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왜요?”
“모든 게 처음이거든. 그러니까 책임져.”
정성을 다해 누군가를 살린 것도 처음이고 뜨겁게 안은 여자도 처음이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유주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거짓말하는 거 같아?”
“사실 지금 좀 혼란스럽기는 한데. 무슨 말을 해도 다 믿고 싶은 걸 보면 콩깍지가 단단히 쓰였나 봐요. 그래서 뭘 어떻게 책임을 지라는 건데요?”
“나 말고 다른 남자는 쳐다보지도 말고 나만 많이 예뻐해 주면 돼. 다음 주 토요일 점심 같이할까?”
“다음 주 토요일엔 친구와 약속 있어요.”
최대한 빠른 날짜를 잡은 건데 어째야 하나. 다른 날로 옮길까 하다 유주가 어떻게 나올지 반응이 궁금했다.
“그날 아니면 내가 당분간 시간 내기 힘든데.”
“저도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요.”
“인터뷰를 늦게 하게 되면.”
“토요일 몇 시 어디로 갈까요?”
태욱은 단박에 말을 바꾸는 유주를 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유주가 잠든 사이 질문지에 있는 내용을 골라 정리해서 컴퓨터에 저장을 해 놓은 상태였다.
오늘 메일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냥 놔둬야겠네.
“인터뷰 욕심이 대단하네.”
“더 칸 회장님의 인터뷰잖아요.”
“더 칸의 회장이 아니라 내 남자 인터뷰라고 하면 기분 좋을 텐데.”
“연애는 강태욱 씨와 하고 인터뷰는 더 칸의 회장님과 하는 걸로.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방그레 웃는 유주가 예뻐 차가 신호에 걸리자마자 잽싸게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안 그래도 예쁜데 이제 내 여자다 생각하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디 한군데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 음. 이렇게 갑작스러운 접촉은 좀 곤란해요.”
“왜?”
“연애하기로 하자마자.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우리 속도를 살짝 늦춰야 할 거 같아요.”
“난 한번 마음먹으면 뭐든 직진하는 스타일이라. 내 손 꼭 잡고 무조건 따라오면 돼.”
대화를 하는 사이 유주의 집 근처 골목 앞에 도착했다. 전혀 눈치를 못 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여기는. 내가 사는 곳을 알고 있었어요?”
“나를 인터뷰하러 오는데 기본적인 조사를 안 할 수는 없지.”
“지금 내 뒷조사를 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유주의 눈이 뾰족해졌다. 태욱은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유주가 투덜대면서 차에서 내렸다.
“대단하신 회장님이라 어느 정도 감안한다고 해도 남의 뒷조사를 해 놓고 너무 당당한 거 아니에요?”
“난 언제 어디서든 당당해도 되는 사람이거든.”
“네, 네. 엄청 잘난 건 인정해요. 어쨌든 데려다줘서 감사합니다.”
“집 앞까지 갈게.”
먼저 움직이자 유주가 쪼르르 다가와 종알종알 떠들었다.
“혼자 가도 돼요. 뒷조사를 했으니 알겠지만 얼마 안 걸려요. 데려다줄 거면 차라리 집 앞에서 내리지 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연애 처음 하는 거 맞아요? 말하는 거 보니까 완전 선수 같은데.”
“나도 나한테 놀라는 중이야.”
“왜요?”
“내 안에 나도 몰랐던 내가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이라서.”
감정을 깨닫고 나니 욕심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가능하다면 유주를 혼자만 볼 수 있게 꽁꽁 숨겨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욱은 빙그레 웃으며 유주의 손을 꼭 잡았다. 슬그머니 빼려고 하는 걸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 곳에서나 이렇게 막. 우리 어제 연애하기로 했고 아직 24시간도 안 됐어요.”
“24시간도 안 됐는데 할 건 다 했지.”
“그런 말은 좀. 됐어요. 말을 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회사까지 데려다줄까?”
“차를 회사에 놓고 와서 동료가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아. 인터뷰 이야기는 혹시 몰라 아직 회사엔 말하지 않았어요.”
“데리러 온다는 동료가 남자야?”
“이상훈, 남자 아니고 후배요.”
유주의 주변에 관한 건 취재차 만나는 사람들까지도 상세히 보고를 받고 있다.
이준은 다시 만난 적이 없고, 이상훈은 신경이 쓰이기는 하는데 딱히 눈에 거슬리는 점은 없었다. 그래도 유독 친한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배도 남자야.”
“뭐지? 설마 대단하신 강태욱 회장님께서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가 아니라 걱정.”
“무슨 걱정이요? 됐고요. 기사가 빨리 나가는 게 좋아요?”
“빠를수록 좋아.”
“알았어요. 일단 인터뷰하고 나서 스케줄 잡아 볼게요. 나 들어가요.”
