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 아까 그 두 분이 진짜 많이 부러웠어요. 나도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부모님 찾고 싶어?”
“아니요.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사는 게 녹록지 않았지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을 품은 적도 누군지도 모르는 그분들을 원망한 적도 없다.
큰 욕심 없이 평범하게 살자고, 처음부터 갖지 못한 것들을 애달파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짓은 전에도 앞으로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그런 거 같더군.”
태욱이 그녀의 빈 잔에 다시 와인을 따라 주었다. 단숨에 들이켜고 빈 잔을 빤히 쳐다보았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어쩌면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태욱은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고 그녀가 모르기를 바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한테 말을 안 해 준 건지도.
“나 태욱 씨 좋아해요. 진짜 많이 좋아하는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하게 해.”
심호흡을 하고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깨진 유리병을 들고 뒤로 성큼 물러나 손등을 길게 그었다.
“뭐 하는 거야?”
태욱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돌변했다.
“다가오지 말아요.”
“민유주!”
“지금은 그냥, 그냥 있어요.”
살짝 상처를 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는지 꽤 아픈데다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기억이 돌아왔군.”
“네.”
“그럼 말을 하지 왜 이런 짓을 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요.”
태욱의 표정은 여전히 잔뜩 굳어 있었다. 이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럴 땐 보통 지혈을 하고 상처를 치료하겠지만.”
손목을 꽉 잡고만 있는데도 길게 난 상처가 저절로 아물기 시작했다. 유주는 믿을 수가 없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진짜 꿈이 아니었다. 착각도 환각도 아닌 게 맞다.
놀란 그녀와 달리 태욱은 태연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피를 닦아 주었다. 상처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까 집에서요.”
“전부 다?”
“아닌 거 같아요. 내가 왜 다쳤는지는 모르겠어요. 혹시 알아요?”
“내가 갔을 때 다친 상태였어.”
“왜 다쳤는지는 나중에 생각할래요. 그보다 강태욱 씨, 당신 누구예요?”
정체가 뭐냔 말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웠다.
“혹시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사람이 아니면 좋아한다는 말 취소할 거야?”
“아니요.”
솔직히 겁은 나지만 두 번이나 그녀의 생명을 구해 준데다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다. 생명의 은인을, 좋아하게 된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 마음은 변함없어요.”
“이렇게 예쁜 말을 하면 참기가 힘든데. 사람이야. 단지 피가 다를 뿐이지.”
“피가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일단 앉아.”
태욱이 그녀를 벤치에 앉혔다. 유주는 말끔하게 상처가 아문 손을 쳐다보다 와인을 마시는 태욱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 나와 나눈 대화는 다른 사람한테 절대 옮기면 안 돼. 맹세할 수 있어?”
* * *
유주는 맹세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의 일도 약속을 지켰다. 설사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들보다 피가 진하고 독성이 있어. 심한 상처가 아니면 스스로 치료를 하거나 타인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
“그럼 혹시 기억을 지우는 능력도 있어요?”
“그런 건 없고.”
“근데 왜 내 기억이.”
“아마 다쳤을 때 충격이 심해서일 거야. 그날 일은 내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억지로 기억하려고 하지 마. 혹시 기억이 돌아올 때 무슨 증상 같은 거 없었어?”
“머리가 아주 많이 아팠어요.”
태욱이 가까이 다가와서 와인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가 무섭거나 두렵지 않아?”
“전혀요.”
“예쁜 말을 자꾸 해서 도저히 못 참겠네.”
“잠깐만요. 아직 궁금한 게……. 흡.”
입술이 뜨겁게 삼켜지고 그의 혀가 단숨에 파고들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궁금한 게 너무 많은데 뜨겁고 열정적인 키스에 금세 정신이 아득해졌다. 몸이 붕 떠오르고 정신이 없는 사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눕혀졌다.
유주는 턱을 한껏 젖혔다.
“다시는 위험한 행동하지 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태욱이 그녀를 뜨겁게 응시했다. 화염에 휩싸인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보니 숨이 턱 막혔다.
