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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7화 (28/69)

27화

태욱은 주문한 커피 두 잔을 받아 들고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문자를 보내고 정확히 7분 만에 유주가 나타났다.

“무슨 일 있어요?”

“엄청 큰일.”

“회사에 사고 났어요? 아니면 어디 다쳤어요?”

“보고 싶어서 왔어. 나한테는 그게 엄청 큰일이라서.”

걱정 가득한 표정이던 유주는 입을 벌리고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이내 열이 오르는지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쉬며 손부채질을 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데 반응이 왜 이래?”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회장님 원래 이런 분이었어요?”

“나도 나한테 놀라는 중이라고 했잖아. 빨리 적응해.”

“적응 안 될 거 같은데, 어쨌든 기사 나가면 사진도 실릴 텐데 이렇게 밖에서 만나는 건 조심해야 할 거 같아요.”

“난 상관없는데 신경 쓰이면 근처 호텔을 잡을 걸 그랬나?”

“호텔은 무슨.”

유주가 눈을 뾰족하게 치뜨고 그를 흘겨보았다. 태욱은 빙그레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마셔. 금방 올 거 같아 같이 주문했어.”

“내가 회사에 없거나 바빠서 못 나오면 어쩌려고.”

“어제 통화할 때 외부 일정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다음부터는 꼭 미리 연락부터 해요.”

“알았어. 나 안 보고 싶었어?”

“네.”

“거짓말.”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봐요?”

“보고 싶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고작 30분밖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게 아쉬워 출국 시간을 뒤로 미룰까도 생각했었다.

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저녁에 출장 가. 3박 4일이라 토요일 약속은 지장 없고.”

“많이 바쁜 거 같은데 질문지를 메일로 보낼까요? 그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요.”

“인터뷰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그 핑계로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까.”

“바쁘신 회장님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내 사진 몇 장 정도 보내 줄 수 있어요.”

“사진으로는 만족이 안 돼서. 직접 보고 만지고.”

“그만.”

얼굴까지 발개져서 당황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주변을 힐끔거리던 유주가 눈에 힘을 팍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상한 말 좀 하지 말아요.”

“우리가 연애하는데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할 이유는 없지.”

“눈치 보라는 게 아니라. 됐어요. 제발 부탁인데 조용히 커피 마시고 가요.”

태욱은 유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뽀얀 피부, 동그란 이마, 오똑한 콧날, 붉은 입술.

단지 지키고 싶은 마음을 넘어 곁에 둬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마음이 멋대로 자라기 시작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기는 하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주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30분 됐어요?”

“차에서 줄 게 있어. 같이 가자.”

“뭔데요?”

“가 보면 알아.”

유주와 함께 커피숍을 나와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수석 문을 열고 기다리자 머뭇거리던 유주가 차에 올라탔다.

태욱은 운전석에 타서 유주를 확 끌어당겨 입술을 단숨에 물어 삼켰다.

“읍.”

커피 향과 익숙한 체취가 훅 끼쳐 왔다. 몸 안에 있는 세포들이 기다렸다는 듯 요동쳤다. 요즘 그는 마치 몸 안 어딘가에 있는 빗장이 의지와 상관없이 모조리 풀어진 느낌이었다.

틈만 나면 환하게 웃고 있는 유주가 떠오른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술, 그를 향해 활짝 열렸던 유주의 몸, 생각만 해도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읍, 뭐 하는. 그만.”

혀를 감아 쭉 빨아들이자 유주의 턱이 바싹 들렸다. 두 손으로 유주의 볼을 감싸고 뜨겁게 키스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유주는 말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의 어깨를 꽉 잡고 더는 밀어내지 않았다.

타액과 호흡을 모조리 핥고 들이마셔도 만족이 되지 않는다. 태욱은 키스를 하면서 비행기 시간을 미룰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시간이 없다는 게 아쉽네.”

어쩔 수 없이 겨우 키스를 멈췄다. 유주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헐떡거렸다. 뜨거운 숨이 피부에 닿자 안 그래도 요동치던 욕망이 해갈을 요구하며 아프게 불끈거렸다.

“출장 가지 말까?”

“나 혼자 먹고살기도 바빠서 강태욱 씨까지 먹여 살릴 능력 없어요.”

“출장 한 번 안 간다고 우리 회사가 망할 일은 없고 내가 누군지 잊은 거야?”

“그럴 리가요. 해야 할 일은 하라는 뜻이에요.”

“가지 말라고 하면 지금 당장 호텔이나 내 집으로. 윽.”

갑자기 유주가 그의 가슴을 탁 때리고 뒤로 물러났다. 솜털을 건드린 정도의 자극도 안 되지만 과하게 아픈 표정을 짓자 걱정이 되는지 다가와서 그의 가슴을 손으로 살살 문질렀다.

