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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9화 (30/69)

29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사이 키는 우편함에 가져다 놓고, 서류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월요일에 보내라는 말을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지금 무슨 말을. 설마 내 말을 진심으로 들은 거예요? 농담한 거예요. 농담. 당장 다시 전화해서 취소해요.”

“말 바꾸는 거 안 좋아해. 처리 비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덥석 물지.

유주는 너무 어이가 없어 푸우푸우. 입김으로 머리카락을 날렸다.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강태욱 씨, 아니 회장님, 내가 농담 아니 실언을 했어요.”

“호칭은 통일하고.”

“지금 그게 중요해요?”

“지난번에 차가 고장 났다는 말 듣고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어. 사용하던 차라 신경 쓰이면 새 차 뽑아 줄까?”

“됐거든요? 빨리 전화해서 취소나 해요.”

“이미 출발했을 거야.”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쓸데없이 한마디 했다가 졸지에 차 한 대가 뚝 떨어지게 생겼다. 차를 갖다 놔도 그녀가 타지 않으면 그만이기는 한데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일할 때 필요하고 눈앞에 있는 멀쩡한 차를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어차피 주차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차라 부담 느끼지 않아도 돼.”

“회장님 차면 중고라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빨간색 찻값이 얼마인데요?”

“차 이야기는 그만하고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꼭 우리 집 앞에 버리겠다면 찻값은 줄게요. 안 받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럼 절대 안 탈 테니까.”

“고집은. 나중에 구 실장한테 물어보고 알려 줄게. 계속 차 이야기만 할 건 아니지?”

“괜히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알았어요.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일단 차를 보고 결정할게요.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대화를 하다 보니 고속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태욱은 묻는 말에 대답을 않고 피식 웃기만 했다.

“비밀이에요?”

“강릉.”

지난번에 국수 먹으러 천안까지 가더니 무슨 인터뷰를 그렇게 멀리 가서 하겠다는 건지.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인터뷰 말고도 할 말이 많다.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하려고 꾹 참고 있는데 강릉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곳으로 가면 안 돼요?”

“초당 두부 맛있게 하는 곳이 있어. 근처에 예쁜 카페도 있고.”

“전에 기사 나간 적 없는 곳이에요? 혹시 사진 촬영이 안 되는 곳 아니에요?”

“그런 곳이 어딘데?”

“의외로 그런 곳 많아요. 그래서 취재하려면 방문 전에 미리 연락하고 가야 해요.”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어디를 가든 기사 쓸 생각부터 하는 이놈의 직업병도 문제다. 더구나 상훈의 문자를 받은 터라 귀가 번쩍 뜨였다.

“식당은 오빠가 카페는 여동생이 하고 있어. 입소문이 나서 문의 전화가 꽤 온다는데 그동안 인터뷰나 취재는 모두 거절했다더군.”

“아. 그럼 굳이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근데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두 분 모두 흔쾌히 응했어.”

“정말요? 취재해도 된대요? 태욱 씨가 직접 전화해서 알아봤어요?”

“심심해서 여기저기 알아보다 후기가 꽤 올라와 있는 곳이 있어서 전화해 봤지.”

더 칸 회장님께서 심심할 시간이 있나?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면 출장 갔다 와서 연락이라도 줄 것이지.

며칠이나 됐다고 퇴근 때마다 통화를 해서인지 허전하기까지 했었다. 그렇다고 출장 간 사람한테 용건도 없이 전화를 할 수는 없어 얌전히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도 잠시 생각지도 않은 취재 건이 생겨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요. 그럼 회장님 인터뷰부터 먼저 하고.”

“식당 사장님한테 3시 30분까지 간다고 했어. 내 인터뷰는 두 곳 모두 들렀다가 나중에 해.”

“그래도 되고요.”

유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하늘, 뭉게뭉게 떠 있는 하얀 구름, 날씨는 화창하고 휙휙 지나가는 실록이 우거진 창밖 풍경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인터뷰가 가장 큰 목적이기는 하지만 뜻하지 않게 다른 취재도 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태욱과 단둘이 차를 타고 가다 보니 마치 여행 가는 기분이 들었다.

* * *

강릉에 도착해서 식당 사장님과 인터뷰도 했고 카페 사장님도 만났다. 인터뷰를 할 때 태욱은 밖에 나가서 기다려 주었다. 짧게 끝내려고 했는데 음식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러다 보니 별장에 도착했을 땐 8시가 넘었다.

“동생 건강을 생각해서 몇 년째 음식을 해 주는 오빠라니, 두 분 인상도 좋고 우애가 남다른 거 같아요.”