별장으로 가자고 했을 때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가 다가오면 거부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
생각은커녕 온몸이 달아올라서 급하게 내쉬는 호흡마저 뜨거웠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남자, 내 생명의 은인.
“아아, 태욱 씨.”
유주는 그의 목에 매달려 달뜬 신음만 뱉어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몸짓은 더 강렬해졌다. 힘이 너무 강해 악착같이 매달려도 손이 자꾸 미끄러지고 몸이 침대 위로 쑥쑥 밀려 올라갔다.
그때마다 태욱이 그녀의 몸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몸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멈췄을 때 유주는 축 늘어져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태욱은 정원 끝에 서서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높고 푸르고 바다는 고요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밤새 유주를 몇 번이나 안았는지 모른다. 기절하듯 잠든 유주를 보고도 도무지 절제가 되지 않았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만지고 핥고 그러다 눈을 뜨면 또 안고.
날이 환하게 밝아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12시가 지났는데 이제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등 뒤에서 유주의 시선이 느껴진 지 한참 됐다. 계속 모르는 척하자니 목뒤가 간질거렸다. 잠시 후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와 진한 커피 향이 느껴졌다.
“고마워.”
태욱은 커피 잔을 받아 들고 유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피한 유주는 바다를 향해 돌아서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마시고 인터뷰해요.”
“지난번 놓고 간 질문지 보고 정리해 뒀어. 메일로 보낼 테니까 확인해 보고 더 궁금한 거 있으면 추가해.”
“그걸 언제. 알았어요. 그럼 시간 절약할 수 있겠네요. 고마워요.”
“고마운 건 행동으로.”
그가 씨익 웃자 무슨 뜻인지 알아챈 유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내 새치름하게 눈을 흘기며 슬며시 옆으로 물러났다.
“이제 민유주는 내 거야. 도망가 봐야 소용없어.”
“도망가는 게 아니라 건전한 대화를 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더 칸의 회장님에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남자인데 두 팔 벌려 환영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왜 도망을 가요?”
“나중에 후회해도 절대 안 놔줄 거야.”
“후회할 일 없어요. 태욱 씨나 마음 변하지 마요.”
“그런 일은 절대 없지.”
태욱은 유주의 눈을 깊숙이 바라보았다. 오롯이 그를 담고 있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뻐근하게 조여 왔다.
그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많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담담하다.
‘치료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몸에 슈퍼 울트라 건전지도 있는 거 아니에요?’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절제가 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내가 5살 때 태욱 씨는 몇 살이었어요?”
“14살.”
“그렇구나.”
“그건 왜?”
“나이 많다고만 하고 몇 살인지 알려 주지 않아서 물어봤어요. 그리고 어제 우리라고 했는데 태욱 씨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아요?”
“많지는 않고 평범한 사람들은 분간하기 어렵지만 우리끼리는 알아볼 수 있어.”
다행히 다친 이유는 아직 기억이 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때가 되면 팔찌 이야기를 해야겠지. 되도록 늦게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아주 안 돌아오면 더 좋고.
“어떻게 알아봐요?”
“코가 예민하거든. 피 때문에 체취가 달라.”
“혹시 내 주변에도 있어요?”
“글쎄.”
회사에서 유독 가깝게 지내는 자가 있어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데, 그와 같은 종족이라는 걸 알면 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잠시 갈등하다 알려 주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했다.
“있어요? 누구예요?”
“나만 궁금해했으면 좋겠는데.”
“음. 알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모르는 게 좋겠어요.”
“저녁에 비 온다니까 근처에서 식사하고 3시나 4시쯤 출발하자.”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비 온대요? 저 아래 해변 걸어 보고 싶은데.”
“그 정도 시간은 충분해.”
태욱은 가까이 다가가서 바람에 흩날리는 유주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눈매를 곱게 휘며 웃는 유주가 너무 예뻐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살짝 닿는 걸로는 부족해 입술을 깊게 물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