“후배가 내 손이 맷돌이라고 했는데. 많이 아파요?”

“그렇게 문지르면.”

“더 아파요?”

“주차장이라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어.”

눈을 껌벅이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유주가 황급히 문 쪽으로 몸을 바싹 밀착시켰다. 태욱은 유주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 놀리는 거 재미 들였어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전혀 지루할 것 같지가 않아. 귀엽고 너무 예뻐서.”

“아우, 됐어요. 줄게 있다더니 뭐예요?”

“내 마음 그리고 키스.”

“와, 진짜.”

“감동받은 얼굴이네.”

“감동은 무슨, 그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사기 수준인 거 몰라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나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해요.”

“아쉽지만 나도 가 봐야 해.”

“출장 잘 갔다 와요.”

태욱은 유주가 주차장을 떠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 출발했다. 출장 때문에 유주와 약속을 토요일로 잡았다. 왠지 이번 출장은 더 길게 느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더 칸 본사 52층, 태욱은 출장에서 돌아와 잠자는 시간만 빼고 내내 사무실에 있었다. 그동안 밀린 일이 많아 처리할 게 많았다.

노크 소리와 함께 구 실장이 들어왔다.

“사장님께서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느낌인데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회사에서 물러나실 생각을 하고 계신 거 같습니다.”

“전에 몇 번 언급을 하기는 했었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박재명 본부장을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본사에 들어와서 금융 쪽 일까지 하라고 하면 날 잡아먹으려고 할 거야.”

재명은 툭하면 본인은 일하는 개미고 태욱은 베짱이 회장이라고 투덜댔었다. 지금도 업무량이 상당한데, 쉽게 응하지 않을 게 뻔했다.

“일단 사장님 시간이 언제 나는지 알아봐.”

“1시간 후에 약속이 있어서 나가신다고 하셨는데 지금 시간 되는지 여쭤볼까요?”

“그래도 되고.”

태욱은 박상민 사장을 만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재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재수 없는 회장님께서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하셨을까?

“내가 왜 재수가 없어?”

-너무 잘나서?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고.”

-네가 그래서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이럴 땐 좀 겸손하게…….

“겸손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방금 사장님 만나고 왔는데 조만간 조직 개편이 있을 거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재명은 말투는 가벼워도 업무에 관해선 차기 금융 회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딱 하나 불만이 있다면 말이 많다는 건데, 가까이 있으면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혹시 나도 포함이야?

“사장으로 승진.”

-뭐라는 거야? 나 지금도 뭐 빠지게 일하고 있거든? 본부장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사장을 하래? 그리고 우리 송 사장님 열과 성을 다해 직원들 뼈를 갈아 마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일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확실하게 하시는 분이야. 그런 분이 있는데 왜?

“금융 말고 본사.”

다다다 쏟아 내던 재명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태욱은 전화가 끊긴 건가 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외삼촌이 쉬고 싶어 하셔.”

-외삼촌 소리 오랜만에 듣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사석에서는 그렇게 불러.”

-그렇다 치고. 회사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왜 나야?

“사장님과 이야기 끝났어. 내가 결정했으니 문제 될 건 없고 되도록 빨리 그쪽 정리해.”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집에서 편히 쉬게 되겠지.”

-지금 그거 협박이야?

태욱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통해 뭔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강태욱 회장님. 너 진짜 재수 없어.

“능력을 인정해 주면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죽어라 일만 하라는 뜻이면서 고마운 거 좋아하네. 일단 내 대답은 거절이야.

“확실하게 해 둘 게 있는데 당분간 금융 쪽 일도 계속해야 해.”

-야, 강태욱.

태욱은 귀가 아파서 핸드폰을 멀찍이 떨어뜨렸다가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재명에게 금방 다시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고 무음으로 돌려 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향했다. 내일이면 유주를 만날 수 있다. 출장 가서도 매일 신 비서를 통해 보고는 받았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 외에 특별한 건 없다고 했었다.

“보고 싶네.”

* * *

유주는 커피를 준비해서 오랜만에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느 집에서 빨래를 널었는지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날씨 좋다.”

모처럼 집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하고 샤워까지 했는데 아직 11시도 안 됐다.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은정과 약속한 건 중요한 일정이 잡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취소했는데, 태욱은 출장을 가고 난 후 연락 한 번 없었다. 바빠서겠지, 이해는 하지만 돌아와서도 어디서 몇 시에 만날 건지 아직 전화가 오지 않았다.

인터뷰를 해야 하니 아쉬운 건 그녀지만 왠지 먼저 연락을 하는 건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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