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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6화 (27/69)

26화

“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 가장 걸렸던 게 무족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내용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무족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그 책을 읽고 헛된 꿈이라도 꾼다면. 그런 위험한 책을 왜 꽁꽁 숨기면서까지 보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숨겨 놨다고 해도 그가 봤듯이 누군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에 쓰인 대로 따라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내용들이 꽤 많았다.

책 속에 나오는 약초들을 몇 개 찾아봤는데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는 육체는 물론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황당한 내용임에도 권력을 향한 욕심과 탐욕을 넘어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잘못된 욕망을 부추기는 내용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저자가 누군지는 모르고 전에는 종주께서 보관을 하셨기 때문에 금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고인이 되신 회장님께서 보관은 하되 언급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이미 없어진 책이니 잊어버리세요. 그보다 오진주를 곁에 두는 이유가 뭡니까?”

“산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와서 키웠습니다. 저한테는 자식 같은 아이라.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태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매관의 일은 종주가 관여하지 않는다. 다음 영매를 결정하는 것 또한 영매관 소관이라 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가졌는데, 아니라니 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뒤따라 일어선 진 여사의 표정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전 영매님께서 어쩌면 금서의 필사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필사본?”

“돌아가신 회장님의 증조부께서 종주이셨을 때 금서를 도둑맞은 적이 있었답니다. 그 이후로 영매관에 보관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필사본 6권 중 5권은 찾아서 불태웠는데 마지막 한 권은 찾지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네요.”

하필 가장 문제가 되는 마지막 책을 찾지 못했다고 해도 오래전 일이고, 금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회사에 가 봐야겠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욱은 밖으로 나와 곧장 차를 타고 영매관을 떠났다. 운전을 하면서 책에 있는 낙서를 떠올렸다.

“별 다섯 개. 은샛별.”

무슨 의미일까. 별 뜻 없는 낙서라고 해도 작은 서재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전에 진 여사가 작은 서재를 가장 많이 드나든 사람이 자신이라고 했었다.

“은샛별, 이름인가?”

마지막으로 그 책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는 찰나 구 실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회사 근처라고 짧게 통화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내 낙서는 잊고 오늘 일정을 생각하며 속도를 높였다.

* * *

“날씨 좋다.”

유주는 옥상 벤치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켰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햇볕도 따스해서 여행 가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라.”

문득 끄라비로 여행 갔을 때가 떠올랐다. 일과 상관없이 여행을 간 건 그때가 두 번째였다. 거리가 먼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당일치기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고, 처음 여행은 입사한 지 1년째 되었을 때 은정과 제주도를 갔었다.

그때도 맛집과 카페를 들러 도움이 많이 됐지만 끄라비에서는 주변 경관 사진 몇 장과 달랑 팔찌뿐이었다.

“빨리 토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동안 태욱과 매일 통화했다. 퇴근하는 걸 기가 막히게 알고 전화를 하는 태욱이 신기했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편인데 사무실을 나와 차에 타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옆길로 새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 내 생각 많이 하고.]

태욱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따뜻한 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다.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대상이 어쩌면 진짜 태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너무 빨라.”

초스피드의 관계, 어찌할 사이도 없이 점점 더 깊어지는 감정.

고작 하룻밤의 관계로 이런 감정이 생긴다는 게 겁은 나지만 한 번뿐인 인생 후회 없이 살기로 결심했다.

‘그럴 것 같더라니. 더 칸 회장이 우리 회사에서 인터뷰를 할 리가 없죠. 누군가 장난친 게 분명해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상훈이 인터뷰에 대해 물어서 가는 도중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다음으로 미루자는 연락이 왔다고 대충 둘러댔다.

상훈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기대하지 말라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아주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상훈을 비롯한 회사에는 먼저 인터뷰를 하고 나서 말을 할 생각이었다.

“기다려. 내가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태욱이 말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토요일에 만나면 반드시 인터뷰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막 일어섰을 때였다.

“으악!”