식당 사장님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부친이 하던 식당을 물려받은 지 12년째라고 했다. 몸이 좋지 않았던 동생도 이곳에서 건강이 좋아져 카페를 운영한 지 몇 년 됐다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남매 사이가 부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식당 사장님 아이 못 봤죠?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낯가림을 안 해서 제 품에 쏙 안기는데 그때 그 느낌이…….”

“내 인터뷰엔 관심 없나 봐?”

“네? 그럴 리가요. 피곤한 거 같아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강릉까지 혼자 운전하고 취재를 하는 동안 기다려 준 게 고마워 별장으로 가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늦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태욱의 인터뷰를 해야 하니까.

“괜찮으면 지금 시작할까요?”

“내일.”

“그럼 그렇게 해요. 나 이제 정리 끝났는데 우리 뭐 할까요?”

“뭘 하고 싶은데?”

그러게. 이 밤에 둘이서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그나마 일을 하고 있을 땐 덜 신경이 쓰였는데 태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했다.

슬쩍 주변을 살피는 척하다 돌아보면 태욱은 여전히 그녀만 보고 있었다.

“흠흠. 우리 산책 갈까요?”

“이 밤에?”

“바다까지 내려가기는 그렇고 정원이라도 걷는 거 어때요?”

“그럴까? 잠깐 기다려.”

그녀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태욱은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유주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해안 도로를 따라 한참 달리다 언덕을 꽤 올라왔었다. 늦은 시간 외딴곳에 단둘이 있는 상황, 이렇게 어색할 줄 알았으면 인터뷰를 괜히 내일로 미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밤이라 공기가 찰 것 같아서.”

태욱이 들고 온 커다란 카디건을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꼼꼼히 여며 주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볼에 살짝 스치듯 닿은 그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몸이 바싹 긴장했다.

“커피 마실까? 와인도 있어.”

“와인 마실래요.”

“금방 준비할게.”

“나 먼저 나가 있을게요.”

유주는 태욱이 주방으로 향하자 밖으로 나왔다. 넓은 정원은 곳곳에 있는 가로등 때문에 환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나무 테이블 옆에 가서 섰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 피부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 어렴풋이 바다 냄새가 느껴지고 저 멀리 등대 불빛도 보였다.

‘살릴 거야. 내가 꼭, 반드시 살릴게.’

당분간 모른 척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말을 해야 할까.

어릴 때의 일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라고 하지만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은 왜 그동안 기억이 나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왜 다쳤던 걸까.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나무 터널과 멋진 주변 풍경까지 전부 기억이 나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꿈은 아닌데.”

분명 꿈도 착각도 환각도 아니다. 진짜 있었던 일인 것만은 확실한데, 다친 이유도 모르겠고 태욱이 어떻게 그녀를 치료했는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무슨 생각해?”

“음, 낮에 보면 풍경이 정말 멋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요.”

태욱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와인을 따랐다. 유주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뒤에 산책로가 있어.”

“산책로요?”

와인 잔을 받으려다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지난번처럼 혼자가 아닌 함께 가자는 뜻이겠지만 뚝 끊긴 기억 속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왠지 꺼림칙했다.

“지금 말고 내일 아침에.”

“구두를 신어서 곤란할 거 같아요.”

“혹시 몰라서 운동화 챙겨 왔어.”

“내가 신을 운동화를 가져왔다는 거예요?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 뒷조사를 했다더니 내 발 사이즈까지 확인했어요?”

“직접 만져 봐서 안 거지.”

유주는 얼른 잔을 받아 들고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뒷조사를 그런 것까지 했나 싶어 물었다가 함께했던 그날 밤이 떠올라 얼굴로 열이 확 올랐다.

달뜬 신음, 헐떡대는 숨소리. 뜨거운 열감.

온몸 구석구석 태욱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흠흠, 근데 처음부터 이곳에 올 생각이었어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중간에 관리인한테 연락했어.”

평소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다. 카페 사장님이 투병하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동생이 더 힘들어할까 봐 사망 소식을 알려 주지 않았단다.

‘엄마가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때 항암 중이라 동생이 많이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음식도 못 먹고 먹으면 토하고,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동생이 저를 많이 원망했었죠.’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차라리 죽여 달라는 동생한테 모친의 사망 소식을 알리면 삶의 의지를 완전히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고 했다.

가족의 사랑, 남매의 정.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보육원에 버려진 그녀는 느껴 보지 못한 분위기와 감정들, 그 모든 게 함께 있는 내내 한없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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