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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8화 (29/69)

28화

“그냥 먼저 연락을 해 볼까?”

평상에 앉아 핸드폰을 맹렬히 노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속을 잊었을 것 같지는 않고 기다려 보면 연락이 오겠지.

‘보고 싶어서 왔어. 나한테는 그게 엄청 큰일이라서.’

아닌 척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가슴 설레고 떨릴 줄은 몰랐다.

가끔은 이게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열심히 살았다고 복 받는 건가?”

진짜 열심히 살았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고, 앞으로도 잘 살아가라는 의미로 누군가 행운을 준 거라면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올지 모를 끝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연애에 최선을 다해야지.

후회 없이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해야지.

유주는 생글생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더없이 맑고 화창했다. 커피 잔을 막 집어 들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태욱일까 싶어 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더니 은정이었다.

“응, 은정아.”

-외출했어?

“아직 집.”

-잠깐 통화돼?

“무슨 일 있어?”

은정은 예정보다 일정이 미뤄져 어제 오전에 출장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하는 것 같아 짧게 통화만 하고 끊었었다.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입이 근질거려서 안 되겠어. 나 연애해.

“진짜?”

-내가 그 개새……. 입에 올리기도 싫은 그 인간 때문에 남자라면 학을 떼는 거 알지? 그런데 내 연애 세포를 다시 팔팔 끓어오르게 하는 남자를 만났어.

대학 3학년 때 만난 남자와 1년 넘게 연애를 했던 은정은 상대 남자한테 호되게 당한 후 연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었다.

그녀도 두 번 정도 함께 만난 적이 있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에 매너도 좋고 은정을 많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처음 뺨을 맞았을 때 충격을 받아서 헤어지려고 했었어. 근데 무릎 꿇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비는 걸 보니까 그놈의 정이 뭔지 매몰차게 못 하겠더라.’

두 번째도 용서를 했고 세 번째는 이건 아니다 싶어 헤어지자고 했다고.

이별 통보를 한 날 맞아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둘이 알콩달콩 잘 지내는 줄 알고 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은정을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출장 갈 때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는데 이튿날 우연히 또 만났어. 그 사람은 두 달 일정으로 파리 온 건데 우리 지사 옆 건물이더라고. 매일 일 끝나고 만났어. 대화도 잘 통하고 느낌이 좋아.

“잘됐다. 축하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고 어쨌든 이게 다 그때 그 네잎클로버 덕분인 거 같아.

“네잎클로버?”

-우리 한강 공원 갔을 때 네가 두 개 찾았잖아. 출장 가기 전 짐 정리하다가 그게 보여서 지갑에 넣고 갔거든.

아르바이트가 없던 날 은정과 둘이 한강 공원을 간 적이 있었다. 우연히 두 개의 네잎클로버를 찾았는데 은정이 코팅을 해서 하나씩 나눠 가졌다.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을 때 왠지 네잎클로버 덕분인 거 같았는데 이번에도 느낌이 그래. 너도 아직 갖고 있어?

“그럼. 잘 보관하고 있지.”

-우리 그때 같이 빌었으니까 행운의 여신이 너한테도 찾아갈 거야.

짧게 통화를 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만약 진짜 행운의 여신이 있다면 이미 그녀한테 찾아온 건지도.

유주는 빙그레 웃으며 후다닥 옥상을 내려왔다. 현관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자 할머니가 그녀한테 준 통장 위에 코팅된 네잎클로버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집어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이게 정말 나한테 행운을 준 건가?”

지금껏 살면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의 처지와 상황이 그랬으니까.

‘넌 운이 좋았어.’

불현듯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어릴 때 딸기를 따러 산에 올라갔다가 심하게 다쳤었다.

그 후 입양이 되고 은샛별이 아닌 민유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고 할머니와 사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육원의 기억은 저절로 잊혔다.

“그 남자.”

그날 산에서 만난 남자는 천사도 의사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심장에 손을 댔을 뿐인데 다친 몸이 멀쩡해졌다. 그리고 그때 뭔가를 마셨는데 남자의 피라고 했었다.

‘샛별아. 나하고 약속 하나 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아무리 5살 때의 일이고 그동안 사는 게 고됐어도 어떻게 생명의 은인을 잊고 있었을까.

“근데 그 목소리가 왠지 익숙……. 악, 머리야.”