태욱은 유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은 환하게 밝았고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음식 냄새,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딱히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너무 허술하네.”
색이 바랜 건물은 오래된 것 같고 방범창도 없었다. 4층이라 옥상하고도 가깝다. 지켜보는 자가 있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고 거처를 옮길 방도를 생각해 봐야겠다.
태욱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다 골목을 내려갔다.
* * *
태욱은 유주가 상훈의 차를 타고 떠나는 걸 지켜보고 난 후 영매관으로 향했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오진주가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여사님은?”
“안채에 계십니다. 회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사님께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닙니다. 지금 막 여사님께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작은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낙서가 된 책이 있었습니다.”
태욱은 앞서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오진주를 돌아보았다. 영매관에는 서재가 두 곳이 있는데 건물 뒤편에 있는 작은 서재는 오래된 고서만 있어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
어릴 때 가끔 재명이 찾아왔을 때도 그 서재는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냥 넘기기엔 조금 이상해서요.”
“나중에 여사님께. 잠깐 내가 확인하지. 보관함에 넣어서 갖고 와.”
“네.”
진 여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난번 봤을 때보다 얼굴색은 좋아 보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나이가 드니 이제 몸이 버거운가 봅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외출을 금지했을 때도 보고는 받고 있었다. 그때도 몇 번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찾아오지는 않았었다.
“유주가 그 날 일은 기억 못 하는 거 같습니다.”
“만나 보셨습니까?”
“인터뷰 때문에 잠시 만났습니다.”
“정확히 언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했으니 기억은 돌아올 겁니다.”
“차라리 안 돌아오는 게 나을 거 같기는 한데.”
그때 오진주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찻잔과 함께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86장입니다.”
태욱은 오진주가 밖으로 나간 뒤 상자를 열고 책을 꺼내 들었다. 고서에 낙서가 있을 리 없을 텐데 책을 펼쳤더니 아래쪽에 별 다섯 개와 글씨를 썼다 지운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이 책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곤’은 어릴 때 회장님이 유독 좋아했던 책이었죠. 저한테 내용을 상세히 알려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는 여사님이 이 책을 읽은 줄 몰랐으니까요. 근데 누군가 낙서를 했네요.”
“낙서를요? 그럴 리가요.”
진 여사도 꽤 놀란 표정이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서 관리하는 곳이라 처음 작은 서재에 들어가기 전 주의 사항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었다.
“잠시 제가 보겠습니다.”
책을 건네받은 진 여사가 한참 동안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별 다섯 개, 글자가 세 개 같은데 처음엔 은, 마지막 글자는 별이라고 쓴 거 같네요.”
“은, 별이라.”
“두 번째 글씨가 새, 쌔, 셋 같기도 하고. 은새별, 은샛별? 꽤 오래전 낙서 같은데 어찌 된 일일까요?”
태욱은 책을 받아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글씨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다시 보니 어렴풋이 은샛별처럼 보이기는 했다.
별 다섯 개에 은샛별이라.
청소도 영매실처럼 진 여사가 직접 하고 분명 최근 흔적은 아니다. 책을 도로 넣고도 한참 동안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진주가 언제부터 작은 서재에 들어갔습니까?”
“아직 한 달이 안 됐습니다. 책을 워낙 좋아해서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허락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매가 된 후 작은 서재에 출입한 사람은 열 명도 안 됩니다. 그중 함부로 손을 댈 분은 없는데 이상한 일이네요.”
작은 서재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그의 종족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큰 서재는 출입이 자유로운 편인데 작은 서재는 종주라고 해도 진 여사한테 열쇠를 받고 들어갈 수가 있다.
전에 그가 영매관에 살았을 때 한동안 작은 서재를 매일 드나든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진 여사가 항상 문을 열어 주고 잠갔었다.
태욱은 문득 오래전 그가 불태웠던 금서가 떠올랐다.
“서재 벽장에 숨겨 놓은 책 말입니다.”
“회장님이 그걸 어떻게.”
처음엔 그곳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걸 몰랐다. 어느 날 책꽂이 사이에 약간의 틈이 보여 옆으로 밀쳤더니 벽에 나무로 된 작은 문이 달려 있는 게 보였다. 자물쇠가 무려 3개나 있어 호기심이 발동했다.
“열쇠를 제가 보관하고 있는데. 혹시 금서를 읽으셨습니까?”
그런 책이 있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꽁꽁 숨겨 놓은 책에 굳이 손을 댔다고 이실직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진 여사한테 말은 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돼서 읽어 봤습니다. 여사님도 그 책을 읽으셨습니까?”
“영매는 지키는 자일 뿐입니다. 다만 생과 사에 관한 내용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무족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왜 꽁꽁 숨겨 놨는지 알겠더군요. 우리 무족뿐 아니라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내용이라 고민 끝에 제가 불태웠습니다.”