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대답이 한결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감탱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는 못 참아.”

오늘은 기필코 대답을 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성큼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잠겨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액자를 치운 뒤 비밀번호를 누르자,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고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을 내려가 긴 복도를 한참 걸어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그동안 한 달에 두 번 정해진 날짜에만 이곳에 들어왔고, 그 외에도 연락이 올 때마다 달려와야 했었다.

요구 사항도 천차만별인데다 멋대로 그를 쥐고 흔드는 오만 방자한 조두명을 지금껏 참아 온 건 이 자리에 오기까지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다.

오로지 목적이 같기 때문이었다.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합시다.”

“내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딴 개소리 집어치우고 나와요.”

“건방진 놈.”

순간 가구가 흔들리고 강한 힘이 피부를 압박했다. 이준은 코웃음 쳤다. 이런 공간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곳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

“괜히 힘 빼지 말고 나와요.”

잠시 후 안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움직이고 가면을 쓴 조두명이 나왔다. 가면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했다.

부르지 않았는데 찾아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혹시 소이영 씨한테 무슨 짓 한 겁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대답이나 하세요. 설마 죽인 겁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이준은 욕설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동안 조두명은 그가 개인적으로 누구를 만나든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만남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도 없지 않았다.

소이영도 처음에 못마땅해했었는데 언젠가 이용 가치가 있을 거라고 하더니 왜 멋대로 손을 댄단 말인가.

화가 나는 건 소이영의 죽음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그로 인해 혹시 강태욱이 움직이게 된다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딱한 아이구나. 내가 널 도와주겠다. 같이 가겠느냐?’

그땐 누구라도 도움을 준다면 간 쓸개라도 빼 줄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도와주는지 이유 따위 궁금해할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무조건 조두명의 손을 잡았다.

조두명은 잘 먹고 잘 지내면 된다고 했었다. 실제로 감사할 정도로 모든 게 풍족했다.

그러더니 시간이 지나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종족은 너무 긴 시간을 강씨 집안의 손아귀에 놀아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무족의 미래는 없다. 네가 나와 뜻을 같이한다면 너를 최고로 만들어 주겠다.’

밖으로만 도는 부친 탓에 생활이 궁핍했고, 모친마저 시름시름 앓다 죽어 버린 뒤 먼 친척이 거둬 줘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종주가 누가 되든 관심도 없지만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게다가 조두명은 그의 부친이 강태욱한테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네 부친은 우리 무족을 위해 큰 뜻을 품고 강씨 집안에 대항하다 희생당했다. 네 부친을 죽인 자는 강태욱이야.’

강태욱, 부친을 죽인 원수.

그때도 지금도 그는 부친이 어떻게 죽었든 복수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최고로 만들어 주겠다는 조두명의 약속을 믿고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손에 쥐어지는 건 없고 매일 같은 자리만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조두명의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 팽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꼬리라도 잡히면 어쩔 겁니까?”

“내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지.”

“소이영은 그렇다 치고 민유주는 어떻게 할 겁니까? 애초에 싹을 자른다더니 왜 아직도 저렇게 멀쩡한 거예요?”

지하에 처박혀 있으면서 소식은 어찌나 빠른지,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걸 그보다 조두명이 먼저 알고 있었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무슨 방법? 그동안 뭘 하기는 했어요?”

“내가 하는 일을 네게 일일이 보고라도 하라는 거냐?”

“보고가 아니라 정보를 공유하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나한테 맡겼으면 깔끔하게 처리했을 텐데, 쓸데없이 인터뷰 나부랭이나 시키고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야?”

“뭘 잘못 처먹었나. 너 요즘 왜 자꾸 기어올라?”

이준은 입술을 삐딱하게 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예전엔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도 못 했지만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더는 못 참겠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날 아직도 코흘리개 애송이로 아나 본데, 나 국민 배우 이준입니다.”

“국민 배우 좋아하네. 널 그 자리까지 올라가게 한 것도 나고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도 나야.”

“자신 있으면 해 보든가.”