유주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시커먼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옷은 물론 마스크, 선글라스, 푹 눌러쓴 모자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많이 놀랐어요?”

“누, 누구.”

“내 목소리도 기억 못 하다니, 섭섭하네요.”

남자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배우 이준이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반응이 없던데 유주 씨는 많이 놀랐나 보네.”

모자까지 벗고 벤치에 털썩 앉은 이준이 그녀가 들고 있는 커피를 가져가 홀짝 들이켰다.

“그거 내가 마시던 건데.”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커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켠 이준이 빈 컵을 쓰레기통에 정확히 던졌다.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유주는 아직도 시커먼 모습을 봤을 때 놀란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당연히 차 타고 왔죠. 사무실에 가서 민유주 씨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더니 옥상에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 줬어요.”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요? 사람들이 알아보면 곤란하잖아요.”

“알아봐도 상관없는데 전혀 눈치를 못 채더라고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난 엄청 보고 싶었는데.”

은정처럼 이준에게 열광하는 팬도 아니고 솔직히 인터뷰만 아니라면 딱히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빈말이라도 보고 싶다고 좀 해 주지.”

“안 그래도 내일쯤 연락하려고 했어요. 내용 정리는 거의 끝났어요.”

“인터뷰 말고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뜻? 좀 섭섭하기는 한데 대충 넘어가고. 우리 토요일에 만날까요?”

“토요일은 제가 선약이 있어요.”

“누구?”

“해야 할 일도 있고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은정한테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 연락은 없었다. 은정에게는 미안하지만 인터뷰가 우선이라 태욱을 만나야 한다.

“남자 친구?”

“전에 사인해 준 여자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지금 파리 출장 중인데 떠나기 전에 미리 약속을 한 거라서. 주말 지나면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날짜는 다시 정하기로 하고. 기사를 언제쯤 낼 생각이에요?”

“이번 달은 안 되고 괜찮다면 7월에 새로운 드라마가 방영될 시점에 맞춰서 나가는 건 어때요?”

“혹시 나 밀리는 거 아니죠?”

“밀리다니 말도 안 돼요.”

배우 이준과 더 칸의 강태욱 회장.

둘 다 특종이기는 한데 회사에서 기사를 나눠서 내기를 원할 테고 그렇다면 더 칸 회장을 선택할 확률이 당연히 높다.

“빨리 나가는 걸 원하면 인터넷 기사로 먼저 내는 방법도 있어요.”

“난 종이책이 좋아요. 클릭하는 거보다 손으로 넘기면서 읽는 걸 좋아해서.”

“그건 저도 그래요.”

“왠지 유주 씨도 그럴 거 같았는데 내 예감이 맞았네요.”

유주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이준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까칠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성격이 좋은 것 같았다. 인터뷰할 때도 그녀를 많이 배려해 주어서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점심 먹었어요?”

“그럼요. 벌써 3시가 넘었는데. 설마 이 시간까지 안 먹은 거예요?”

“광고 촬영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왔거든요.”

“무슨 광고 찍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

“아이스크림?”

“빙고. 밥 같이 먹을래요?”

“아, 그건 좀.”

“그냥 한 말입니다. 이왕 왔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같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바쁜 건 아니지만 이준과 함께 있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보석 색깔이 다시 돌아왔네요?”

“네? 아, 몰랐는데 어느 날 보니까 이렇게 됐더라고요.”

유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소매 아래로 보이는 팔찌를 슬그머니 감췄다. 이준이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잠시만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진동해서 액정을 확인했더니 태욱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바람 커피숍, 30분밖에 시간 없어.]

바람 커피숍이면 사무실 근처라 그녀가 노트북을 들고 종종 가는 곳이다. 유주는 문자를 빤히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가 봐야 해요?”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네. 같이 내려가요.”

이준은 주차장으로 가고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가방을 챙겨 잽싸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평소엔 걸어서 가는데 30분밖에 시간이 없다니 마음이 급해 차를 몰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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