유주는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주저앉아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 이거 뭐야?”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자 안개 속 같던 며칠 전의 일들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태욱과 식사를 하러 갔던 그 식당, 벚꽃이 절정이던 그곳.

“내가 다쳤……었나?”

혼자 산책을 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뚝 끊긴 기억 사이로 어렴풋이 피투성이인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윽, 너무 아파.”

그때의 통증이 온몸으로 느껴져 악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도저히 참을 수 있는 통증이 아니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조금만 견디면 괜찮아질 거야.’

‘살릴 거야. 내가 꼭, 반드시 살릴게.’

넓은 품, 그녀를 안고 끊임없이 만지던 손길, 괜찮아질 거라고 달래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어떻게.”

분명 태욱이다. 그리고 어릴 때 그 목소리도 흐릿하기는 하지만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도 안 돼.”

유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 안을 서성이며 계속 기억을 곱씹어도 그녀를 치료해 준 사람이 태욱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식사하러 간 곳에서 심하게 다쳤고 태욱이 치료를 해 주었다.

“강태욱, 당신 정체가 뭐야?”

어릴 때도 그랬고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

도대체 어떻게 살린 거지? 그런 능력이 있는 자가 실제 존재할 리가.

그런 건 영화나 책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착각 아니야. 분명 강태욱 씨가 확실해.”

지금 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태욱이 죽을 뻔했던 그녀를 두 번이나 구해 준 거다.

이번엔 어떻게 다쳤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릴 때 그녀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던 건가?

“바보.”

유주는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을까.

그때 산속에서 태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린 그녀는 죽었을 거다. 그랬다면 지금의 민유주는 존재할 수 없었겠지.

“당장 태욱 씨를 만나야겠어.”

눈물을 대차게 닦아 내고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다시 화장을 고쳤다.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막 나왔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뜨겁게 요동쳤다.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려와.

전화가 뚝 끊겼다. 유주는 까맣게 변한 화면을 잠시 응시하다 가방을 챙겨 잽싸게 집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을 나서자 태욱은 차에서 내려 통화를 하고 있었다.

두어 걸음을 남겨 놓고 멈춰 섰다.

당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었어!

와락 달려들고 싶은 걸 통화 중이라 꾹 참았다.

“…….”

훤칠한 키에 군살 하나 없는 몸매, 강인한 체격.

하늘색 바지와 같은 색의 셔츠를 입은 그의 옆모습은 근사했다. 머리를 다듬었는지 짧았던 머리가 더 짧아졌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귀까지 잘생겼네.

하기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곳이 없는 남자이기는 하지.

태욱의 정체가 무엇이든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니 오늘따라 더 멋있게 보였다.

“제가 먼저 만나 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통화를 끝낸 태욱이 그녀를 돌아보며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유주는 넋을 잃고 보고 있다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이 부은 거 같은데 울었어?”

“밤늦게 라면을 먹었어요. 우리 어디로 가요? 인터뷰를 하려면 조용한 장소였으면 좋겠는데.”

“일단 타.”

할 말이 너무 많아 망설이지 않고 태욱이 열어 준 문으로 냉큼 올라탔다. 차가 곧장 골목을 내려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태욱은 어릴 때 그녀를 구해 준 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치료를 한 걸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지금 당장 말을 할까 하다 도착하면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차가 계속 바뀌네요? 몇 대가 있는 거예요? 기사에는 안 쓸게요.”

“글쎄. 회사에 3대, 4대인가. 집 주차장에도 몇 대 있고 또.”

“정확히 몇 대인지 모르는 거 같은데 혹시 주차 공간이 부족할 리는 없겠지만 싫증이 났다거나 타기 싫은 차 없어요?”

“그건 왜?”

“버릴 거면 우리 집 앞에 버렸으면 해서요. 처리 비용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잠시만.”

태욱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유주는 마침 문자가 들어와서 액정을 터치했다. 상훈이었다.

[선배, 방금 편집장님이랑 통화하다 들었는데 ‘보름’ 식당은 다른 곳에서 우리보다 이틀 먼저 나올 거래요. 교체 쪽으로 갈 거 같으니까 알고 있으라고요. 좋은 주말.^^]

문자를 읽고 한숨을 푹 내쉬는 동시에 옆에서 기가 막힌 소리가 들렸다.

“회사 주차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빨간색 차 지금 바로 민유주 씨 집 앞에 갖다 버려.”

유주는 깜짝 놀라 태욱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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