“그동안 주변에서 우쭈쭈 해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나 본데, 자꾸 건방 떨면 복수고 뭐고 다 끝이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복수는 둘째 치고 강태욱 털끝도 못 건드릴 거 같은데, 그러다 영감이 먼저 늙어 죽는 거 아닌가 몰라.”

그깟 복수는 알 바 아니다. 싸질러 놓고 책임을 진 적도 없는 부친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있다고 복수를 하겠다고 이 고생을 하겠는가.

단지 조두명이 그가 복수에 불타올라 있다고 오해를 해야 최고로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비법이 뭐예요?”

“오늘따라 헛소리를 길게 하더니 결국 용건이 그거였나 보네.”

“그동안 나를 농락했다면 여기서 끝내려고. 그러니까 진짜 비법이 있다면 지금 당장 보여 줘.”

“네놈 머리로는 그걸 봐도 절대 이해 못 할 거다.”

“영감, 날 자극해서 좋을 거 없을 텐데.”

“영감?”

“내 돈으로 먹고살면서 제대로 알려 준 적도 없고 모든 게 비밀. 내 인내심을 더는 시험하지 말지?”

조두명은 그동안 본인뿐 아니라 주변에 관련된 것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해 왔다. 그가 아는 건 조두명이 오래전 더 칸에서 근무를 했거나 그쪽과 관련된 일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 또한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서 짐작만 할 뿐 확실한 건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누가 같은 편인지 적인지 모르는 상황.

지금까지는 딱히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문득 비법이라는 걸로 현혹당한 자들이 자신 말고도 꽤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말고 말 잘 듣는 똥개가 더 있지? 누구야?”

“…….”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거 알아. 말은 안 했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

그냥 찔러 본 건데 말이 없는 걸 보니 짐작이 맞나 보네.

이준은 순간 눈이 확 돌았다. 무려 10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왔건만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 분노가 치밀었다.

벌떡 일어서서 이를 사리물었다.

“왜 자꾸 실패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순진했어.”

“순진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겠지.”

“개새끼.”

“넌 탈락이야.”

“탈락?”

“네 그릇으로는 더 큰 힘을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개소리 집어치워.”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주먹을 힘껏 뻗는 순간 조두명이 가뿐히 몸을 피했다. 몇 번을 휘둘러도 근처까지 닿지도 못했다.

“넌 내 몸에 손끝 하나도 대지 못해.”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멍청한 자식.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강태욱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 그자는…….”

“누가 알면 강태욱 예찬론자인 줄 알겠어. 그동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는데 오늘 한번 붙어 보면 되겠네.”

말이 끝나자마자 복부에 엄청난 힘이 강타했다. 방심했던 터라 몸이 날아가 벽에 쿵, 부딪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시팔, 이준은 욕설을 내뱉으며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조두명이 성큼 다가왔다.

“쯧.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 거다.”

“어이가 없네. 누가 누구를 거뒀다는 거야?”

“적당히 까불어. 네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발끝도 못 따라와. 한 번은 용서해 주겠지만 두 번은 없다.”

조두명은 항상 말투가 저딴 식이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한 번씩 욱하고 치밀 때면 진심으로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놈의 비법만 아니었다면 진작 무슨 짓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이준은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피식 웃었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그렇게 강태욱을 두려워하는 거야?”

조두명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지난번에 강태욱과 한번 붙어 보겠다고 했을 때도 아직 때가 아니라며 반대했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에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

‘하필 지금일 건 뭔지. 골치 아프게 됐네.’

민유주를 제거할 것처럼 굴더니 시도를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 아직도 멀쩡하게 잘 돌아다닌다. 뭔가를 했다면 실패했다는 뜻이고 안 했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테지만 이젠 궁금하지도 않았다.

“말하지 마. 들어 봐야 헛소리겠지.”

오늘은 절대 물러나고 싶지 않은데 어째야 하나.

그때 문득 싱크대 위에 있는 젓가락이 눈에 띄었다. 이준은 피식 웃고 두 손을 반짝 들어 올리고 싱크대로 향했다. 차를 준비하는 척하면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민유주 말이야. 계획을 바꿨다는 게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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